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평전’ 저자가 쓴 김지하의 마지막 10年
“두 아들 대학 못 보낸 부모의 恨”
“혁명가 자부하는 천재들이 돈 처 먹어?”
‘전선 이탈한 자’라는 욕설 받으며…
“옳다, 지하다… 더러운 이름이야”
한민족 뿌리 밝히려 한 큰 사상가
필자가 생전에 찍은 김지하 시인의 모습. [허문명 기자]
6월 25일 열린 고(故) 김지하 시인 49재 추모문화제에 미야타 마리에 씨가 참석했다는 것을 들은 건 친하게 지내는 일본인 기자로부터였다. 40대인 그는 1980년대 서울 특파원을 했던 회사 선배로부터 김지하 추모제에 가보라는 취재 지시를 받아 그날 낮 현장 취재를 했다고 한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김지하를 추억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미야타 선생 추모사가 인상적이었다는 일본 기자의 말을 듣고 생전의 김지하 선생으로부터 들었던 바로 그분이구나 싶어 ‘꼭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추모제 이튿날 토요일 오후 인사동에서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작고 연약한 체구의 80대 할머니였지만 예리하고 힘 있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강단과 몸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지적인 에너지는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일본과 국제사회에 청년 김지하를 널리 알린 인물답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날 주어진 시간은 30여 분이었다. 기자는 미야타 선생에게 ‘김지하 평전’을 동아일보에 연재했고 책으로 묶어냈다고 소개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에 초반 분위기가 낯설고 어색해졌다. 김지하 평전을 왜 쓰게 됐느냐고 묻기에 “(김지하가) 박근혜 대선후보 지지 선언을 했을 때를 계기로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다”고 답하자 선생의 얼굴이 굳어진 것이다. 자신은 아직도 “(박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고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 미야타 선생은 김지하의 과거에만 멈춰 있구나, 왜 고인이 생전에 그런 행동과 말을 했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구나…. 당혹스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이날 그에게 “김 시인을 일본과 세계에 알려주셔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하다”고 거듭 말했다. 진정성이 전해졌기 때문인가. 선생의 표정과 마음이 풀린 듯 말문이 열리면서 김 시인과의 인연을 차분하게 풀어놓았다.
김지하라는 천재 알리고 싶었다
1970년대 김지하 시집을 일본에서 출판하고 국제사회에 구명운동을 펼쳤던 전 ‘중앙공론’ 편집자 미야타 마리에 씨. [허문명 기자]
“‘김지하’라는 이름을 만난 건 1970년 6월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라는 잡지 편집자였는데 야근을 하다가 책상 한구석에 놓인 ‘주간 아사히’를 펼쳤습니다. 김지하의 장편 풍자시 ‘오적’ 전문이 일본어로 실렸는데 처음으로 읽는 한국인 시인의 압도적인 말의 힘에 완전히 매료됐습니다.”(*중앙공론은 일본 최대 발행부수로 잘 알려진 요미우리신문이 발행하는 월간지다. ‘문예춘추’ 다음으로 독자를 많이 확보할 만큼 일본에서 영향력 있는 잡지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문학에 심취해 대학(와세다)도 불문학과에 들어갈 정도였다는 미야타 선생은 “부정과 부패에 빠진 통치자를 찌르는 말들이 슬픔이나 저항이 아니라 분노와 비웃음, 때로는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해 언어라는 것이, 시라는 것이 이렇게 힘이 있는 거구나 새삼 느꼈다”고 했다. 그는 이후 김지하라는 인물에 확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천재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후 김 시인이 ‘오적’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체포 연행됐고, 시집 ‘황토’도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의 시집을 한국에서 출판할 수 없다면 일본에서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김지하라는 한국이 낳은 천재 시인의 삶과 작품이 묻혀버릴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김지하 시집은 미야타 선생에 의해 1971년 12월 중앙공론사에서 ‘긴 어둠의 끝에’라는 제목으로 발간된다.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김지하의 이름도 일본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미야타 선생의 활동은 김지하 구명운동으로 이어진다.
