퓰리처 상을 2회 수상한 강형원 포토저널리스트가 지난 4월 서울 덕수궁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는 그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한국의 정체성이 왜 우수하고 훌륭한지 구체적으로 알고 좋아할 수 있도록 밑천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조인원 기자
퓰리처상 2회 수상자인 강형원이 중명전 앞에서 활짝 웃었다. LA타임스를 거쳐 AP와 로이터통신에서 일했던 그는 은퇴후 모국으로 돌아와 5년째 한국의 문화유산을 사진과 영문으로 기록해 세계에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조인원 기자
강형원을 소환한 건 트럼프 주니어였다. 미국의 불법 이민자 단속 반대 시위가 격화하자, 1992년 LA 폭동 당시 ‘무장한 한인 청년들’ 사진을 올려 시위대를 조롱한 탓이다.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강형원은 ‘내 사진을 허락 없이 사용한 데다 문맥에도 맞지 않는다’며 즉시 삭제를 요청했다.
사진 소동이 있을 때 그는 백두산에 있었다. ‘30년 놀던 물’인 워싱턴 정가를 떠나 모국으로 온 강형원은 호랑이, 고인돌, 가야 고분, 훈민정음, 종묘, 반구대 암각화 같은 ‘옛것’들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보도사진을 접은 건 아니다. 트럼프가 피습 후 귀에 붕대를 감고 나타난 유세 현장, 해리스로 후보를 바꾼 민주당 전당대회에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12·3 계엄 땐 용산, 여의도를 거쳐 수도방위사령부로 달려갔다. 워싱턴 정치인들 문자가 그의 휴대폰에 실시간으로 꽂혔다. ‘계엄, 실화야?’ ‘한국 대통령이 회복 불가능한 행동을 했군.’
LA타임스, AP통신을 거쳐 백악관 전속 사진가로도 일했던 강형원은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 중 김밥 먹는 사진은 매우 아쉽다”고 했다.
◇대한민국이 2차 대전 후 생긴 신생국?
-현직을 떠나서도 바쁘게 산다.
“시간보다 소중한 것은 없으니까(웃음).”
-반구대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날 만세를 불렀다던데.
“나의 문화유산 프로젝트 첫 촬영작이기도 했고, 물에 잠겨 훼손돼 가던 이 고귀한 유산을 한국 정부가 이제야 제대로 관리하겠구나 싶어 안도했다.”
-첫 작업이 왜 반구대였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 암각화가 한국에 있다는 데 놀랐다. 범고래, 혹등고래, 북방긴수염고래 등 무려 7종의 고래가 새겨져 있다. 암각화가 더 희미해지기 전에 사진으로 생생하게 기록하고 싶었다.”
-트럼프 주니어 덕에 LA 폭동 당시 강형원이 찍은 ‘총을 든 한인 청년들’ 사진이 소환됐다. 스스로 최고 인생작으로 꼽은 사진이기도 하다.
“세상을 바꾼 사진이었다. 1990년대 미국 사회에서 동양 남성들은 천대받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지질하고 비겁한 캐릭터로 그려졌다. 그런데 백인 경찰들도 포기하고 철수한 한인 타운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선 한인 청년들의 모습이 그 편견을 깨뜨린 것이다. 그 후 할리우드 영화에서 동양 남성은 근육질에 섹시한 인물들로 그려진다(웃음).”
-LA타임스 기자 5년 차에 촬영했더라.
“한국어를 할 줄 알고 한인 타운 지리를 아는 유일한 기자였다. 흑인 밀집 지역인 사우스 센트럴부터 한인 타운까지 무서운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사망자가 속출했던 위험한 상황이었다.
“기자로 일할 땐 ‘나’는 지우고 사명감만 남겨야 한다. 총알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나는 한국계 청년 이재성이 피살된 장면을 촬영했고, 그 사진이 보도된 뒤 LA 폭동이 비로소 멈췄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뒤 AP통신으로 옮겼더라.
“LA타임스는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장이었지만, 나는 세계 정치의 중심인 워싱턴 D.C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제대로 하든가, 집으로 가든가’라는 워싱턴 사람들의 입버릇처럼 ‘삶은 연습이 아니고 실전’이라는 혹독한 사실을 그곳에서 배웠다.”
-경쟁이 치열했나?
“LA에서 온 동양인 팀장이 백인 기자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기 위해 분투했던 시절이다. 기획력, 편집력, 디지털 신종 카메라의 첨단 기술력까지 앞장서 섭렵한 것은 물론, 가장 먼저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하는 팀장이었다. 두 번째 퓰리처상은 그 견고한 팀워크의 결실이다.”
백악관 전속 사진가로 일하던 2001년 1월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과 악수하는 강형원. /강형원 포토저널리스트
◇ 이재명 대통령의 ‘김밥 사진’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백악관 전속 사진가로 스카우트됐다.
“최근접 거리에서 대통령의 24시간을 지켜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클린턴에서 부시로 정권이 바뀌는 시기였다.
