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463

과학이 보여주는 진취적 기상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옛날 인간들은 세상이 평평하다고 믿었다. 국지적으로는 산과 계곡 등 여러 가지 지형이 있지만 큰 그림을 볼 때는 거대한 평지에 약간 울룩불룩한 정도이지 않은가. 그리 멀리 어디 가 보지 못한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그래도 꽤 오래전부터 지구는 둥글고 그것이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모든 천체는 그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는데, 중국 등 다른 지역에서는 땅덩이가 공 모양이라는 ‘지구’ 개념을 강력히 거부했다고 한다. 그 중 한 가지 이유는 중국이 글자 그대로 세계의 중심에 있는 국가여야 하는데, 구형의 표면에는 중심이 있을 수 없다는 문제였다고 한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 증거를 편한 대로 선택해서 해석 ..

논설 2023.09.27

병자가 된 독일, 우리 미래는 다를 수 있을까

英·獨 옛 성공 모델 집착하다 혁신·활력 잃고 병자 신세 돼 우린 지금까지 잘해왔는데 그 성공에 안주할까 두려워 9월 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금융가 빌딩들 뒤로 해가 지고 있다./AP 연합뉴스 “한마디로 박물관이죠.”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의 유럽 평가는 짧지만 매섭다. 10여 년 전 국제 콘퍼런스 참석차 방한한 그는 전광우 당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과 글로벌 경제 전망에 대해 얘기하다 이런 진단을 내놨다. 그리스와 로마, 대영제국 등 과거 화려했던 시절 선조들이 이뤄 놓은 유산과 유물로 먹고사는 박물관 같은 존재 아니냐는 것이다. 유럽은 이제 세계를 이끌어갈 활력과 혁신을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한 존재라는 일갈이었다. 몇 년 전 이 얘기를 들었는데 유럽에 관한 한 이만큼 통찰력 있는 직관은 없다..

논설 2023.09.25

국가의 품격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 전 총장 요즘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다. 실제로 1인당 국민소득이나 국가 전체의 경제 규모 등 객관적인 지표도 그렇고, G20 등 국제 외교무대에서 받는 대우도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특히 한류(韓流)의 유행으로 세계적으로 한국은 가고 싶은 나라, 보고 싶은 나라가 되었다. 이제 변방의 잘 안 알려진 조그마한 국가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국민 의식의 변화도 가져와서 과거처럼 문제가 생기면 선진국을 바라보는 습관을 극복하고 우리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도 보이기 시작했다. ‘빠른 추격자’가 아니라 ‘선도자’로 발돋움하려는 자세를 갖추려는 것이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경제적으로 선진국 문턱 왔으나 선진국의 품격은 ..

논설 2023.09.17

홍범도가 본 홍범도

[송평인 칼럼] 소련서 나온 자료 보기 전까지 홍범도 아는 체 말아야 그의 自意識은 소련을 새 조국으로 삼은 빨치산 한인 무장해제에 가담했고 강제이주에도 불만 없어 문재인이 한 도발 바로잡는 걸 도발이라 해선 안 돼 송평인 논설위원 홍범도에 대해서는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자료를 보기 전까지는 알량한 지식으로 함부로 얘기해선 안 된다. 그중에서도 꼭 봐야 할 자료가 1932년 홍범도가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과 특혜를 받기 위해 제출한 이력서와 소련 정부 측 질문 항목에 맞춰 응답한 앙케트 자료다. 두 자료는 홍범도가 자신의 삶을 한 번은 자유롭게, 또 한 번은 형식에 맞춰 요약한 것이다. 동아일보가 1993년 대우그룹과 공동기획해 거금을 주고 러시아에서 구입한 자료에 들어 있었다. 홍범도는 1921년 11..

논설 2023.09.06

조소앙의 ‘홍범도 평전’으로 돌아가라

[정용관 칼럼] 1933년 펴낸 ‘독립 烈士 평전’에 이례적 수록 文정부의 ‘홍범도 띄우기’는 지나쳤고 尹정부의 ‘홍범도 지우기’도 과유불급 역사의 이념화, 역사의 진영화 언제까지 반복할 건가 정용관 논설실장 ‘삼균주의’ 조소앙 선생이 남긴 문집 중에 ‘유방집’이 있다. 독립운동가 82명에 대한 평전을 모은 책으로 1933년 중국 난징에서 펴냈다. ‘유방(遺芳)’은 꽃다운 이름을 후대에 남긴다는 의미다. 선생 자신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록을 남겨 놓지 않으면 자칫 잊혀질까 염려해 썼다고 한다. 일제에 분연히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거나 자결한 분들을 고루 다뤘는데, 그중에 ‘홍범도전(傳)’이 있다. 대부분 ‘죽은 열사’인데 이례적으로 생존자인 홍 장군이 포함돼 있는 것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논설 2023.09.04

