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반상(盤上)의 향기] 바둑은 형상 … 우칭위안, 복잡한 정석도 한번 보면 ‘저장’

해암도 2014. 5. 25. 08:45

⑥ 이미지의 언어


1994년 제49기 혼인보전 도전 6국 종국 직후. 패배한 조치훈 9단(오른쪽)의 풀어진 맨발과 도전자 가타오카 사토시(片岡聰·56·왼쪽) 9단의 단정함이 대조적이다. [사진 일본기원]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제12기 명인전(1973년 10월 19일, 도쿄 일본기원) 도전 7국. 고요하던 검토실이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린하이펑(林海峰·72) 명인에게 도전한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66) 9단이 흑1(기보1)을 막 두었다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칭위안(吳淸源·100) 9단이 “흑1과 같은 수를 중국에서는 ‘대비(大飛)’라고 불렀다”고 반기자, 후지사와 호사이(藤澤朋齊·1993년 작고) 9단과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2010년 작고) 9단이 “예전에 이런 수로 우(吳) 선생에게 많이 당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기보1
흑1(기보1)은 어려운 수였다. 좌상귀 흑 석 점과의 거리가 멀어 백에 갈라침을 당할 여지가 컸다. 그러나 참으로 활달한 행마. 하늘을 장막(帳幕)처럼 뒤덮는 대붕(大鵬)의 날갯짓 같았다. 대비라고 부른 것이 적절했다.

1990년대 국내 어느 바둑 모임에서다. 모 국회의원이 한 판 두는데 자세가 좋았다. 허리를 ‘척’ 펴서 모자(帽子)라고 부르는 흑3(기보2)을 턱 하니 던졌다. 모자는 상대의 앞을 가로막는 데 쓰는 수법이다. 이 양반 잘나갈 때라 자세 의연했다. 거만하지 않았다.

바둑의 용어는 형상을 묘사한다. 대비가 좋은 예다. 대국자의 수법은 태도를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모자가 좋은 예다. 태도와 수법, 형상과 언어가 함께하기에 우리가 바둑을 둘 때는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네 몸을 반상에 그리는 것이다. 상대를 모자 씌우면 앞에 앉은 상대의 머리를 누르는 기분이 든다.

바둑은 우리 몸을 반상에 그리는 것
바둑에 언어가 있다. 말 없이 손으로만 대화한다고 해서 수담(手談)이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언어 욕망은 원초적인 것이다.

그 언어는 대개 우리의 수렵 본능을 살린 것이다. 고전 『현현기경(玄玄棋經)』(1347)은 용어를 32개 예시했다. ‘누르다(진·鎭)’ ‘껴붙이다(협·狹)’ ‘날다(비·飛)’ ‘머리를 두드리다(정·頂)’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손발을 움직여서 싸우거나 동물을 잡을 때 보이는 신체 이미지를 반상의 형상에 적용해 이름을 얻었다.

왜 그랬을까. 반상에 돌이 놓이면 형상이 드러난다. 그 형상을 뭐라 불러야 할까. 뭔가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이해는 물론 통제도 할 수 없다. 우리네 이름이 공동체나 문명을 유지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바둑과 인간에게는 주어진 조건이 비슷했다. 인간에게 동서남북은 기초적인 조건이다. 전후좌우 사방은 곧 우리의 팔과 다리가 움직일 수 있는 한계를 정해준다. 바둑도 그렇다. 전후좌우 네 방향 선분으로 이뤄진 세상이 반상. 그러니 돌이 모여서 형상을 이루면 우리네 몸 활동이 빚어내는 형상과 비슷한 이미지를 창출한다.

그래서 이리 되었다. “저 (백2 위에 있는 흑3) 형상은 (백2의) ‘모자’(되는 위치)처럼 보여.” (기보2) 흑3을 이해하는 방식인데 말이 된다. 그러나 다음은 이해되지 않는다. “저 형상은 ‘흑3’처럼 보여.” ‘흑3’은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잡아채지 못하는 언어는 형상을 묘사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기보2
형상의 이름 잘 붙이면 이해도 쉬워
바둑의 언어는 그런 식으로 출발하고 발전했다. 고대 중국에선 바둑을 전쟁모형으로 보았기에 언어는 전쟁터에서의 몸싸움도 반영했다. 모호하거나 처음 본 것엔 이름을 붙여야 한다. 그것도 구체적인 사례로 은유해야 한다. 사례로는 바로 옆에 있거나 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 알기 쉽기 때문이다. 이름을 잘 붙이는 만큼 우린 대상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다.

사람들의 불평이 작지 않다. 바둑이란 게 왜 이리 어려우냐. 쉬운 방법 없느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보다 비판적이다. 바둑계가 공부를 해서 언어와 이론 좀 발전시켜라. 정당한 평가일까. 그렇지 않다. 바둑은 언어는 물론 이론 또한 잘 발전시켜왔다. 적어도 2014년 오늘의 수준에 맞는 만큼은 이론과 언어가 발전했다.

시각적 이미지가 생동하는 세계
바둑은 어떤 세상인가. 초반은 모호하다. 돌이 몇 개 놓여 있지 않으니 시야에 잡히는 것도 없다. 이른 새벽 안개가 자욱할 때 들판을 걸어갈 수 있는가. 익숙한 동네 어귀도 쉽지 않다. 묘묘(杳杳)하다. 어떡해야 하는가. 아득한 세상을 인식하는 데 도움 주는 언어가 필요하다. ‘넓다’ ‘좁다’ ‘다가서다’ ‘펼치다’ … 그런 용어가 적절하다. ‘싸우다’ ‘급소를 찌르다’와 같은 용어가 필요 없는 세상이다.

