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詩의 숨결 찾아 10년간 1만2500㎞… 김준연 교수의 '唐詩 기행'
"1000년을 관통하는 唐詩의 울림… 이백 詩는 마흔 넘어 읽어야"
이백의 '將進酒' 두보의 '春望',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도 큰 감동
詩를 읽는 것은 나 자신을 읽는 것, 여름 휴가철 唐詩 음미하면서
세상사에 지친 마음 위로를…
몇 년 전 중국 안휘성 당도에 있는 이백(李白)의 묘원을 찾은 김준연(46) 고려대 중문과 교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백의 무덤을 보는 순간 잠시 숨이 막혔다. 그동안 책에서 시(詩)를 통해 접했던 이백은 낭만적인 기상이 넘치는 호방한 시인이었다. 당시(唐詩) 속에서 늘 신선(神仙) 같은 풍모를 보여주던 그가 자그마한 후원 풀무덤에 몸을 누이고 있다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 사람아, 왜 하늘나라로 가지 않고 이 구석진 데 외로이 누워 있나"라고 중얼거렸다.
김 교수는 이백의 '산속에서의 문답(山中問答·산중문답)'을 떠올리며 석양이 질 때까지 오랫동안 이백의 무덤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무슨 생각에서 푸른 산에 사냐고 묻는데/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음 절로 한가롭다/ 복사꽃이 흐르는 물에 아득히 떠가니/ 달리 천지가 있어 인간세상이 아니로다'
10여년 동안 1만2500㎞ 唐詩 현장 답사
시(詩)를 읽지 않는 시대다. 출판계에서는 10여년 전만 해도 시집을 출판하면 초판 2000부를 찍었는데, 지금은 1000부도 나가지 않는다고 하소연이다. 요즘같이 빠르고 바쁘고 빡빡한 시대엔 시를 음미할 마음의 여유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시를 쓰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준연 교수는 현대시가 아닌 한시(漢詩), 그것도 1000년 전 당시를 가르치고 연구한다. 좋아서 시작한 공부가 업(業)이 되었다. 시와 멀어진 시대, 대부분의 사람이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접한 이후 기억의 뒤편에 묵혀두고 잊어버린 한시와 씨름하며 사는 건 어떨까.
21일 고려대 연구실에서 김준연 교수를 만났다. 그는 2001년부터 10여년 동안 방학이 되면 배낭을 메고 당시에 등장하는 작품 현장을 찾아 중국 전역 1만2500㎞를 누볐다. 시인의 체취를 더 가깝게 느끼기 위해서였다. 당나라 시인들이 족적을 남긴 곳을 찾다 보니 여행 짐을 꾸릴 땐 현대 중국 지도 대신 당나라 시대 지도부터 챙겼다. 이 모든 여행의 안내자는 당시였다.
―당시(唐詩)의 어떤 점에 그렇게 매료됐나.
"당시는 20여년 동안 깊이 사귄 친구다. 하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시인이 한 말을 가만히 곱씹어보기도 하고 시의 행적을 따라 여행을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수수께끼투성이다. 중국 사람들은 '중국은 시의 나라'라는 말을 많이 한다. 중국에서 시라고 하면 당시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당나라는 이전 시기의 혼란을 극복해 통일을 이루고, 사상적으로 개방적인 풍토가 마련되어 시인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과거시험 과목에 시가 들어 있고, 계층을 가리지 않고 시를 애호해 시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이후 송·원, 명·청시대로 이어지지만 엄격한 사회 분위기와 통제 등으로 당나라만큼 좋은 시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당시에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수성과 인생과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과 관조가 담겨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을 준다."
―한시라고 하면 옛날 취향에 구식인 것 같다.
"중국을 여행하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면 언제 어디서든 당시와 관련된 문화 유적이나 기념물을 만날 수 있다. 당시는 지금도 중국의 초등학교 학생부터 최고 지도자까지 읽고 감상하고 암기하고 활용한다. 중국의 고시(古詩)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75수, 중학교 교과서에 40수가 실려 있는데, 이 중 당시가 각각 45수와 20수다. 2000년이 넘는 중국 역사 중 당시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이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 있다'에서 유물들이 밤만 되면 살아나듯이 당시도 꿈틀꿈틀 움직이며 중국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생선으로 치면 말린 대구포가 아니라 산 오징어다."
