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과 의로운 민족│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옥창준 옮김│너머북스
티베트·몽골·대만 등 中에 편입
한반도는 명·청 지배서 벗어나
조선 ‘의’를 중심으로 나라 정비
성리학 이념 고리로 중국과 밀착
특별한 이웃·안전 보장 장치로
지식의 우위도 독립유지에 한몫
신간 ‘제국과 의로운 민족’은 한·중 600년사를 통해 한반도가 중국의 직접적인 정치 지배를 받지 않은 요인을 ‘유교적 의로움’과 ‘지식의 우위’에서 찾는다. 이미지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을 묘사한 기록화. 자료사진
한·중 양국 600년史 되짚으며
반중정서속 미래관계 해법 고민
“한반도는 어떻게 중국과 수백 년 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단 한 번도 ‘중국 제국’의 일부가 되지 않았나.”
오드 아르네 베스타 미국 예일대 사학과 교수는 하버드대 강연을 묶은 ‘제국과 의로운 민족’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티베트·신강·몽골·대만을 비롯해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은 기간이 다를 뿐 모두 제국에 편입된 적이 있는데 이웃 나라인 한반도가 명(明)·청(淸)나라의 직접적인 정치 지배를 받지 않은 원인이 무엇이냐는 얘기다. 중국 전문가로 ‘잠 못 이루는 제국’ ‘냉전의 세계사’ 등을 쓴 저자는 14세기 ‘원-명 교체기’와 ‘고려-조선 교체기’를 집중적으로 살피며 ‘유교적 의로움’과 ‘지식의 우위’가 특별한 정치적 관계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이와 함께 현대사까지 포함하는 한·중 600년사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얼어붙은 국제정세 속에 중국이 취해야 할 올바른 입장에 대한 충고도 건넨다. 최근 베이징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한복을 입은 조선족 여성이 등장한 데 이어 쇼트트랙 편파 판정 논란으로 반중(反中) 정서가 극에 달한 가운데 양국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도모할 해법을 고민해볼 수 있는 책이다.
책의 출발점인 원-명 교체기와 고려-조선 교체기를 잇는 연결고리는 성리학이다. 농민 출신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던 명나라 초대 황제 홍무제(주원장)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송나라 때 무르익은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위계를 강조하는 성리학은 조선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고려 말 극심한 혼란 속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나라 전체를 ‘성리학적 기획’으로 이끌었다. 윤리적 충성심을 뜻하는 ‘의(義)’를 핵심 구호로 선포하며 성리학에 바탕을 둔 교육 제도를 전역에서 시행했다. 유교적 원리로 악습을 타파하는 ‘성리학 혁명’은 국왕부터 농민까지 모든 계층에 적용됐다. 이 같은 ‘유교화 프로젝트’는 동아시아의 여타 유교 국가와 비교해 한층 광범위했다. 저자는 “한반도인들은 유교적 의로움을 바탕으로 ‘응집된 정체성’을 형성했다”며 “동양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한반도에 일찍 민족의식이 싹튼 배경”이라고 말한다.
중국으로 건너간 조선 사절단을 그린 김홍도의 ‘연행도’.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조선의 지도자와 엘리트들은 성리학 이념을 고리로 중국에 ‘밀착’하고자 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외교 정책을 ‘큰 나라를 섬긴다’는 뜻의 ‘사대(事大)’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이 강력한 중국의 ‘독특한’ 이웃 국가임을 표현”하는 방식이자 “엄격한 의례를 지킴으로써 중국의 침략을 막는 안전보장 장치”였다. 조선과 명의 의례적 관계는 ‘조공 사절’을 통해 형성됐다. 1368년 이후 200년간 조선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사절단이 건너간 횟수는 최소 611번에 달했다.
이처럼 정치적 전략이 깔린 ‘의리’는 16세기 후반 임진왜란 때도 이어졌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 침략 전 “조선이 일본 천황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으면 정복에 나설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이에 선조는 편지를 띄워 “조선과 중국은 부자(父子)와 같은 친분이 있다. 어찌 군사를 움직여 아득한 중국을 치려고 망동하느냐”고 일축했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 이후 선조는 “의로움을 강조하며 명이 전쟁에 개입해 조선을 구하게 했다.” 또 조·명 연합군과는 별도로 성리학적 가치를 체화한 민중들이 ‘의병’을 조직해 일본에 맞섰다. 의병들은 격문에서 “도덕적 존재이자 조선인으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를 강조했다.
이후 17세기 중반 청나라가 명 중심 체제에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도 조선 지배층은 의리를 명분으로 명나라와 접촉하지 말라는 청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에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의 무릎을 꿇리는 ‘삼전도의 굴욕’을 안겼으나 명을 정복한 뒤 권력을 잡은 강희제는 조선을 제국에 편입하는 대신 조공품 경감, 무역 기회 확대 등을 제시하며 양국관계의 회복을 이끌었다.
책은 유교적 정체성과 함께 ‘지식의 우위’도 한반도가 실질적 독립권을 행사한 이유로 지목한다. 사신을 비롯한 조선 엘리트들은 ‘중국보다 중국을 더 잘 아는’ 전문가였다. 그들은 중국에 갈 때마다 유교 고전과 기술서 등을 들여오는 한편 민감한 첩보를 파악해 조정에 보고했다. 이는 중국이 조선을 ‘실력 있는’ 동맹국이자 협력자로 여기는 바탕이 됐다. 저자는 “지식의 우위를 통해 조선은 ‘제국의 일부가 돼 중국처럼 살라’는 지시를 받지 않고 ‘별개의 나라’가 될 권리를 얻었다”며 “조선 엘리트의 지식이 과소평가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명·청대를 거쳐 일제강점기, 6·25전쟁 이후까지 개괄한 책은 교착 상태에 빠진 동북아 정세를 풀어나갈 해법을 중국에 주문한다. 한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 대한 경제보복, 북핵 도발에 대한 침묵 등을 비판하며 중국이 북한 붕괴 시 북한을 포기하겠다는 용기를 지녀야 한반도 평화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슬리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중국의 과거 역사를 ‘포용적 제국’으로 평가하거나 19세기 말 조선 근대화를 가로막은 청나라 정책을 축소 기술하는 대목은 중국 측 시각에 기울어져 있다는 의심이 든다. 하지만 대중(對中)정책이 핵심 이슈로 부상한 대선 국면에서 과거를 통해 미래를 기획할 통찰을 전한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228쪽, 2만 원.
나윤석 기자(nagija@munhwa.com) 입력 2022.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