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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병 27년… 오늘도 재즈가 있어 산다

해암도 2013. 4. 25. 20:52

[첫 내한 공연 가진 재즈 피아니스트 프레드 허시]
한국팬 열정에 앙코르 3번… 내게는 정말 드문 일이지요
하루 32알의 에이즈 약 복용, 투병 27년 중 지금이 가장 건강
늘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 그 마음으로 건반 두드려요

 

재즈 피아니스트 프레드 허시(57)는 빌 에번스와 키스 자렛의 서정(抒情)과 추상(抽象)을 동시에 담은 연주로 찬사를 받는 세계적 연주자다. 그의 음악을 말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그의 지병인 에이즈다. 동성애자인 그는 1986년 HIV 양성판정을 받았고, 이후 이 고질과 끊임없이 싸워왔다. 최근에서야 완쾌 단계에 이른 그는 지난 21일 첫 한국 무대에 올랐다. 앙코르를 세 번이나 할 만큼 환호받았다. 불굴의 이 미국 뮤지션을 22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한국 관객은 의사 표현을 잘 하고 열정적입니다. 나는 보통 앙코르로 1곡을 합니다. 2곡 할 때도 있지만 3곡은 정말 드물지요"라고 첫 한국 공연 인상을 이야기한 그는 재즈 피아니스트 셀로니어스 몽크부터 독일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까지 수많은 뮤지션에게 헌정하는 곡을 쓰고 연주해왔다. "영감으로 작곡을 하는 게 훨씬 재미있다"는 그는 자작곡 100여곡 가운데 20여곡이 누군가에게 헌정하는 곡이라고 했다.

그래미 후보만 5번… "음악에 등수가 어딨나?"

2011년 미국 재즈저널리스트협회가 주는 '올해의 피아니스트'를 수상한 허시는 올해도 이 상의 후보가 됐다. 그래미상은 후보에 5번 올랐지만 수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래미 방식의 상을 좋아하지 않는데, 뮤지션에게 등수를 매기는 게 가능한가요? 그래미는 음악보다 인기를 보는 상입니다. 늘 칙 코리아 아니면 개리 버튼이 받았죠. 또는 그 두 사람이 협연한 음반이 받았어요(웃음). 나에게는 저널리스트협회에서 주는 상이 더 의미있습니다."

스스로를‘아날로그 가이(analog guy)’라고 말한 허시는 1년에 한 달쯤 인터넷이 없는 예술촌에 들어가 연필로 작곡을 한다고 했다. 그는“컴퓨터는 느려서 안 쓴다”고 말했다. /채승우 기자
국내에서 인기 높은 미국 연주자 브래드 멜다우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허시는 "예전엔 항상 빌 에번스에 대해 묻더니, 요즘은 브래드 멜다우에 대한 질문이 빠지지 않는다"며 웃었다. 허시는 뉴욕 뉴스쿨에서 멜다우를 가르쳤다. 멜다우는 라디오헤드의 노래를 재즈로 연주하는 식의 다양한 시도로 젊은 재즈 피아니스트들의 우상이 됐다.

허시의 공연에서 'Pastorale'이 아름다운 선율로 큰 박수를 받았다. 그가 8세 때 슈만 곡을 연주했던 것을 기억하며 쓴 것이다.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으니 내게는 음악이 영어만큼이나 편한 언어입니다. 내 사운드나 터치에 클래식이 묻어있을 수는 있지만 나는 수많은 음악으로부터 영향받았습니다." 그의 연주는 스윙감이 적어 장단을 맞추며 듣기엔 적당치 않다. 그래서 덜 대중적이기도 하다.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런 연주는 베니 그린에게서 들으면 됩니다(웃음)."

"매일 약 32알 먹어… 늘 이번이 마지막 심정"

―건강은 어떻습니까.

"2008년 이후 계속 좋아지고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도 무척 건강해졌고 체력도 좋아졌어요. 지금도 매일 약을 32알씩 먹습니다. 아침에 16알, 저녁에 12알, 자기 전에 4알을 먹죠.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연주를 잘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느긋해졌어요."

1984년 첫 앨범을 낸 지 얼마 안 돼 병을 얻은 그는 89년까지 아무 처방도 받지 못했다.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86년부터 95년까지 주변에서 에이즈로 죽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때 약값만 1년에 7만5000달러(약 8000만원)여서 의료보험이 없는 환자에겐 무척 힘든 때였다"고 말했다. 89년부터 24년간 약물치료를 해온 그의 병세는 2008년 심각하게 악화됐었다. 정신착란으로 석 달간 두문불출했으며, 이후 폐렴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음악을 포기하려 했던 적이 있나요.

"정신착란으로 석 달간 소파에 누워지낼 땐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나는 죽음에 정말로 가까이 가보았습니다. 첫 앨범을 낸 직후에 진단을 받았으니 에이즈는 내 음악 곁에 내내 있었지요. 그래서 음반을 내거나 공연을 할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는 심정으로 했습니다. 그 힘이 나를 오늘까지 오게 했습니다."

―종교를 믿습니까.

"불교에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철학과 명상을 좋아하거든요. 피아노를 치는 것 역시 내게는 일종의 명상입니다."

그는 "내년에 트리오로 한국에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한현우 기자 : 2013.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