“대통령 취임 당일 새벽 6시에 불려 나갔다. 럼즈펠드 국방 장관과 콜린 파월 국무 장관 선서식을 촬영하기 위해. 권력 승계 과정에서도 국방과 외교는 단 1분의 공백도 없어야 하므로 대통령보다 먼저 취임하는 것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강형원을 ‘형’이라고 불렀다는데.
“이민자였지만 나는 한국 이름을 고집했다. 기사의 바이라인도 ‘형원 강’으로 썼다. 다만, 형 이다(웃음).”
-부시, 오바마 대통령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워싱턴에서 성공한 정치인들의 공통점은 온화하고 예의 바르다는 사실이다. 클린턴, 부시, 오바마는 정말 ‘나이스’한 사람들이었다. 누굴 만나든 자기를 퍼스트 네임(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면서 상대를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처럼 대했다. 대통령 부인도 마찬가지다. 힐러리 여사는 막 구워낸 따끈따끈한 쿠키를 쟁반에 담아 직접 갖다주셨다. 로라 여사는 눈을 마주치면서 경청하는 분이었고, 미셸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악수를 건넸다.”
-오바마는 백악관 전속 사진가의 덕을 가장 톡톡히 본 대통령이라고들 한다.
“나의 라이벌 피트 수자(Souza)의 뛰어난 감각 덕분이기도 했지만, 백악관 참모들의 전략적 배려도 컸다. 그들은 미리 기자들에게 사진이 될 만한 대통령 동선을 알려준다. ‘찍지 마!’라는 제지 대신 모른 척 눈감아줄 때가 더 많다. 기자들이 창의적인 사진을 건질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준 뒤 대통령의 소탈하고도 인간적 면모를 알리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트럼프 대통령실도 그런가?
“과거 전통이 다 깨졌다고 보면 된다(웃음). 트럼프는 광대다. 매번 새롭고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필요하면 언론 겁박도 서슴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실에서 제공하는 사진은 어떤가?
“대통령 사진은 그 나라의 품격을 보여준다. 따라서 ‘대통령다운’ 모습으로 기록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무회의 중 김밥을 먹는 대통령 사진은 아쉬웠다. 굳이 입을 벌려서 김밥 먹는 사진을 공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무리 멋진 배우도 입 벌려 음식을 먹는 모습은 멋지게 나오기 힘들다. 트럼프와 통화하는 사진도 마찬가지다. 볼펜을 들고 뭔가를 받아 적는 모습보다, 대등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진을 연출했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5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 중 점심으로 김밥을 먹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 언론을 눌러 이긴 정치인 없다
-미국으로 이민 간 게 1970년대 중반이었다.
“아버지는 호남평야를 개간했던 중장비 기술자였다. 중동이냐 미국이냐를 고민하다 4남매 교육을 위해 미국을 택하셨다.”
-차별받은 기억은 없나.
“미국에서 차별받지 않는 방법은 미국 사람보다 영어를 잘하는 것이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한인 타운에선 영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생각에 LA교육국에 전화를 걸어 백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중학교로 전학을 신청했다. 왕복 2시간 버스를 타야 했지만 영어와 스페인어, 미국 역사를 배우는 게 즐거웠다.”
-UCLA에선 정치학을 전공하며 대학 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일간으로 발행하는 UCLA 신문은 그 영향력도 대단해서, 내겐 미국 사회의 모든 주제를 학습할 수 있는 기회였다. 레이건 대통령도 대학 신문 기자 시절 취재했다. ”
-투지가 느껴진다.
“지고는 못 사는 한국인 DNA가 내 안에 흘러넘쳤다. 선배들이 제발 좀 살살하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10대부터 자전거 수리공, 주유소 정비공, 치과 보조사로 일한 경험은 누구를 만나도 이야기가 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줬다.”
-로이터통신을 끝으로 은퇴했으나, 여전히 현장을 누빈다.
“한번 저널리스트는 영원한 저널리스트! 죽을 때까지 카메라와 함께 현장에 있을 것이다.”
-트럼프 피습 사진을 특종한 에번 부치는 AP통신 후배던데.
“나라면 피습 직후 벗겨진 신발을 찾아 ‘My shoe, my shoe’를 외치던 트럼프의 모습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웃음).”
-언론과 민주주의의 위기라고도 한다.
“언론을 짓눌러서 이긴 정치인은 한 명도 없다.”
-저널리스트가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돈을 벌고 싶다면 기자 해선 안 된다. 다 차려놓은 밥상을 찾아가는 것도 기자가 아니다. 기자는 최전선으로 사냥을 나서는 전사다. 나는 아직도 궁금한 게 너무나 많다.”
2024년 7월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귀에 붕대를 붙인 채 걸어가는 트럼프. /강형원 포토저널리스트
☞강형원
1963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975년 미국으로 이민 갔다. UCLA에서 정치학·국제외교학을 전공한 뒤 LA타임스, AP통신, 로이터통신 기자로 일했다. 1992년 LA 폭동과 1999년 빌 클린턴 대통령 스캔들 보도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2회 받았다. ‘사진으로 보는 우리 문화유산’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