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기억` 쓴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가 단독 인터뷰

해암도 2020. 6. 12. 05:01

`前生의 나` 111명과 만남…베르베르 `기억`으로 돌아오다

내 삶과 세계의 기억을
언제 잃을지 모르는 인간

"삶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건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죠"


 

전생이나 심령은 어쩌면 이미 고리타분해진 주제일 수 있다. 미지의 세계를 다루는 상상력에 귀 기울일 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일상이 그리 한가롭지는 못해서다.

하지만 이 책의 몽상은 차원이 다르다. 현생을 살아가는 '나'가 수백 명의 전생을 한자리에서 조우한다는 상상력이 매혹적이어서다. 독자들도 그 힘에 반응했을까. 이 책은 출간 일주일 만에 종합 베스트셀러 2·3위(11일 정오 교보문고·예스24 기준)에 올랐다. 최근 두 권짜리 장편 '기억'(열린책들 펴냄)을 펴낸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59)를 서면으로 만났다.

"누구나 한 번쯤 전생과 내생(來生)을 생각해보곤 한다. 소설 '기억'의 아이디어도 내가 직접 경험한 최면에서 얻었다. 당시 경험이 소설의 뼈대가 됐다. 전생의 '나'를 만나면서 우리에게 전생이 있었고 내생이 온다고 생각하면 현재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무척 달라질 거라 생각했다."

새 소설 '기억'의 줄거리는 이렇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 '르네'는 유람선의 한 공연장에서 최면 대상자로 선택당한다. 우연한 기회에 르네가 무의식 속에서 '보고야 만' 전생의 순간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의 최후 사망 장면이었다. 강렬한 기억에 고통 받던 르네는 최면사 '오팔'의 도움을 받아 전생을 탐험한다. 르네는 자신에게 111회의 전생이 존재했음을 알게 된다.

흥미진진하면서도 즐겁게 읽히는 소설은 그 기저에서 인간 내면에 잠들어버린 '망각된 기억'을 묻고 있다. 왜 기억을 다룬 소설을 썼을까.

"기억이란 소재는 개인적으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 할머니 두 분이 알츠하이머를 앓다 떠나셨고, 어머니도 현재 같은 병을 앓고 계신다. 가족력 때문에 내 삶과 내 세계의 기억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실 있다. (기억의 주체를 개인에서 사회로 확장한다면) 또 인류의 역사는 집단의 기억이기도 하다. 인류가 겪는 많은 문제가 과거의 망각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르네의 '전생 1호'는 우리 인류가 아틀란티스라고 부르는 섬에 거주하는 고대 사람 '게브'다. 르네는 가라앉는 섬을 구하는 게브의 조력자를 자처한다. 소설 후반부에서 르네가 111명의 전생과 한자리에서 만나는 장면은 압권이다. '내 영혼의 환생들이 처음 모인 이 총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가부좌를 틀고 편안히 앉으세요'로 시작되는 르네의 연설을 읽으면 웃지 않을 수가 없다.

"환생한 전생자들의 총회 장면을 쓸 때 엄청난 흥분을 느꼈다. 과거의 내가 한자리에 모두 모여 소통할 수 있게 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 소설을 쓸 때마다 늘 인상적인 피날레 장면을 고심한다. 어느 순간 영감이 떠올라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질 때 느끼는 희열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감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강렬한 경험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생의 영혼'을 소설로 쓰며 베르베르 작가 본인도 자신의 전생을 결국 만났을까. 또 '전생들'과는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최면 상태에서 해변에서 물수제비를 뜨고 있는 전생의 나를 만났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편안함과 여유로움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후로도 새벽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 자가 퇴행 최면을 하는데 그때마다 '그'를 만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내게, 가장 놀라운 것이 책이라고 말한다. 한 인간이 책을 매개로 수백만 명의 동류 인간에게 생각을 전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고 말이다."