“책이 나온 이듬해인 1972년 5월 김 시인이 다시 체포되면서 출판 활동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에 일본의 문학인들에게 책을 보내고 시인을 돕는 운동을 했습니다. 김 시인이 1974년 7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구형을 받았을 때에는 ‘김지하를 죽이지 말라! 석방하라!’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물론 전 세계 지식인들에게도 발신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오에 겐자부로, 엔도 슈사쿠, 마쓰모도 세이조, 시바다 쇼, 다니가와 슌타로 등 대문호들이 동참했고 해외에서도 사르트르, 보부아르, 마르쿠제, 하워드 진, 노엄 촘스키, 에드윈 라이샤워 등 많은 저명인사들이 서명했습니다. 이어 1975년 12월 ‘불귀(不歸)’, 1978년 9월 ‘고행(苦行)’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펴냈습니다.”
미야타 선생은 김 시인이 환경운동을 하고 민주화운동 진영과 거리를 두는 1990년대에도 그와 편지로 교류했다고 한다. 그러다 박근혜 지지 선언 이후 끊겼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에 왔고 그 마음 그대로 도쿄로 돌아간다”고 했다. 고인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이제는 불가능한 현실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추도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민주화가 달성됐다고 게을러진 많은 사람이 김지하의 처절한 맨손의 싸움, 고난에 찬 도주의 날들을 상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의 시를 내밀하게 번역할 때 또 힘없는 나를 의지해야 했던 고인의 외로움을 생각하면서 저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의 신뢰에 응하고 싶어서 노력했습니다. 제 삶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시인의 글에 감응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용기를 가졌습니다.”
입으로만 ‘진보’ 말하는 사람들과의 투쟁
기자와 김 시인은 2013년 1월 5일 강원 원주토지문학관에서 처음 만났다. “인터뷰 안 한다”는 답을 들었지만 주말에 무작정 찾아간 참이었다.
그즈음 그는 뉴스 메이커였다. 그로부터 하루 전, 그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데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몇 달 전에는 박근혜 대선후보 지지 선언으로 신문의 톱기사를 장식했다. 1990년대 초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일갈한 뒤 대중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시피 했던 그가 2013년 1월 돌연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정초의 칼바람이 매섭던 그날, 아내인 김영주 관장만 혼자 문학관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너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김 시인이 저녁 7시경 문화관으로 들어섰다. 잿빛 개량 한복에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는 걸음걸이였다. 그는 “혼자 정선 아우라지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가 그즈음 왜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강원도를 휘젓고 다녔는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기자는 그와의 첫 만남이 설레기도 했지만 조금 두렵기도 했다. 세간에는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이 돌았다. 혹여 제멋대로 이야기하는 그가 무례하거나 작은 말 한 마디에라도 마음이 상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 어쩌나 걱정이 일었다.
직접 만나 본 그는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맞았지만 사리분별이 명확했고 무엇보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으로 가득했다. 당시 그는 TV 기자회견에서 느닷없이 ‘돈’ 이야기를 했는데 뉴스로만 짤막하게 전해 듣는 사람 입장에선 참으로 뜬금없고 황당한 멘트였다. 그 멘트는 다음과 같았다.
“27억 원씩 받고 도망간 여자(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의원이 선거 보전금으로 받았다는 돈을 말한다)도 있는데 사형선고 얻어터진 김지하가 몇 푼 받아서야 되겠느냐. 5억이 아니라 500억, 5000억 정도 주던가. 적어도 27억 이상은 줘야지.”
김지하가 변절하더니 이제 돈독까지 올랐다고 세상 사람들은 수군댔다. 그런데 사정을 듣고 보니 그 나름 다 생각이 있던 거였다.
“지금까지 (내가) 수십 년간 떠든 게 민주주의였는데 민주주의 얘길 또 해? 지루하기 짝이 없지. 풍자? 그게 아니야. 이정희 의원이 대선후보를 사퇴하는 데 27억 원을 보전받는다는 기사를 읽는데 나도 모르게 ‘쥐새끼 같은 ×,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말이 튀어나왔어. 우습더라고. 하하하.
기자들을 보니 뭔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느낌이 어떠냐기에 ‘아무 느낌 없다’ 하니 실망한 눈치였어. ‘이 자식들이 왜 실망하지?’ 다시 보니까 똥구멍 같은 내 입에서 뭔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 같았어.
그래서 돈 이야기 했어. ‘나는 요즘 돈이 좋다. 왜? 돈이 나빠? 돈 싫어하는 사람 손 들어봐.’ 아무도 손드는 사람 없대. 나는 옛날엔 돈을 악(惡)의 징표라고 봤어. 오래 살다 보니 돈이라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수단이야. 부자지간에도 그래. 돈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는 가슴속에 담아뒀던 말을 쏟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쉼 없이 말했다. 돈이 없어 자식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는 말을 들을 때는 마음이 짠했다.
