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의 술입니다.” 2016년 함양을 방문해 솔송주를 맛본 문재인 대선후보는 이렇게 적었다. 3년 후 솔송주는 청와대 설 선물로 선정돼 국가유공자 등 1만여명에게 전달됐다. 지난해엔 이낙연 총리가 여름휴가 때 솔송주를 마시러 함양을 찾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솔송주를 2007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답례 만찬상에 올렸다. 그 역시 퇴임 후 함양에 들러 솔송주를 들었다. 대체 솔송주가 어떤 술이길래 대통령과 총리의 입맛을 줄줄이 사로잡은 것일까.
솔송주는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 하동 정씨 집안에서 전해온 500년 전통의 가양주(家釀酒)다. 개평마을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 정여창의 고향이다. 안동과 함께 영남을 대표한 양반마을이기도 하다.
이름 높은 사대부의 집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하동 정씨 문중에서 대대로 빚어온 술이 바로 솔송주다. 술 빚는 데 한 해 300석의 쌀을 쓰고 임금에게도 진상했다고 한다. 지금은 정여창의 16대 손부(손자며느리)인 박흥선 명인(66)이 시어머니에게 전수받은 비법으로 술을 만든다. 남편 정천상씨(73)는 술 이름과 같은 양조장 ‘솔송주’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솔송주는 알코올 도수 13도의 맑은 약주다. 은은한 솔향이 먼저 반기고 마신 뒤엔 코끝에 올라오는 여운이 기품 있다. 담박하고 고졸한 매력이 개평마을의 수더분한 한옥을 닮았다. 솔송주를 증류한 40도짜리 ‘담솔’은 입안에서 막 굴려도 찌르는 느낌 하나 없이 부드럽고 순하다. 독한 줄 모르고 계속 들이켜게 만드는 전형적인 ‘앉은뱅이술’이다.
솔송주는 송순과 솔잎이 주재료다. 술의 향과 맛을 끌어올리는 건 물론 산패를 막는 천연방부제 역할도 한다. 매년 4월 말부터 5월 초 사이 마을 뒷산 소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면 여럿이 가서 일년 동안 쓸 송순과 솔잎을 따온다.
만드는 법은 보통의 약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멥쌀로 고두밥을 쪄서 누룩과 섞어 밑술을 만들고, 사흘 뒤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은 솔잎과 송순을 살짝 쪄서 고두밥과 함께 밑술에 섞는 덧술 작업을 한다.
솔잎과 순을 찌는 건 떫은맛을 덜어내기 위해서다. 본래 전통 방식은 밑술을 찹쌀죽으로 만드는데, 대량 생산을 시작하며 깔끔한 맛과 안정적인 재료 수급을 위해 멥쌀 고두밥으로 바꿨다. 쌀은 함양에서 난 햅쌀만 쓴다. 덧술한 뒤엔 상온에서 사흘, 저온에서 3주가량 발효를 거친다. 창호지에 거른 맑은 술을 서늘한 곳에서 2주 정도 숙성시키면 완성된다.
담솔은 솔송주를 증류한 뒤 꿀을 약간 넣어 감칠맛을 살리고 2년 이상 숙성해 만든다. 18년 숙성한 담솔은 1ℓ들이 한 병에 무려 120만원인데 선물용 등으로 1년에 5~6병이 꾸준히 판매된다고 한다.
서울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박 명인은 스물다섯 살에 개평마을로 시집 오면서 술 빚는 법을 배웠다. 시어머니 이효의씨는 술 잘 빚기로 고장에서 유명했다. 맛있는 술을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게 해달라는 주변 부탁에 1996년 제조장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술을 잘못 만들면 집안 망신이라는 생각에 일년 내내 쉬지도 못하고 일했다. 처음엔 10년 넘게 적자를 봤다. 복분자주를 만들어 판 돈으로 솔송주에서 난 손해를 메꾸며 버텼다.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시는 박 명인은 지금도 혀끝으로 술맛을 보고 코로 냄새 맡으며 하루 종일 제조장을 지킨다.
솔송주는 살짝 차게 마셔야 고유의 향과 질감을 잘 느낄 수 있다. 정씨 집안에선 예로부터 석이버섯무침, 육포, 도라지정과, 배추전, 무전 등을 솔송주 주안상에 올렸다는데 모나지 않은 술이라 어느 안주와도 부담없이 잘 어울린다.
솔송주 가격은 750㎖ 병 기준으로 1만8000원, 담솔은 4만9000원이다. 박 명인 부부가 거주하는 개평마을 눌재고택 바로 옆 솔송주문화관에서는 시음은 물론 증류주 내리기, 증류주 칵테일 만들기 등 체험을 할 수 있다. 30분가량 소요되고 사전에 전화(055-963-8992)나 홈페이지(http://mgwkorea.com)를 통해 예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