코로나19 사태는 베르베르 작가의 일상도 바꿔버렸다. 집필 장소가 근처 카페에서 집으로 바뀌었단다. "요즘은 르네가 전생이 아닌 내생을 탐험하는 후속작을 쓰고 있다. 몸은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지만 글을 쓰며 정신의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집 안의 일상은 한국 콘텐츠에 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하루 4시간30분간 글을 쓰고, 한 시간씩은 운동을 꾸준히 하며 시리즈물을 보고 있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킹덤'을 봤고 미국 드라마로 재제작된 '설국열차'를 즐겁게 시청하고 있다."

 

베르베르농담과 철학을 공존시키며 소설 같은 삶을 사는 소설가는, 그러나 삶이 한 편의 영화여야 하지 드라마 시리즈물이어선 안 된다고 넌지시 경고했다. 죽음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나가는 문(門)이라면 우리의 현재 인생은 무가치한 듯이 비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라고 그는 확신한다. 바로 그 점이 이번 소설의 숨겨진 비의이기도 하다.

"전생이 있었고 뒤에 내생이 온다면 현생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질 것이다. 현생을 하나의 완결된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 시리즈 중 한 편으로 여길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삶에서 실수하더라도 또 다른 삶의 기회가 온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것은 현재의 삶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재의 삶은 다시 살아지지 않으니 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가 이메일 인터뷰 전문>

1. 인간의 정체성은 기억에 따라 규정되며, 역사는 집단의 기억이라는 소설 '기억'의 설정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기억에 관한 주제를 다룬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국에 2019년 소개된 전작이 죽음을 다룬 소설이었다면 죽음에 따라 소멸하는 기억을 다루는 소설은 필연적이란 생각도 듭니다.

기억이라는 소재는 개인적으로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할머니 두 분이 알츠하이머를 앓다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지금 같은 병으로 고생하고 계시기 때문이죠. 이런 가족사 때문에 내 삶과 내 세계의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도 모르게 생겨났고, 그것에 대한 일종의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또한 우리 인류의 역사는 집단의 기억이라 할 수 있죠. 인류가 겪는 많은 문제가 과거의 망각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합니다.

2. 작가님 본인의 전생이 있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여러 개의 전생을 거쳤다고 믿는다면 어떤 전생과 마주치고 싶은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많은 전생 가운데 '작가/소설가'라는 삶도 있었을까요.

이 소설의 아이디어는 내가 직접 경험한 퇴행 최면에서 얻었습니다. 최면 상태에서 해변에서 물수제비를 뜨고 있는 전생의 나를 만났는데,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편안함과 여유로움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죠.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행복한 모습이었어요. 처음엔 그곳이 어디였는지, 어느 시대였는지 몰랐어요.

그러다 그의 직업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는 기(氣) 치료사라는 걸, 그곳이 섬이라는 걸, 그가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죠. 그의 나이가 무려 821세라는 것도 말이에요. 처음에는 이 나이가 믿기지 않았지만, 성경 속 아담과 므두셀라는 9백 살 넘게 살았다는 걸 알고 나니 먼 옛날에는 인간 수명이 그렇게 길었을지도 모른다고 수긍했어요. 나중에 그곳이 아틀란티스(물론 이 이름은 훗날 붙여졌지만)라는 추론을 하게 됐어요. 이 경험이 바로 소설 '기억'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베르베르3. 위의 2번 질문에서 잠시 이어지는 질문입니다. 만약 그 '작가/소설가'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둘은 어떤 대화를 나누시겠습니까. 또 그는 무슨 글을 쓰고 있었을지, 또 현생의 작가님에게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답변해주신다면.

새벽에 잠을 이루지 못해 자가 퇴행 최면을 할 때 그를 만납니다. 아니, 그를 만난다는 느낌을 갖는 걸까요. 어쨌든 그는 내게 우리 시대, 그러니까 내게는 현재이고 그에게는 미래인 지금 시대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 책의 존재라고 말하더군요.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한 인간이 수백만 명의 동류 인간들에게 생각을 전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고 했어요. 그의 시대에는 감히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고.

4. 책의 후반부에 영혼의 환생들이 모인 총회 장면이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대단한 상상력이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합쳐져 우리 각자 각자가 되는 거예요"라는 르네의 말도 흥미로웠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님의 이러한 거대한 상상력은 어떤 순간에 어떻게 찾아오나요.