“아들 둘이 대학엘 못 갔어. 요즘 세상에 대학도 못 나오면 어디에 쓰나. ‘두 아들이 대학도 못 갔다’ 해도 놀라는 사람이 없어. 욕 안 하기로 맹세했지만 그럴 땐 ‘×발’ 소리가 절로 나와. 자기 자식들은 대학 졸업시켰으니까. 대학 못 보낸 부모 한(恨)을 모르는 거지. 어떻든 그날 기자들을 보니 갑자기 돈 이야기 한번 하자 생각이 들더라고. 젊은 기자들 얼굴이 하나같이 ‘네가 돈 때문에 (법원) 재심 신청했구나’ 하는 표정이야. 그걸 보고 더 하기 시작했지.”
그는 겉으로는 ‘민주’와 ‘정의’를 말하면서 뒤로 돈과 권력을 챙기는 이른바 ‘입(口) 진보’들의 이중성을 거친 언어로 질타했다. 세금 빼먹는 또 다른 도적이라면서 말이다.
“내가 오적(五賊) 쓸 때도 사업가들이 뇌물 주는 건 욕하지 않았어. 하지만 국고금 빼먹은 놈은 찢어 죽여야 한다고 했어. 내 신념이야, 아니 민중의 신념이야. 장사꾼이 뇌물 주는 것은 상관없다 이거야. 그런데 국고금이라는 건 서민들이 헐벗어 바친 세금이야. 그걸 떼먹어? 죽여야지. 거기에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집권한 자들이) 돈을 처먹어? 스스로 혁명가라고 자부하는 목포, 광주 한(恨)의 천재들이? 망월동 핏값 받은 외에 또 받아?”
마치 마당극 무대에 선 듯 그의 말에는 운율과 리듬까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글을 통해 ‘말로만 진보’를 떠들어대는 지식인들을 향해 “맥도널드 햄버거를 즐기며 반미를 외치고 전사(戰士)를 자처하면서 반파쇼를 역설”하는 ‘철부지들’이라 맹공했었다.
글이 나간 직후 민족문화작가회의는 김지하 제명을 결정했고 그의 집에는 한 달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난, 욕설, 협박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운동권으로부터 고립된 터여서 김지하는 그 일로 더 철저히 은둔한다.
‘보고 싶은’ 김지하만 ‘보는’ 사람들
김지하 시인과 마지막까지 교류했던 윤명철 전 동국대 교수. [허문명 기자]
당시 그는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간 독재자의 딸을 지지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지만 정작 그가 박근혜 지지를 선언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음(陰)의 시대가 왔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남자의 시대가 가고 여자의 시대가 왔다는 건 내가 오래전부터 해온 말이야. 3000년 동안 남성이 여자를 억압해 왔어. 남성주의, 가부장제 역사에서 여성 지도자가 나올 때는 대세가 움직인다는 거야. 지금이 바로 개벽기야. 음(陰) 개벽이야. 양(陽) 지배에서 음 지배로 넘어가는 때야.”
음이니 양이니 개벽이니 하는 말들은 낯설게 들렸지만 이후 그를 여러 차례 만나면서 그가 왜 한민족의 뿌리와 동양사상의 본질을 탐구하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와 마지막까지 깊게 교류한 윤명철 전 동국대 교수(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국립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투사도 아니었고 운동가, 정치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가 쓴 많은 책과 시집, 어려서부터 화가가 되고 싶어 그린 ‘난(蘭)’ 그림에 담긴 것은 한민족에 대한 진한 애정과 바른 평가였다.
