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깨친 기형도 시인의 어머니, 팔순 돼 아들 작품 앞에 앉다

해암도 2015. 2. 25. 08:45


23일 오후 서울 금천구 시흥5동 주민센터에서 진행된 ‘문자해득 교실’에서 기형도 시인의 어머니 장옥순(왼쪽)씨가 교실 선생님인 윤영희씨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다. 금천구청 제공

장옥순씨 ‘문자 해득’ 과정 이수
“아들 생각날까 보기가 싫었지
교과서에도 나오는 우리 아들 시
뜻은 잘 모르지만…” 시집 만지작

시인의 어머니는 “아들이 쓴 시는 뜻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수녀님의 시는, 성경 말씀으로 써서 그런지 알겠는데, 아들 시는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말한 수녀님은 ‘시인’ 이해인 수녀다. 그럴 만도 하다. 아들의 시는 그 시대 가장 예민한 청춘들의 바이블이었다.

사람들은 아들의 25주기였던 지난해 ‘아들의 어느 시가 가장 좋으냐’고 물었지만, 어머니는 “없다”고 답했다. “아들 생각이 나서 보기가 싫었다”고 했지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이 쓴 ‘엄마 걱정’은 기억한다.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소리꾼 장사익이 음을 붙여 노래로 부른 덕에 어머니도 아들의 시를 알게 됐다. “열무 삼십단, 그건 내가 한 거니까. 아들이 그걸 시로 썼구나, 그랬지. 그래도 머리에 들어오는 건 하나도 없어요.” 시를 잘 모르는 시인의 어머니이지만, 아들이 자랑스럽고 그립다. “우리 아들 시가 교과서에도, 텔레비전에도 나와요. 어디든 꼭 나오더라고요.” ‘엄마 걱정’은 중학교 1학년 교과서 10여종에 실려 있다.

기형도 ‘엄마 걱정’
장옥순(82)씨의 아들은 요절 시인 기형도(1960~89)다. 장씨는 24일 서울 방배동 서울시교육연수원에서 열린 ‘성인 문자해득(문해)’ 교육 프로그램 졸업식에 참석했다. 금천구가 운영하는 18개월 과정을 마치고 초등학력을 인정받은 장씨는 교육 이수자들 가운데 최고령이다.

장씨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일제 식민지 시절 ‘양학당’에서 잠깐 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다. ‘유명 시인의 어머니가 글도 못 깨쳤다’는 얘기를 들을까봐 문해교실을 다닌 1년 반 동안 주변에 아들 얘기를 하지 않았다. 수강생 전원이 참여한 시화전 때도 자작시를 쓰지 않고 이해인 수녀의 시를 적어 냈다. ‘시인 엄마’라는 말이 나올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졸업을 앞둔 16일 선생님에게 <기형도 전집>을 선물하기 전까지 장씨는 자신을, 아들을 숨겼다.

“그래도 선생님에겐 감사하단 말씀을 드려야 할 거 같아서 아들의 시를 선물로 드렸죠. 근데 그거 때문에 이렇게 들통이 날 줄 몰랐네요.” 졸업식 전날 금천구 시흥5동 주민센터에서 만난 장씨가 웃으며 말했다. 문해교실 교사 윤영희(54)씨는 “평소에도 과묵하셔서 왔다가셨는지도 모를 정도였다”고 했다.

기형도 시인의 유일한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은 지금까지 28만부(53쇄), 10주기에 나온 <기형도 전집>은 7만부(26쇄)가 팔렸다. 아들과 함께 25년을 함께 산, 어린 아들이 시장 간 엄마를 기다리던 경기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 옛집은 장씨가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 안양천 너머로 내려다보인다.

“가만 생각해 보면 아들 시가, 무슨 시가 좋다는 게 머리에 들어오는 게 없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음달 7일 아들의 26주기가 되기 전에 시집을 펼쳐볼 요량이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등록 : 2015.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