김 교수는 "중국 지도자들이 중요한 자리에서 당시를 읊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지도자의 품격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했다.
시진핑 주석은 2013년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왕지환의 시 '관작루에 올라(登�雀樓·등관작루)'를 쓴 서예 작품을 선물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기대어 있고/ 황하는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네/ 천리 밖을 한눈에 담으려면/ 다시 한 층을 올라야 하리' 당시 청와대는 "양국 관계를 한 차원 더 높게 발전시키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했다.
시 주석은 지난해 서울대 특강에서는 이백의 시 '인생길 어려워라(行路難·행로난)'의 한 구절을 읽었다. '거센 바람이 물결 가르는 그때가 오면/ 구름 돛 달고 푸른 바다 헤치리라' 역시 한중 관계의 발전을 염원한다는 의미다.
―당나라 사람들의 감성을 우리가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지금도 당시를 읽으면 정제된 리듬으로 삶의 다양한 모습과 의미를 보여준다. 당나라 시인들은 감성도 풍부하다. 두보(杜甫)는 '봄에 바라보다(春望·춘망)'에서 '시절을 느끼니 꽃도 눈물을 뿌리고/ 이별을 한탄하니 새도 마음이 놀란다'고 노래했다. 이런 감수성과 울림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전해진다. 감정의 어깨동무가 생긴다. "
―시가 만들어진 장소를 찾아가면 마음이 설레겠다.
"책을 뚫어지게 바라봐도 채워질 수 없는 욕구가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체취가 묻은 장소나 건물을 보면 가슴이 뛴다. 역사의 한 장면을 접하는 기분이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길을 떠났으니 날이 덥거나 추웠다. 대개 혼자였다. 답사는 답사를 부른다. 우리는 가끔 히말라야 14좌 완등 소식을 접한다. 히말라야의 8000m 이상 봉우리 14개를 모두 올라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하나를 오르면 다른 봉우리에 눈을 돌리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당시 기행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한 수의 고향을 다녀오면 또 다른 한 수의 고향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서역(西域)으로 넘어가는 돈황까지 갔다 왔다는데.
“돈황의 양관은 옥문관과 함께 서역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왕유의 ‘위성의 노래(渭城曲·위성곡)’에는 이런 시구가 나온다. ‘그대에게 술을 한 잔 권하노니/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친구도 없다네’ 나그네를 떠나 보내는 시인은 양관을 나서면 술을 나눌 친구도 없을 것이라며 한 잔을 더 권한다. 이 시를 읽으며 양관은 어떤 곳이길래 그곳을 나서면 친구가 없다고 했을까, 늘 궁금했다.”
김 교수는 난주에서 돈황까지 1133㎞를 14시간 20분 동안 달리는 야간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달렸다. 말로만 듣던 하서회랑(河西回廊·감숙성의 높은 산맥 사이로 회랑처럼 난 길)도 통과했다.
“양관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비석이 드넓게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서 있고, 듬성듬성 잡초 몇 포기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날아가는 것도, 기어가는 것도 없다’던 말 그대로다. 이런 마당에 술 한잔 할 친구가 있을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책상머리에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던 구절이 가슴으로 다가왔다.”
그의 답사 기록은 ‘중국, 당시의 나라’(궁리)에 담겨 있다. ‘당시’라는 보물을 찾아 서쪽 돈황부터 동쪽 태산까지, 남쪽 계림부터 북쪽 승덕까지 당시 200여수의 내력을 훑었다.
이백 ‘묵은 시름’술로 씻어
김 교수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자를 배웠다. “아버지는 중학교 진학을 못해 배움에 대한 한(恨)이 맺혔다. 아버지는 신문을 교재 삼아 공부를 했다. 옥편을 한 손에 들고 신문의 모르는 한자를 찾아보고 익혔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 한자 공부를 했다. 초등학교 5~6학년이 되니 신문을 줄줄 읽을 수 있게 됐다.”