그가 생전에 성치 않은 몸과 구멍이 난 정신을 이끌고 고구려 땅, 파미르고원, 바이칼호, 안데스산맥, 캄차카반도,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까지 찾아다녔던 건 우리가, 인류가 지향해야 할 그 무엇의 원형을 찾고, 그 원형에 담긴 우리 사상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는 엄청난 집념으로 온몸을 불사르며 고뇌하고, 고통받으면서 생명사상을 찾아 올렸다. 그것을 현대 언어와 서양 논리, 불교 사상으로 풀어내고, 세상의 보편적 진리와 결합하고자 무지무지하게 애를 썼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사상가였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그는 숱한 지인들과 후배들로부터 “데모대 선두에 서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이제 정치가 아닌 다른 일을 찾고 있다. 더는 데모 안 한다”고 거절했다. 변절, 배신, 반동이라는 비난에서부터 ‘전열을 흩뜨리는 자’ ‘전선을 이탈한 자’라는 욕설이 쏟아졌다. 환경과 생명운동에 나서자 ‘생명교 교주(敎主)’라는 비아냥도 거셌다. 시인이라는 여린 감수성을 가진 그의 마음에 세상의 욕설과 비난은 그대로 화살이 돼 꽂혔다.
출옥 후 20여 년 동안 정신분열증으로 고통받아 10여 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했던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 안에 멍하니 있다가 환영에 이끌려 집을 나가 행방불명돼 버리는 가장(家長)을 바라보는 아내와 자식들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와의 첫 만남 이후 기자는 그의 삶을 더 파고들고 싶었다. 그해 겨울 두 달여간 원주를 오가며 100시간 이상 대화를 나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김지하와 그의 시대’는 길어야 60회로 예상됐던 연재가 100회를 넘기면서 동아일보에 실렸다. 돌이켜 보면 그는 기자와 만났던 그때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것 같다.
고인을 떠올려 보면, ‘젊을 적 너무 일찍 세상의 중심에 서다 보니 그것이 오래오래 사람들의 머릿속에 낙인처럼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은 건 아닐까’ ‘사람들이 그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지하는 계속 새로움, 본질을 향해 나아갔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김지하만 보려 했다는 생각 말이다. 그는 사람들의 이중성에 진절머리를 냈고 자신을 신비화하고 영웅시하는 것도 싫어했다. 뼛속 깊은 저항 정신을 가진 이답게 권력이나 제도권에 대해서는 애써 거리를 두려 했다.
생전의 그가 자신의 이름에 대한 얽힌 이야기를 했을 때도 기자는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지하가 무슨 뜻이냐, 그럴듯해 보이지? 아니야 땅속에나 갈 놈이라는 뜻이야. 나중에 유식한 놈들이 한자를 붙인 거지. 한글로 그냥 ‘지하’야. 서울대 문리과대학 다닐 때 시화전을 했어. 당시 우리 세계에서는 시화전 한번 하면 이름이 나게 돼. 그러니까 이름이 중요하잖아. 내 본명이 김영일이잖아. 그런데 같은 이름이 5명이나 됐어. 그러던 참에 동아일보에 있던 선배 한 명이 술 사준다고 오라는 거야. 당시에 낮술 사주는 선배는 큰 선배였지. 얼큰하게 취해 학교로 가려는데 돈이 한 푼도 없는 거야. 그래서 걸었어. 길가를 지나는데 ‘지하 이발소’ ‘지하 다방’ 옳다, 지하다. 그때부터 내 이름을 지하라고 한 거야…. 더러운 이름이야.”
그는 때로 두 눈을 부릅뜨며 욕설과 호통을 치면서 화를 내고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표정으로 깔깔댔다. ‘태어나서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의 모습이 저런 게 아닐까’ 란 생각도 들었고 격한 언어, 심한 감정 기복, 논리 비약 앞에서 당혹스러운 적도 많았다.
하지만 한번 말문이 터지면 신들린 듯 9시간 10시간씩 말을 쏟아냈다. 정말 아는 것이 많은 사람, 자기 말을 진정으로 들어줄 누군가를 갈구하는 사람이라고 느낀 적이 많았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싶다
허문명 기자가 2014년 출간한 저서 ‘김지하와 그의 시대’.
