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와일드’는 절망의 끝에 선 여성 셰릴이 혼자 걸어서 94일 동안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이야기다.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주연했다. [사진 폭스]
여기,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처량한 신세의 여자가 있다. 인생의 전부였던 엄마를 잃었고, 헤로인에 중독됐다. 남편과 이혼까지 했다. 절망도, 방황도 끝간 데까지 갔다. 그런 그가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선다. 그가 선택한 곳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하 PCT). 멕시코 접경에서 캐나다 접경까지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4285㎞의 구간이다. 22일 개봉하는 영화 ‘와일드’(장 마크 발레 감독)는 이 길고 험난한 길을 홀로 걸어간 여자, 셰릴 스트레이드의 이야기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2012년 미국에서 출간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같은 제목의 자전적 회고록을 원작으로 했다.
영화 ‘와일드’는 할리우드 배우 리즈 위더스푼(39)이 주연 셰릴 역을 맡을 뿐 아니라 팔을 걷고 제작을 밀어붙인 영화로 눈길을 모은다. 최근 호평받은 ‘나를 찾아줘’(2014, 데이비드 핀처 감독) 역시 그녀가 제작한 영화다. ‘금발이 너무해’(2001, 로버트 루게틱 감독)와 ‘스위트 알라바마’(2002, 앤디 테넌트 감독)로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그가 이젠 ‘금발의 미녀’ 이미지는 완전히 털어버리고 그 자신의 목소리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와일드’는 셰릴이 왜 이토록 험난한 여정에 나섰는지 그 이유를 처음부터 밝히지 않는다. 그가 배낭을 싸고, 트래킹에 나서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 때문에 발은 짓무르고,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 한가운데서 혼자 버텨야 하는 밤은 공포 그 자체다. 그런 순간마다 셰릴의 생각이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셰릴이 PCT를 걷는 사이사이 그의 과거가 조각조각 던져진다. 한때 찬란한 가능성으로 빛났지만 그도 모르는 사이에 망가진 삶이다.
미국 LA 베벌리힐스에서 기자와 만난 위더스푼은 “집도 없고 돈도 없고, 가족도 삶의 기회도 없지만 그럼에도 해피엔딩인 것이 감동적이었다”고 제작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자신의 분노와 상처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대신 자신을 돌아보고 그 한계를 극복한 셰릴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모두가 삶의 어느 순간에 깨달아야 할 진리”라며 “불행에 빠진 자신을 건져올릴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메시지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위더스푼은 또 “그동안 많은 영화에는 대충 얼기설기 써내려간 듯한 매력 없는 여성 캐릭터만 가득했다. 훌륭한 여배우들이 그런 역을 하며 재능을 낭비하는 모습을 더는 보기 싫었다”며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꾸준히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와일드’는 최근 몇 년 간 부침을 겪은 위더스푼의 삶과 겹치는 대목이 없지 않다. 그는 한때 할리우드 흥행 보증수표로 부상했지만 ‘에브리씽 유브 갓’(2010, 제임스 L 브룩스 감독) 등 몇몇 영화는 평도 좋지 않았고 흥행 성적도 저조했다. 개인으로서도 힘든 시기를 보냈다. 2007년엔 배우 라이언 필립과 이혼하고 2013년엔 음주 운전 시비에 휘말려 구설수에 올랐다. 하지만 ‘와일드’를 기점으로 위더스푼의 제2전성기가 다시 시작됐다는 평가다. 영화 전문지 버라이어티 영화평론가 저스틴 창은 “가슴을 울리는 인내와 자기 발견의 이야기”라고 극찬했다. 영화에서 위더스푼은 화장기 없고 헝클어진 머리다. 초췌하고 피곤한 모습이지만 눈빛엔 오히려 생기가 넘치고, ‘금발이 너무해’ 속의 미녀였던 때보다 더 아름답게 빛난다. 위더스푼이 이 영화의 제작과 주연을 맡으며 애착을 보인 건 셰릴이 희망을 되찾아가는 모습에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LA=이경민 기자, 지용진 기자 [중앙일보] 입력 2015.01.23
★ 5개 만점, ☆는 ★의 반 개
★★★☆(정지욱 영화평론가): 고통이 아닌 희열,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사한 여정. 삶의 생채기를 털어내게 만드는 영화.
★★★★(최광희 영화평론가): 극한의 상황에서 보여준 돋보인 연기, 하이킹을 삶의 여정에 대입시키는 훌륭한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