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담당 기자는 보통 일주일이면 10편 넘게 영화를 봅니다. 마감에 쫓겨 시사를 못 본 날이면 딴 날 저녁 일반 시사라도 봅니다. 감독이나 배우 인터뷰라도 할라치면 빼먹은 전작들도 훑어보고요. 식사를 건너 뛰기는 다반사고, 약속 잡기도 쉽지 않습니다. 캄캄한 극장 안에서 대사와 장면, 아이디어를 끝없이 메모하다 극장 밖에 나오면 눈이 침침합니다. 딴 사람들은 주말에 가족 연인과 손잡고 극장 간다지만, “영화 보러 가자”면 손사래부터 치게 됩니다.
하지만 몇십년 만에 왔다는 황금연휴 아닙니까. 집에 같이 사는 그 사람은 무슨 죄랍니까, 가끔은 영화도 봐야지. 이번 설에는 아내와 함께 극장에 가 볼 요량입니다. 그래서 골랐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두 번 봐도 시간 아깝지 않은 설 개봉영화 세 편!
독일군 암호를 해독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괴짜 수학 천재의 슬픈 일대기 ‘이미테이션 게임’은 여성들에게 인기 폭발인 영국 TV드라마 셜록 시리즈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입니다. 얼마 전 내한 공연한 트위팝 밴드 벨 앤드 세바스찬의 스튜어트 머독이 직접 노래를 쓰고 연출한 ‘갓 헬프 더 걸’은 혈당수치를 두 배는 높일 듯 달달한 음악이 매력적인 청춘 영화입니다. 베스트셀러 일본 만화가 원작인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은 일본 토호쿠 산골 마을에 사는 아가씨가 자신만을 위해 차리는 정직한 치유의 시골 밥상 이야기이고요. 듣기만 해도 마구 힐링이 되는 것 같지 않나요?
직장과 육아 스트레스, 설 음식 장만과 친척 대접 스트레스를 훅~ 하고 날려주면 좋겠다는 소망도 담았습니다. 설 연휴 좋은 영화 만나시고, 오랜만에 남편·아내 손 꼭 잡고 가정의 평화도 회복하는 명절 되시기를.
◇컴버배치 매력 폭발 ‘이미테이션 게임’
누구 말로 요즘은 ‘꽃미남’보다 ‘공룡남’이 대세라네요. 한국에도 작년말 금고털이 영화 ‘기술자들’로 250만 관객을 모으며 티켓 파워를 증명한 공룡남 김우빈이 있습니다만, 역시 원조는 영국 TV시리즈 ‘셜록’의 베네딕트 컴버배치겠지요?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영국 공룡남 컴버배치는 ‘호빗’ 시리즈에서 실제 용 스마우그의 표정과 목소리 연기도 맡았었지요.
아무래도 그의 특이한 외모엔 뭔가 비범한 역할이 어울리는 모양입니다. 이번엔 절대 해독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나치 독일군의 암호 코드를 풀어내 2차대전 승전을 이끌었던 전쟁 막후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1912~1954)이 되어 찾아왔네요. 사교성 제로에다, 미움받기 딱 좋은 퉁명스러운 성격, 자기 일에만 골몰하는 외곬수까지, 전형적인 괴짜 천재입니다.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아무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을 해낸다.” 이 대사가 서너번쯤 반복됐던 것 같습니다.
독일군의 ‘에니그마’는 24시간마다 1590억의 10억배 경우의 수를 생성하는 악명높은 암호기계였다는군요. 영국은 런던 북쪽에다 전국에서 뽑은 수학자, 천재 언어학자, 체스 챔피언 등을 모아 암호를 깨뜨릴 기밀 조직을 세웁니다. 산술적으로 2000만년 동안 해야 할 일을 20분 만에 해야 하는 ‘미션 임파서블’이죠. 튜링의 선택은? “기계에는 기계로 대적하자” 입니다.
튜링은 처칠 총리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자금 지원을 받아 갖은 곡절 끝에 인류 최초의 컴퓨터 ‘튜링 머신’을 만드는데, 이 과정을 함께 해 준 동반자가 크로스워드 퍼즐 풀기의 달인 조안 클라크(키이라 나이틀리)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인공지성(AI)에게 프로그램이 아닌 실제 지성이 있는가를 가려내는 ‘튜링 테스트’도 고안해냅니다. SF영화 팬이라면 ‘블레이드 러너’ ‘엑스마키나’ 같은 영화들을 통해 익숙하죠?
영화는 후반부에 뜻밖의 결말로 치닫습니다. 배우 컴버배치는 단지 멋있고 잘생겨서 인기 있는 게 아님을 연기로 증명합니다. ‘왕좌의 게임’ 시리즈에 사자 문장을 쓰는 라니스터 가문의 당주로 나왔던 찰스 댄스의 멋들어진 영국 액센트도 덤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한국시간으로 23일 열리는 올해 미국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등 8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습니다. 미리 영화 보고 어떤 상을 탈 지 예측해 봐도 재미있겠네요.
상영시간 114분, 15세 관람가.
◇밀크셰이크처럼 달달한 청춘 ‘갓 헬프 더 걸’
두번째 추천작은 ‘갓 헬프 더 걸’입니다. 오랜만에 연애 시절을 떠올리며 컴컴한 극장 안에서 슬쩍 손 한 번 잡아보시면 어떨까해서요.