그는 외부와의 오랜 단절 속에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온 사람 특유의 논리적 확장이나 치우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문화는 물론이고 정치학·경제학·사회학·여성문제 등 다양한 고전을 인용하며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답사를 다니던 모습은 본질을 탐구해 정리해 내고야 말겠다는 구도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한 번도 민중에 대한 애정과 시대의 고통에서 피해간 적이 없었다. 과거를 팔아 권력이나 돈을 탐한 적도 없었다. 오적(五賊)을 썼을 때처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호소할 때의 결기 그대로 평생을 살았다. 그가 뱉는 비속어, 과장된 비유, 걸쭉한 풍자는 그만의 트레이드마크였지만 그런 점에서 천생 ‘시인’이었다고 할까. 윤명철 교수는 “천생 선생이었다”고도 했다.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도 뭔가 싹수가 있어 보이는, 자기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말을 꺼냈다. 말 자체가 아니라 자기 생각,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사람들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책으로, 시로, 그림으로 전달하는 것만 갖고는 성에 안 찬 듯했다. 그리고 정말 부지런했다. 강원도 두타산 일대 사라진 예맥인들, 제천과 원주 등의 곳곳에 숨겨진 궁예 흔적들, 해월 최시형과 동학의 사연들이 얽힌 원주, 제천도 자주 다녔다. 전속(?) 택시 운전기사가 있을 정도였으니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마누라 몰래 택시를 대절해 답사 다니다가 또 ‘쿠사리’를 맞았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는 기자에게도 죽을 때까지 공부만 하고 싶다고 했다. ‘김지하와 그의 시대’ 연재를 끝내고 마주 앉았을 때(2013년 9월)였다.
“내 전공이 미학이잖아. 요즘 난 공부밖에 안 해. 정치는 절대 손 안 대. 내가 지금 몰두하는 것은 ‘아우라지 미학’이야.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아우른다는 뜻이다. 한반도는 비록 강대국은 아니지만 내적(內的)인 민족 아닌가. 세계가 지금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민족이다.
백범 김구가 해방된 뒤 들어와서 ‘지금 이 나라 형편에서 어떤 힘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물음에 군사력, 경제력이라는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문화력’이라고 했어. 나는 세월이 갈수록 그 말의 의미가 심장해짐을 느낀다.
우리는 식민지 경험에다가 짓밟히기만 해서 우리 정신,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가 많이 모자라다. 역사학자들이 애를 쓰긴 했지만 그래도 모자라다. 서세동점(西勢東漸·서양이 동양으로 점점 밀려옴) 분위기에서 외국 것, 서양 것 배우자는 것으로 갔지만 이제 세계 흐름은 동아시아로 오고 있다. 앞으로는 문화가 밥을 먹여줄 것이다.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조선의 사상을 연구하다 갈 것이다.”
‘문화가 밥 먹여줄 것’이라던 그의 말은 K팝과 영화가 세계를 휩쓰는 요즘을 내다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마지막 만남
수년간 전화로만 안부를 전하다 고인을 마지막으로 본 건 아내 김영주 관장이 세상을 뜨기 하루 전날인 2019년 11월 24일 일요일이었다. 병원에 혼수상태로 누워 있던 김 관장을 만나기 전 원주 집에서 만난 김 시인은 극도의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퇴원해 집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면서 “아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평생 행복하게 해준 적이 없다. 꼭 살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김 관장 방까지 열어 보여줬더랬다. 시인의 간절함에도 아랑곳없이 다음날 김 관장이 허망하게 떠난 이후 김 시인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 교류한 윤 교수가 전한 그의 마지막은 이랬다.
“형수님이 돌아가신 후 절망감에 힘들어 했지만 다시 그림을 그렸다. 의욕을 보이면서 다신 안 쓴다던 책을 또 쓰겠다고 했다. 코로나가 발생하면서는 만난 적이 없다. 반년 쯤 전 혹시나 하며 찾아갔지만, 집 밖에서 큰소리로 ‘선배님, 저 명철이 왔어요’라고 외친 날도 있었다. 어느 날은 담장을 간신히 넘어오다 멈춰버리는 힘든 목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는데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눈물만 흘리고 돌아왔다.”
앞서 소개한 미야타 선생은 추모사에서 고인의 시 ‘바다에서’를 소개했다. 한줄 한줄 김 시인의 신산했던 삶과 겹쳐져 마음이 아파온다.
“눈이 내린다/술을 마신다/마른 가물치 위에 떨어진/눈물을 씹는다/숨이 지나온 모든 길/두려워하던 내 몸짓 내 가슴의/모든 탄식들을 씹는다/혼자다/마지막 가장자리/바늘로도 못 메울 틈 사이의 거리/아아 벗들/나는 혼자다”
사회운동가였으며 시인이자 예술가였고 생명사상과 한민족 정신의 뿌리를 밝히려 했던 사상가였던 김지하의 삶은 뭐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수행자이자 전인적 인간이었다고 할까. 저세상에서 아내와 만나 행복하게 편안하시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허문명 기자·‘김지하와 그의 시대’ 저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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