국가로서의 한국은 왜 무능해졌나

[朝鮮칼럼] 새만금 잼버리 진심 부끄러워 안일·무능·부주의… 국가에 만연 입법 교착·입법 폭주, 국회는 엉망 사법부·선관위도 빨간불 법·원칙은 진영 논리로 대체 한국 민주주의는 자살 중 빠른 해결 없으면 정말 위험해 지난 1일 잼버리 벨기에 대표단이 공식 인스타그램에 플라스틱 팔레트 위에 텐트를 치는 장면을 공개했다. /인스타그램 새만금 잼버리 사태를 보며 진심 부끄러웠다. 어떻게 이토록 안일하고 무능할 수 있나. 잼버리 사태의 근본적 책임은 애초 잘못된 장소를 고집한 전북도에 있다. 무능한 데다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다. “대회 준비에 차질이 없다”고 큰소리친 여가부도 책임이 가볍지 않다. 중앙 정부의 책임은 없는가. 이 정도 국제 행사라면, 국무총리 산하 국무조정실이 사전에 꼼꼼히 점검해야 했다. 사실..

논설 2023.08.16

당신에게 통일은 ‘소원’인가 ‘사고’인가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윤석열 대통령(왼쪽)이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신임 김영호 통일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통일부는 남북 대화와 협력 담당 부처들에 대한 대대적인 인원 축소를 시작했다. 동아일보DB 폭염 속에도 통일부엔 칼바람이 분다. 소속 공무원의 4분의 1을 줄일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등 내부는 이미 꽁꽁 얼어붙었다.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통일부를 없애려는 정부조직법은 통과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통일부는 존치보다는 사라질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통일부가 어떤 일을 하는가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통일을 하지 말자는 여론이 해마다 높아지기 때문이다. 주성하 기자 통일연구원이 지난해 실시한 통일 의식..

논설 2023.08.07

기대 餘命(여명)과 발칙한 상상

野 혁신위원장 아이디어 반대로 적용해 보자 살날 얼마 안 남았으니 편향 없어 1인 1표 말고 3표 주면 어떤가 김은경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 앞에서 노인 폄훼 발언과 관련해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뉴스1 발칙한 상상 첫 번째. 집에서 독일 영화 ‘패러다이스’(2023)와 할리우드 영화 ‘인 타임’(2011)을 다시 봤다. ‘패러다이스’는 인간의 잔여 수명을 사고팔 수 있다는 흉칙한 상상으로 만든 영화다. 어떤 가난한 청년이 자신의 수명 중에 15년을 떼어내 80만유로를 받고 파는 장면이 시작 부분에 나온다. SF공상 과학에서도 가당찮을 얘기다. ‘인 타임’에서는 왼쪽 팔뚝에 전광 숫자로 표시되는 잔여 수명이 나오는데, 화폐와 똑같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논설 2023.08.07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

[김형석 칼럼] 잘못을 알면서도 거짓을 조작하는 정치인들 공동체 의식 없이 민주주의 근간을 흔들어 삶의 공동체인 대한민국과 국민의 불행 진실에 입각한 정직한 정치를 되찾아야 한다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은 잘못을 알면서도 거짓을 조작, 저지르는 사람들이다. 사회 여러 분야의 지도자들, 정치계 지도자 대부분이 그렇다면 사회와 국민은 어떻게 되는가. 70여 년 동안이나 지도자들의 폐습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질서 파괴와 도덕성 상실을 보면서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 책임은 정치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정치계 책임자들이 우리는 아니라고 항의할 수 있는가. 아직도 논의와 분규를 계속하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

논설 2023.07.28

프레임의 전쟁

진중권 칼럼 진중권 광운대 교수 “윤 대통령은 처가가 땅 투기를 해 놓은 곳으로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을 변경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게 했다.” 사건은 이해찬 전 대표의 이 단정적 표현으로 시작됐다. 민주당의 공세가 이어지자 급기야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사업의 ‘백지화’를 선언했다. 이 결정을 장관 혼자 내렸을 거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충분히 합리적 의심을 제기할 만한 사안이다. 예비타당성 조사까지 통과한 국책사업이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변경되었고, 종점으로 예정된 곳 근처에 마침 대통령 처가의 땅이 있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특혜를 의심할 것이고, 합리성을 벗어나지 않는 한 그런 의심은 사회를 투명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야, 합리적 의혹 넘어 비리 단정 장관은 국책사업 판돈처럼..

논설 2023.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