“방 안에 갇혀 너를 떠올리네, 겨울의 너, 봄의 너, 여름의 너.” “내 방은 북쪽인데 해는 늘 남쪽을 비추네. 이렇게 멀리 있는데 나는 네게 가 닿을 수 있을까.” 살짝 소녀 취향인 이런 가사를 읽으며 상큼 발랄한 멜로디와 목소리가 자동 재생되신다면, 이 영화에 꽂히실 겁니다. ‘갓 헬프 더 걸’은 보고 나면 달콤쌉싸름해진 심장을 움켜쥐고 달려가 OST부터 사고 싶어질 음악 영화입니다. 트위팝 밴드 ‘벨 앤 세바스찬’의 프론트맨 스튜어트 머독이 노래를 만들고 감독도 맡았지요. 서구 인디씬에서 컬트적 팬덤을 갖고 있는 이 밴드의 노래를 들어봤다면 영화도 쉽게 짐작이 갈 듯 싶네요. 이 밴드는 얼마 전에 내한 공연도 했어요.
머독은 “달리기를 하던 중 갑자기 노래들과 거기 얽힌 이야기들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벨 앤 세바스찬을 위한 노래는 아닌 것 같았고 언젠가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야기엔 구멍이 숭숭 나 있고, 좀 예쁜 척 하는 주연 여배우 에밀리 브라우닝도 살짝 걸리지만. 뭐 어떻습니까. 청춘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빈틈도 좀 있고, 예쁜 척도 좀 하고 싶고.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가슴 짠한 그런 기억.
‘어른’이 되어가는 청춘들에게는 늘 잊지 못할 한 시절이 통과의례처럼 다가오지요. 마음의 병을 앓는 여자, 멜로디를 숭배하는 남자, 엉뚱 발랄 부잣집 딸 등 세 청춘 남녀는 음악을 사랑하는 공통점으로 만나 꿈처럼 아름다운 계절을 보냅니다. ‘갓 헬프 더 걸’은 세 사람이 만든 밴드 이름이고요. 사랑과 우정이 엇갈리고, 꿈과 이상이 서로 이어졌다 끊어집니다. 어렴풋이 기억날 것 같은 뻐근한 성장통(痛)이지요. 첫 맛은 달콤한데 끝 맛은 톡톡 쏘는 슈팅스타 아이스크림같은 노래들이 빅토리안 테마파크를 닮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풍경에 실려 날아와 장미가시처럼 콕콕 가슴에 꽂힙니다.
영화 수입사는 “‘원스’보다 산뜻하고 ‘비긴 어게인’보다 담백하다”고 선전합니다. 같은 음악영화로 놓고 볼 때, ‘원스’가 조금 어두웠고 ‘비긴 어게인’이 살짝 질척이는 느낌이었다면 이 영화에 대한 평가로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머리가 묵직해지는 독한 위스키같은 영화도 좋아합니다만, 너무 달아서 그만 마시고 싶은데 웬지 멈출 수 없는 밀크쉐이크 같은 이런 영화도 괜찮을 것 같네요. 아내와 함께니까요.
상영시간 111분, 15세 관람가.
◇산골마을 힐링 먹방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아내와 함께 보는 설 영화, 마지막 추천작은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입니다. 잡채 볶고 전 부치느라 고생 많으셨죠? 이 영화는 기름냄새 쏙 빼고 과일, 나물, 야채, 집에서 만든 가정식 소스 향으로만 가득한 시골 밥상같습니다. 영화 예고편의 자막을 한 번 옮겨볼게요. “토호쿠 지방의 작은 마을 코모리, 우리 집은 계곡과 숲, 논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도시 생활을 접고 코모리 시골 마을에 왔습니다. 오늘부터 나를 위해 소중한 세 끼를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천천히 정직하게 자연같은 삶을 누리고 싶습니다. 지친 당신을 위해 따뜻한 밥상을 선물합니다.” 자, 내용이 짐작가시나요? ‘카모메 식당’, ‘하와이언 레시피’ 같은 일본 영화들이 떠오르는데, 이 영화는 그보다 훨씬 자연, 아니 시골 친화적입니다.
일본 동북지역 산 속 깊숙이 시골 마을, 엄마는 5년 전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혼자 고향집에 사는 이치코(하시모토 아이)는 오리를 풀어 논농사를 짓고, 야채를 심어 기르고, 산나물과 호두, 감을 따다 이리저리 요리해보며 삼시 세끼 혼자만을 위한 밥상을 준비합니다. 뚝방에서 주워온 호두로 지은 호두밥은 단단함 속에 고소함을 품고 있고, 조금만 신경 써 저장하면 사철 먹을 수 있는 토마토는 말랑말랑한 식감과 달리 실은 어디서든 뿌리를 내리는 강한 열매입니다.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특색있는 맛이 나는 ‘밤조림’ 열풍이 시골 마을에 부는 모습엔 절로 웃음도 나고, 하룻밤 묵혀두면 시원하게 익는 식혜의 모습도 눈이 즐겁습니다.
이 영화는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고, 당장 올 봄에는 텃밭이라도 가꾸고 싶어질 겁니다. 따로 책 살 필요없이 영화 자체가 한 권의 슬로푸드 요리책이라 할 만큼 꼼꼼하게 레시피를 소개합니다, 추르릅. 만화책도 담백한 재미가 있지만, 만화 속 흑백 요리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영화는 더 재미있습니다. 사철 땡볕에서 밀짚모자 하나 쓰고 일하는 처자 피부가 어찌 저리 하얀 건지 좀 의아하긴 합니다만. 올해 말엔 ‘겨울과 봄’ 편도 개봉한다니 기대가 크네요.
상영시간 111분,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