그가 중국고전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소설 ‘삼국지연의’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 ‘삼국지연의’를 읽고 그 결말이 너무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유비, 관우, 장비에 이어 제갈량까지 주인공을 다 죽이고 무슨 이야기를 이어가겠다는 건가. 소설가를 꿈꾸던 나는 언젠가 ‘삼국지연의’를 ‘사리에 맞게’(?) 다시 쓰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 때 국어교과서에서 ‘두시언해’를 배우고 한시의 매력에 빠지면서 ‘삼국지연의’를 다시 쓰겠다는 꿈은 무기 연기됐다.”
―한시를 읽고 싶어도 어려워 보여 손에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개 당시(唐詩)의 쌍두마차인 이백과 두보 작품을 먼저 접한다. 나이가 마흔이 안 된 사람은 두보의 시를 먼저 읽고, 마흔이 넘은 사람은 이백의 시를 먼저 읽어도 좋다.”
―시를 감상하는 데 나이가 영향을 주나.
“두보의 시는 절제된 감정과 사색의 깊이로 연령에 관계없이 폭넓은 사랑을 받는다. 반면 젊은 시절 이백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 그의 시는 과장이 심하고 부풀리고 가식적인 것으로 비쳤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백 시의 참맛이 느껴진다. 그는 인생은 고해라는 의미의 ‘만 년 묵은 시름(萬古愁·만고수)’이란 말을 많이 썼는데, 그 말에 공감됐나 보다. ‘만고수’는 삶의 의미를 찾거나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등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맞부닥치는 시름을 말한다. 술은 그 시름을 씻어버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술과 달을 끌어들여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었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좋은 집에서 밝은 거울에 백발을 슬퍼하니/ 아침에 푸른 실 같다가 저녁에 눈이 돼버렸지/ 인생이란 좋을 때 즐거움을 만끽해야 하는 법/ 금 술통이 부질없이 달을 마주하게 해서는 안될 일//…//예로부터 성현들 모두 사라졌지만/ 오직 술 마시는 사람들은 그 이름 남겼다오//…// 다섯 가지 무늬의 말/ 천금의 가죽 옷/ 아이 불러 맛난 술과 바꿔 오라 하시오/ 그대들과 더불어 만 년 묵은 시름 씻어버리도록’
그는 “시인은 ‘마땅히 한 번 마시면 삼백잔’이라며 호기를 부리지만, 가슴속 깊이 숨어 있는 ‘만 년 묵은 시름’과 씨름을 하고 있다”며 “호쾌한 기상과 우울함이 번갈아 느껴지는 수수께끼 같은 시”라고 했다.
이백의 시 ‘달 아래서 홀로 마시다(月下獨酌·월하독작)’에는 늘 고독에 잠겨 있던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꽃 사이에서 한 병의 술을/ 홀로 마시며 벗하는 이 없다/ 술잔 들어 밝은 달을 초대하고/ 그림자 마주하여 세 사람이 되었다’
고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을 마셨으나 그마저 술친구도 없이 혼자였다. 겨우 불러 모았다는 것이 달과 자신의 그림자. 김 교수는 “대학 시절 한시(漢詩)를 공부하던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유유음자류기명(惟有飮者留其名·오직 술 마시는 사람들은 그 이름 남겼다)’이라는 구절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이백 흉내를 내기도 했다”고 했다.
이백이 세속에서 벗어나 이상 세계를 꿈꾸었던 낭만주의자였다면, 두보는 안사의 난으로 고초에 빠진 백성과 나라를 위한 마음을 시에 담은 현실주의자였다.
두보는 759년 겨울 먹고살 길이 막막해 감숙성을 떠나 성도로 이주해 띠집을 한 채 마련했다. 이를 ‘두보초당’이라고 한다. 당시 성도는 오랜 가뭄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는데, 어느 봄날 비가 흠뻑 내리자 두보는 ‘봄밤에 비가 내리는 것을 기뻐하다(春夜喜雨·춘야희우)’를 지어 해갈의 기쁨을 노래했다.
