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 부끄러움

해암도 2015. 12. 8. 07:17

부끄러움을 모르면서 시를 쓸 수 없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이렇게 시작하는 윤동주의 서시를 사랑한다. 미풍에도 이지러지는 양심을 괴로워하는 사내가 보인다. 시는 자기 고백이며, 언어 이전의 것을 언어로 옮기면서 들통 나는 내면의 발로다. 이 자백의 행위가 숭고한 이유는 자신의 못남을 인정하는 데 있다. 부끄러운 짓을 하면, 그것이 구역질을 일으킨다. 시는 그 토사물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노영민 의원은 시인으로도 자주 소개된다. 그런 그가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에 카드 결제 단말기를 들여놓고 시집을 팔아 세상이 시끄럽다. 그는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위원장이었고, 출간된 시집 수백 권을 여러 산하기관이 사갔다. 언론 취재가 시작되자 판매 물량을 전부 취소하긴 했지만, 비판이 쇄도했다. 그런데 노 의원은 "하늘 아래 부끄러운 게 한 점도 없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윤동주 시인이 떠올랐고, 죄스러웠다. 사업장 아닌 곳에 카드 결제 단말기를 설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는 법규정 때문만은 아니다.

부끄러움은 시인을 시인이게 하는 심상이다. '참회록' '쉽게 씌여진 시' 등을 통해 자아를 꾸짖었던 윤동주뿐 아니라, 구상·최승자·조병화 등 숱한 시인들이 '부끄러움'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다. 이성복은 시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를 때'에서 "아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이 삶이란 것!"이라며 가슴을 쥐어뜯었고, 고은은 2007년 낸 시집 제목을 아예 '부끄러움 가득'이라고 지었다. 당시 고 시인은 "부끄러움이란 낱말 속엔 소녀 같은 수줍음·수치심도 있겠지만, 본원적인 혹은 세상에 대한 겸손을 내포한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올 한 해 팔린 시집은 모두 17만권 정도다. 작년에도 비슷했다. 전체 책 판매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0.6% 수준. 사실상 시집은 출간에 의의를 두는 거나 다름없다. 가난할지언정, 어느 시인도 자기 집에 카드 단말기를 들여다 놓고 책을 팔지 않는다. 말 안 해도 알아서 척척 수백 권씩 사가는 피감기관을 두고 있지도 않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죄는 늘 곁에 있다. 눈치 채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이것이 인간의 수준을 가른다. 한국 정치인에게 매번 절망하는 이유는, 반성 대신 먼저 들이미는 후안무치(厚顔無恥) 때문이다.

논란은 계속 커졌다. 사건이 검찰로 넘어갔고, 5년 전 노 의원이 당시 26세였던 아들을 국회부의장실 비서관(4급)으로 취직시켰던 '특혜' 논란까지 다시 불거졌다. 당시에도 노 의원은 "문제 될 게 전혀 없다"는 입장이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노 의원은 2일 부랴부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산자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마음 깊이 새기고 반성한다"고 했다. 이것이 진정 부끄러움의 발로인지 영 의심스럽다. 노 의원의 시집 제목은 '하늘 아래 딱 한 송이'다. 꽃과 사랑을 노래한다고 다 시인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서 시를 쓸 수 없다.


정상혁 디지털뉴스본부        입력 : 2015.12.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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