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은 머리가 아니라 여기에서 나온다...뇌과학자의 걷기 예찬[BOOK]

해암도 2022. 6. 4. 07:07

 

책표지

걷기의 세계
셰인 오마라 지음
구희성 옮김
미래의창

 

‘걷기는 몸에 좋고, 뇌에 좋으며, 나아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 256쪽 분량의 책 『걷기의 세계』를 압축한 문장이다. 저자 서문 중 일부다.

 

해가 갈수록 주변에 걷기를 좋아하는 지인이 늘어나고 있다. 산을 오르고, 둘레길을 돌고, 해변을 산책한다. 왜 걷냐고 물으면 “건강에 좋아”, “한 번 걸어봐”라는 알쏭달쏭한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다.

 

점점 걷지 못하는 사람도 많아진다. 조심해도 소용없다. 연로한 모친은 얼마 전 평지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다치고 수술을 받았다. 아파보면 안다. 걷기는 생존의 기초 조건이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걸음마는 ‘생명의 울림’이다.

 

걸으면서 우리는 뭔가에 몰입한다. 생각의 실타래가 술술 풀릴 때도 많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산책하면서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기를 즐겼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창의성이 머리가 아니라 두 다리에서 나온다고 믿은 사람이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메타세쿼이아 길.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우거진 이 숲길은 월드컵공원을 조성하며 만들어진 길이다. 김현동 기자

 

반대로 걷다 보면 무아지경에 이른 듯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정신적으로 투명한 상태를 경험할 때도 있다. 고민을 잊게 되고, 특별히 해결된 게 없어도 마음이 고요해지고 편해지기도 한다.

 

뇌과학자인 저자는 알면 알수록 경이로운 걷기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며 친절하게 궁금증을 풀어준다. 걷기의 기원을 설명할 때는 멍게의 움직임부터 고찰한다. 과학적 분석만 하는 건 아니다. 걷기에 좋은 도시를 살피고, 걸으면서 번득이는 영감을 얻는 이유를 파헤치며, 걷기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의미도 추적한다.

 

직립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결정적 분기점이다. 직립했기에 두 발로 걷고, 자유로워진 도구를 활용해 문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인간의 직립과 앞발로 땅을 스치듯 걷는 고릴라를 비교한다.


두 발로 걷는 인간은 네 발로 움직이는 짐승이나 고릴라보다 더 적은 에너지로 더 많이 걸을 수 있다. 치타보다 빠르진 않지만, 인간은 한 걸음 한 걸음씩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영역을 넓혔다. 서로 손을 잡으며 걸을 수 있었기에 이성과 독점적 관계를 맺게 됐다는 해석도 흥미롭다. 손을 잡고 이동하는 동물은 인간 이외에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눈이 있어야 걸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걷기에 더 결정적인 기관은 귀라는 부분도 재밌다. 머리의 위치와 움직임을 안정시키는 메커니즘이 귀 내부에 있는 ‘전정계’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걸을 수는 있지만 전정계가 고장 나면 균형을 잡을 수 없다.

 

걷기는 단순히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이 아니다. 두뇌와 밀접하게 연결된 매우 복잡한 행위다. 호흡, 신경, 심장, 근육, 관절이 모두 조응하며 움직여야 한다. 걸음마를 배우는 영아는 평균적으로 2368걸음으로 701m를 걷고 한 시간에 17번 넘어진다. 약 1년여 시간 동안 영유아는 수천 번 걷고, 넘어지고, 일어서며 걷는 리듬에 익숙해져 간다. 보행기에 익숙한 아기는 걸음마를 늦게 떼는 경향이 있다. 보행기와 걷기의 메커니즘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좋은 도시는 걷기 편하고(Easy), 접근성이 좋아야 하며(Accessible), 안전하고(Safe), 즐거워야 한다

 

(Enjoyable)고 정리했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신호등의 시간 등 도시 시스템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제안도 귀담아 들을만하다.

 

그는 걷기의 사회적 의미에도 주목했다. 함께 한마음으로 걸으면 더 좋은 사회가 된다며 독재자들이 허락하는 집단적 걷기는 개성이 배제된 군대의 행진뿐이라고 일갈했다. 실제로 올림픽 개막식 때 선수단이 입장하는 모습만 봐도 그 나라가 어떤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걸으면서 구술한 내용으로 기초로 책을 쓴다”는 저자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당장 나가서 걸어라. 얼굴에 스치는 바람을 느껴라. 걷기는 우리에게 무한한 도움을 줄 것이다”.

 

 

중앙일보    입력 2022.06.03      이해준 기자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