말씀하신 환생들의 총회 장면을 쓸 때는 그야말로 엄청난 흥분을 느꼈습니다. 과거의 내가 한자리에 모두 모여 마침내 소통할 수 있게 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니까요.

소설을 쓸 때마다 늘 인상적인 피날레 장면을 고심합니다. 물론 금방 찾아지진 않아요. 이 총회 장면도 그랬죠. 하지만 어느 순간 영감이 떠올라 그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질 때 느끼는 희열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감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강렬한 경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5. 전생과 기억에 관한 이번 소설을 쓰시면서 심령철학의 창시자 알랑 카르데크에 관한 내용을 기술하셨습니다. 혹시 이조차도 소설적 상상력인가 싶어 찾아보니 실존인물인 듯합니다. 특히 '영혼의 서'에 관한 인용문이 흥미로웠습니다. 소설을 쓰기 전의 취재와 소설을 쓰는 중인 집필은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몇 대 몇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는지요.

소설을 쓸 때 먼저 플롯을 짜고 주요 장면을 써놓은 다음 자료 조사를 시작합니다. 얼개가 짜인 상태에서 자료 조사를 하면서 살을 붙여 나가는 식이죠. 작품 활동 초기에는 주로 전문가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받았는데, 지금은 인터넷을 많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대단히 실용적인 도구예요. 특정 시대의 모습과 분위기를 파악하고, 구체적인 장소나 의복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죠.

6.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들었던 음악'을 책의 말미에 기술하셨습니다. 글을 쓸 때 음악은 작가님 자신을 고양시키는지요. 아울러 소개된 5곡 가운데 가장 아끼는 곡은 어떤 곡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집필할 때 영화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영화 속에 있다는 느낌으로 쓰기 위해서요. 주로 가사가 없고 반복되는 악절로 이루어진 음악을 듣습니다. 그래야 음악 자체에 끌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일 없이 글을 쓸 수가 있으니까요. 요즘은 바흐의 음악을 즐겨 듣고 있습니다. 그는 동일한 멜로디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방법을 탐구한 음악가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베르베르7. 요즘 하루 일과를 설명해주신다면. 지금 보고 있는 풍경, 방금까지 읽고 있던 책, 최근 일어난 소설적인 일상 등. 코로나 시대의 근황을 묻습니다.

사실 소설가로서의 내 일상은 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도 아침 8시에 시작해 매일 4시간 30분씩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달라진 게 있다면 집필 장소가 근처 카페에서 집으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죠. 외출이 불가능하니까요.

글쓰기 외에 늘 하던 운동도 하루 한 시간씩,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꾸준히 하고 있어요. 심장 기능 개선을 위한 운동을 하면서 시리즈물을 보는데, 최근에는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 '킹덤'과 미국에서 드라마로 다시 만들어진 '설국열차'를 재밌게 시청 중입니다.

8. 끝으로, 다음 한국에 소개될 소설 혹은 요즘 집필중인 소설의 소재나 주제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한국의 작가들에게 꼭 하고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요즘은 '기억'의 후속작을 쓰고 있습니다. 르네 톨레다노가 전생이 아닌 내생을 탐험하는 이야기예요. 몸은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지만 글을 쓰다 보면 정신의 자유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억'은 세계를 더욱 넓고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의 확장을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우리에게 전생이 있었고 뒤에 내생이 온다고 생각하면 현재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무척 달라질 거예요. 현생을 하나의 완결된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 시리즈 중 한 편으로 여기게 될 테니까요. 이런 시각을 갖게 되면 지금의 삶에서 실수를 하더라도 또 다른 삶의 기회가 다시 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것은 다시 살지 않기 위해 현재의 삶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아마 내년 이맘때쯤 '고양이 폐하'(가제)가 출간될 겁니다. 이 소설은 저의 소설 '고양이'에 이어 우리 문명 전반을 되돌아보고 그 영속성에 대해 고민한 책이에요. '고양이' 연작이 인류 공동체 전체에 대한 고민과 전망을 담고 있다면 '기억'은 보다 개인적 차원의 정신적 고양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유태 기자]  매일경제 & mk.co.kr 입력 2020.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