중반엔 돌이 모인다. 가까이서 몸을 부딪쳐 싸운다. 그러니 ‘급소’ ‘누르다’ ‘젖히다’ ‘밀다’ … 그런 용어가 발달한다.

종반은 어떤가. 영토의 경계를 확정하는 일은 계산에 속한다. 계산 과정에서는 형상의 힘이 줄어든다. ‘수(數)’가 지배한다. 용어 자체가 필요 없으니 발달할 이유야 더더욱 없다.

이론도 그러하다. 중반에 싸우고 밀어젖힐 때엔 급소가 요긴하다. 우리네 몸에 맥(脈)이 있어 맥점 짚을 필요가 있듯이 중반엔 맥점 찾는 것이 일이다. ‘호구가 급소’ ‘석 점의 중앙이 급소’ … 그런 이론이 발달한다. ‘1립(立)2전(展)’ ‘양 날개는 유리하다’는 이론은 초반에만 쓰인다. 초반엔 정보가 거의 없기에 명제 없이 움직이기란 어렵다. 정보가 충분하면 ‘만약’은 필요 없는 질문이다.

요컨대 바둑의 언어와 이론은 바둑의 형식에 맞춰 적절히 발달했다. 적절치 못한 언어는 바둑을 두기 힘들게 한다. 초반에 ‘두 점 머리’ ‘석 점의 중앙이 급소’ … 그런 용어와 이론을 사용해보라. 바둑이 될까. 포석의 진행이 불가능하다. 중반에서나 쓰이는 용어로 초반을 이해하려고 드니 그러하다.

자연과학에서든 인문과학에서든 거의 모든 전문 영역은 전문용어(jargon)를 발달시켜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역사에 살아남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바둑은 시각적 이미지가 생동하는 세계다. 우리의 몸 이미지는 반상의 돌 형상과 생생하게 오버랩된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패턴으로 받아들인다. 바둑에 재능 있는 사람들은 반상의 형상을 패턴화하는 데 능한 사람들이다. 우칭위안의 경우 시각적 기억력이 뛰어나 아무리 복잡한 정석이라도 한 번 보면-바둑을 처음 배우던 어린 시절에도-잊지 않았다.

이런 얘기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공습으로 기보가 많이 불탔다. 그러나 우칭위안의 기보는 모두 남아 있었다. 사라진 것들을 머릿속 기억으로 재생해냈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는 일. 그러나 만들어진 일화라 하더라도 우칭위안이 그랬다면 충분히 믿을 만하다.

논리학자와 바둑은 궁합 안 맞아
시각적 이미지가 강한 기사들은 몸과 반상이 합일되는 수준에 쉽게 도달한다. 몸의 반응이 신통찮을 땐 대국 중에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때린다든가, 부채를 휙휙 부친다든가 해서 자각을 일깨운다. 상대에게 불편을 끼칠 정도다.

린하이펑 9단은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2009년 작고) 9단과의 대국 중에 하도 부채를 부치는 통에 후지사와의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부채가 앞에서 번쩍번쩍해 눈이 어지럽다. 그만해라.” 조치훈(58) 9단이 대국 중에 자기 머리를 너무 세게 쥐어박곤 해서 상대가 깜짝 놀랄 정도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위 사진을 보자. 대국이 끝난 다음 옷매무새도 고치지 못하고 맨발로 허탈하게 걸어 나가는 조치훈이다. 반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대국자의 신음소리나 깊은 자탄(自嘆)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62) 9단은 대국 중 일어나 상대의 뒤편에 서서 바둑판을 보는 것이 버릇이었다. 자기를 반상에 너무나 깊이 밀착시켰기에 자신이 반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물론 상대의 항의를 받곤 했다. 고바야시의 기분을 기사(棋士)들은 이해한다. 예선 대국 때엔 많은 기사들이 잠시 일어나서 주변을 거닌다. 차를 마시면서 몰입이 만든 열기를 식히고자 한다. 시각적 이미지는 몸을 쉽게 고양시킨다.

바둑의 용어에는 수렵시대의 흔적이 많다 했다. 수렵시대엔 공간지각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현대엔 공간보다는 문자 중심의 언어능력이 중요하다. 마셜 맥루언(H. M. McLuhan·1911~80)이 명저『구텐베르크 은하계』(Gutenberg Galaxy: the making of typographic man·1962)에서 설파했듯이 문자는 인류의 사고방식을 전체성을 강조하는 공간적 이미지로부터 탈피하게 했다. 단선적인 언어 논리로 기울게 했다.

오늘날 사회는 거의 모든 분야의 기초가 이미지보다는 문자 위주로 닦여져 있다. 다행히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도래가 이젠 꽤 오래됐지만 말이다. 전문가들이 바둑의 현(現) 수준을 아쉬워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발전시켜온 것은 문자 위주의 언어능력이기에, 그들은 형상에 기반한 바둑 언어의 속성에는 익숙할 수가 없다. 맞지 않는다. 논리학자-용서하시라-는 바둑을 잘 두기 힘들다. 바둑의 프로들이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도 어렵다. 적지 않은 프로들이 인터뷰할 때 답변에 능숙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온라인 중앙일보 ·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  중앙일보]   2014.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