‘좋은 비가 시절을 알아/ 봄이 되니 만물을 싹틔우는구나/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만물을 적시는데 가늘어 소리조차 없구나’
‘태산에 올라 작은 것을 내려다보리라’
중국 전역은 당시의 ‘숨은 보물 찾기’ 무대다. 산맥과 초원이 있는가 하면 강과 호수가 있고, 기암절벽과 폭포가 있다. 영웅호걸 이야기가 전해지는 성(城)과 정자도 있다. 당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 중 하나가 태산이다.
김 교수는 “태산을 오르다 보면 바위에 ‘청미료(靑未了)’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고 했다. 두보의 ‘태산을 바라보며(望嶽·망악)’에 나오는 문구다. 태산이 하도 크고 높아서 사방팔방에 ‘푸름이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태산은 대저 어떠한가/ 제나라와 노나라를 걸쳐 푸른 모습 끝이 없다/…/ 언젠가 반드시 산꼭대기에 올라/ 뭇 산들이 작은 것을 한 번 내려다보리라’
김 교수는 “과거에 떨어지고 산동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던 두보가 태산을 둘러보고 지은 시”라며, “비록 낙방생 처지지만 꼭 과거에 장원급제하겠다는 패기가 넘친다”고 했다.
여산의 황암폭포는 이백이 ‘폭포가 3000척(약 900m)’이라고 노래해서 유명해졌다. 김 교수는 “제아무리 뛰어난 절경이라도 그것을 노래해 줄 아는 시인을 만나야 이름이 나게 된다”며 “‘백락과 천리마의 법칙’이라고나 할까. 백락이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아무리 천리마라도 다른 말들과 섞여 빛을 보지 못했을 것처럼, 황암폭포에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이백의 ‘여산의 폭포를 바라보다(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라는 시였다”고 했다.
‘해가 향로향을 비추어 자줏빛 연기 피어나고/ 멀리서 보니 폭포가 앞쪽의 내마냥 걸렸다/ 나는 듯 흘러 곧장 아래로 삼천 척/ 은하수가 높은 하늘에서 떨어졌나 하였다’
폭포가 들판을 흐르는 냇물을 싹둑 잘라 걸어놓은 모양인데, 아래로 흘러떨어지는(飛流直下·비류직하) 높이가 3000척이라는 비유가 장쾌하다.
버들가지는 이별의 상징
―당시에는 이별시가 유독 많이 보인다.
“당나라 때 수도로 장안이라 불렀던 서안의 동쪽에 있는 파교는 이별 장소로 유명하다. 당시 이별할 때 버들가지를 꺾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파교절류(??橋折柳)’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버들 류(柳)’자가 ‘머물 류(留)’자와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해 인사를 대신하는 것이다. ‘떠나지 말고 머물면 안 되느냐’는 뜻이다.”
―당시가 슬픔의 정서에 치우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기쁨이나 성취는 굳이 시로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루지 못했거나 아쉬운 것은 그것을 성취할 때까지 우리 삶의 목표가 되고 의미가 된다. 그 슬픔을 곱씹어보며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별은 슬프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굳게 먹으려는 의지를 담은 시가 많다. 슬프면서도 마음이 상하지는 않는 ‘애이불상(哀而不傷)’의 경지가 느껴진다.”
―전해져 오는 당시만 2200여명 시인의 5만수에 이른다. 처음에 당시를 어떻게 읽으면 되나.
“시에 대한 주석과 설명이 상세히 달린 책을 골라 4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부터 읽는 게 좋다. 이런 시를 절구(絶句)라고 한다. 이후 8행시인 율시(律詩) 등으로 범위를 넓혀나가면 된다. 시를 읽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읽는 것이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나의 중심을 잡고 내면세계를 확장하는 작업이다.”
―휴가철이다.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는 데 좋은 작품은.
“기행시, 사랑시, 산수시(山水詩), 선시(禪詩)가 좋다. 이백, 두보, 이상은, 왕유, 맹호연, 백거이 등이 이런 시를 많이 지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주인공인 키팅 선생은 ‘시, 아름다움, 로맨스, 사랑,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했다. 이번 여름휴가 때 당시와 함께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찾아보는 기회를 만들면 어떨까. 음미하듯 읽다 보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