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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50년 기록한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해암도 2015. 8. 13. 06:43

조인원 기자의 <창작의 순간> 6.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현대사를 50년 넘게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는 일본인이 있다. 1964년 처음 찾은 후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는 지난 51년간 해마다 방한하며 사진을 찍어왔다. 그는 한일회담 반대시위, 베트남 파병, 역대 대통령 선거들, 민주화 시위 등의 역사적인 현장 뿐 만 아니라 미군 기지촌이나 청계천 판자촌 혹은 이름 모를 시골 촌부의 모습들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일본 기자 자격으로 북한도 일곱 번이나 다녀왔다. 그동안 국내에서 여러권의 책과 전시로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그는 최근엔 50년 동안 작업해온 12만 여장의 사진들 중에서 수백장을 추려 ‘격동한국 50년’(눈빛 출판사) 책을 냈다. 또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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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있었지만 외국인 시선으로 구와바라 시세이가 기록한 사진들은 남다르다. 가장 널리 알려진 ‘한일회담 반대시위(1965)’ 당시 조약을 맺은 당일 서울지역 대학생들은 우산을 접은 채 비를 맞으며 침묵으로 저항하는 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기록했고 이 사진은 이후 수많은 국내 회화나 삽화에서 저항하는 젊은 군중의 이미지로 다시 쓰이기도 했다. 또 전장(戰場)을 향하는 아들 앞에서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의 모습이나 청계천변 판잣집 사람들, 미군 기지촌, 판문점,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모습 등을 통해서 누구보다 가까이 카메라를 들고 다가가 분단 현실에서 고통 받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던 한국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는 한국인이 아니기에 과감하게 한발짝 더 들어갔거나 반대로 한발짝 물러서서 낯선 풍경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담아내며 기록해갔다. 하지만 악의적이거나 정치적인 시선 보다 사진 안에서 보통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으려 했다.

지난 10일 부인 최화자 씨와 함께 전시장을 찾은 그를 만났다. 그는 취재로 찾은 국내 자동차회사에서 당시 통역을 담당했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1970년에 결혼했다. 전시장 바로 옆에서 만난 40여분 동안에도 그는 카메라가 든 등산 가방을 옆에 들고 있었다.


Q. 어떻게 처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 대학시절 한국에서 온 친구가 있었다. 나보다 네 살 위였는데 그 친구한테 한국의 역사와 동서 냉전 상황 등을 듣고 알게 되었다. 또 그 친구가 ‘아리랑’이나 ‘도라지’ 같은 노래를 알려줘서 지금도 그 노래를 할 줄 안다. 나도 처음엔 한국에 관한 일은 60년대에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꾸준히 계속 일이 생기기도 했고, 이 사람 (부인을 가리키며)과 1970년에 결혼하면서 계속 이어간 것도 있다.(웃음)

Q. 어떻게 처음 한국을 취재했고, 얼마나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나?

- 당시 일본 평범사(平凡社)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태양’에서 한국특파원으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문공부에서 발행하는 프레스카드를 받았기에 어디든 갈수 있었다.

Q. 일본에 살면서 한국의 상황이나 사건을 어떻게 알고 준비했나?

- 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또 미국 AP뉴스와 일본 아사히신문을 매일 봤고 지금은 없어진 신아일보의 한 기자와 계속 연락하면서 정보를 얻었다. 또 당시 AP통신 한국 사진기자인 김천길 씨와 꾸준히 연락하며 정보를 얻었다.

Q. 어떻게 꾸준히 한국을 주제로 사진 작업을 이어 갔나?

- 태양 잡지 외에도 주간 아사히, 월간지 ‘세계’ 등에 소속되어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그때그때 계약해서 일했다. 일종의 ‘아르바이트’라고 할 수 있다(웃음)

한일 회담 반대 시위,1965 / 구와바라 시세이

Q. 가장 유명한 ‘한일 국교 회담’ 사진에 대해 말해 달라.

- 1965년 6월 22일 한일 국교회담 비준식이 있었다.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굴욕적인 외교에 대한 패배의 날이라는 의미였다. 평소처럼 돌을 던지지도 않았고 조용히 비를 맞고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많았고 고려대생들도 일부 있었다.

Q. 왜 흑백 사진이 많나?

- 베트남 환송 사진도 컬러필름으로도 찍었다. 하지만 컬러 필름은 50년이 지나면 색이 다 변하므로 이런 테마들은 주로 흑백으로 찍는다. 디지털 카메라로 넘어온 이후에는 두 대의 카메라를 메고 다니고 여전히 한쪽엔 흑백필름을 찍고 있다. 100년의 기록을 위해선 흑백필름으로 찍는 것이 더 낫다.

Q. 중요한 순간엔 컬러와 흑백을 택한다면?

- 하지만 단 한번 찬스라면 내가 계약한 잡지가 원하는 것으로 찍는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는 쿠데타가 있을 때 모스크바에 있었다. 공산당 청사에서 붉은 깃발이 내려지는데 3초 밖에 없었다. 모터드라이브로 찍어도 두 장 이상을 찍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흑백을 찍을 여유가 없었다. 어떤 것으로 찍을 지는 골프에서 클럽을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

Q. 당신은 주로 역동적인 순간 보다 사진을 한발 물러서서 찍은 모습들이다. 의도한 것인가?

- 나의 사진들은 뉴스가 아닌 스토리를 위해 찍은 것들이 많다. 그래서 여러 장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찍다 보니 그런 사진들이 나왔던 것 같다.

청계천 판잣집,1965 / 구와바라 시세이


Q.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아쉬웠던 기억은?

- 1980년 5월에 광주에 가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웠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고 나중에 들어가려 했는데 후엔 들어갔을 수 없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 그동안 간헐적이나마 한국을 왔었는데 앞으로도 한국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면서 작업할 예정이다.

Q. 집에 얼마나 많은 사진이 있나?

- 집에 3명 정도 누울만한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에 천정까지 필름과 프린트된 사진이 꽉 차있다. 이번에 전시를 위해 그걸 약간 응접실에 꺼내서 두 달 넘게 아내의 도움을 받아서 전시 준비를 했는데, 아직도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