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가슴에 구멍 뚫린 초상 조각상... 이 스님을 아십니까

해암도 2022. 5. 4. 09:00

[한국의 유물유적]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승의 초상 조각... 국보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국보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실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스님의 초상 조각상이다. 2020 10월 국보로 지정됐다
ⓒ 문화재청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했던가. 갓 돋아난 미나리 새싹처럼 파릇파릇했던 청춘 시절. 강한 전기에 감전된 듯 전율이 느껴졌던 시어를 읽고 또 읽었지만 행간에 숨어 있는 깊은 뜻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정작 시인은 열아홉 나이에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정한(情恨)이 서려 있는 이 시를 지었지만.
 
그 청춘, 중년을 훌쩍 넘기고서야 세상만사 모든 일이 번뇌가 되고 번뇌가 깊을수록 깨달음은 곧 별빛이 된다는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어느 봄날, 세속적 번뇌를 종교적 별빛으로 승화시킨 고승의 초상(肖像)을 뵙고 나서야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라는 부처님 말씀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임을 깨닫게 되었다.
 
번뇌를 초월한 실존 스님의 초상 조각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청정도량 합천 해인사. 우리나라 삼보(三寶) 사찰 중에서 법보(法寶) 사찰이다. 신라시대 창건된 천년 고찰 해인사의 '해인(海印)'이란 거친 파도와 같은 마음속 번뇌 망상이 멈출 때 비로소 삼라만상의 참모습이 그대로 바다에 비치는 것과 같은 경지를 뜻한다.
  

  건칠희랑대사좌상의 뒷면. 건칠이란 삼베나 종이에 옻칠을 여러 번 반복하여 몇 겹으로 붙여가며 형태를 만드는 기법이다
ⓒ 문화재청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수많은 불교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해인사 성보박물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실제로 생존했던 스님의 초상 조각상이 있다. 2020 10월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건칠희랑대사좌상(乾漆希朗大師坐像)'이다.
 
이마에 새겨진 깊은 주름. 번뇌를 초월한 형형한 눈빛. 우뚝 선 콧날과 입가의 엷은 미소. 툭 튀어나온 성대와 앙상한 빗장뼈.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손등의 뼈마디. 마른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 점이 있는 장삼을 입었고 그 위에 붉은 바탕에 녹색 띠가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다.
 
왼쪽 어깨 위에 가사를 고정시키는 띠 매듭을 장식했다. 약 11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실제 인물을 대하고 있는 듯 생생하고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노스님의 모습에서 번뇌가 사라진 '해인의 경지'가 느껴진다.
  

  건칠희랑대사좌상의 옆면. 희랑대사는 10세기 초 해인사를 크게 중창했던 스님으로 화엄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 문화재청


 
우리나라 초상조각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희랑대사좌상은 처음엔 목조각으로 알려졌으나 2008년 보존 처리 과정에서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로 만들었고 뒷면의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금과 같은 채색은 18세기 말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건칠이란 삼베나 종이에 옻칠을 여러 번 반복하여 몇 겹으로 붙여가며 형태를 만드는 기법이다.
 
희랑대사 좌상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유행했던 건칠 기법을 사용하여 10세기 초에 제작된 높이 82.3cm, 너비 60.6cm의 등신상(等身像)으로 실제 스님이 수행하던 생존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한국 불교사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실존 고승의 초상 조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희랑대사좌상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가슴에 폭 0.5cm, 길이 3.5cm의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있다. 이로 인해서 '가슴에 구멍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흉혈국인(胸穴國人)'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희랑대사좌상에는 가슴에 폭 0.5cm, 길이 3.5cm의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있다. 가슴에 구멍이 있는 ‘흉혈국인’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가슴의 흉혈이나 정수리의 정혈은 고승의 신통력을 상징한다
ⓒ 문화재청


 
해인사 설화에 따르면, 당시 해인사에 모기가 많아 수행자들의 고통이 심했다. 이에 희랑 스님은 모기 때문에 고통받는 다른 스님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 자신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했다. 이로 인해 다른 스님들은 편안하게 수행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 다른 버전의 전설도 있다. 희랑대사가 수행 중에 졸고 있는 스님들을 깨우기 위해 모기를 불러들여 날아다니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어찌 됐건 고승의 가슴에 난 '흉혈(胸穴)'이나 정수리의 '정혈(頂穴)'은 신통력을 상징한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의 스승
 

가슴에 구멍까지 뚫어 가며 다른 스님들의 수행을 도운 희랑 대사는 누구일까. 신라 말 고려 초 격랑의 시기를 살았던 희랑 대사의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다. 다만 해인사 소장 자료에 의하면 진성여왕 때 태어나 15세에 해인사에 출가하였고 949년 이전에 열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자한 눈빛과 엷은 미소를 띤 입술. 실제 인물을 대하고 있는 듯 생생하고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노스님의 모습에서 번뇌가 사라진 ‘해인의?경지’가 느껴진다
ⓒ 문화재청


 
희랑대사는 화엄학(華嚴學)에 조예가 깊었던 학승(學僧)으로 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에서 수도 정진하며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백제의 견훤과 왕건이 삼한 땅을 놓고 패권을 다투던 시기. 해인사 승려들은 견훤을 지지하는 '남악파(南岳派)'와 왕건을 지지하는 '북악파(北岳派)'로 나뉘어 있었다. 학문과 신통력이 뛰어난 희랑대사는 북악파의 종주이자 왕건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고려 건국 초기. 후백제와 신라의 중간 지점인 합천 해인사 인근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에서 왕건의 군대가 견훤의 군대에 크게 밀리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희랑대사는 급히 승병들을 보내 왕건을 도우며 대승을 이끌었다. 왕건은 이에 보답하고자 토지를 하사하고 해인사를 크게 중수했으며 국가의 중요 문서를 이곳에 보관하도록 했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손등의 힘줄과 뼈마디. 생동감이 넘쳐 생전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 문화재청


 
권력이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 종교계가 권력을 좇아 이합집산하는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 이후 견훤을 지지했던 남악파는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고 희랑대사를 중심으로 한 북악파의 이론은 새 왕조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게 된다.
 
신라 말 고려 초기에 희랑대사가 얼마나 영향력이 큰 스님이었나 하는 것은 당시 스님의 수행처였던 '희랑대(希郞臺)'라는 암자가 지금도 해인사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말기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석학 최치원은 만년에 해인사에 머물면서 희랑대사를 부처님에 버금가는 '용수보살'이나 '문수보살'에 비유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해인사 희랑대. 희랑대는 그 암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희랑대사가 머물던 곳으로 자연이 이루어낸 기기묘묘한 지형과 빼어난 경치로 말미암아 일찍이 금강산의 보덕굴에 비유되곤 했다
ⓒ 해인사


 
희랑대사가 활약했던 10세기 전반,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승들의 생전 모습을 조각상으로 많이 남겼지만 한국 불교에서는 고승이 입적하면 조각상보다는 초상화로 제작하여 영각에 봉안했다. 스님의 생전 모습을 조각상으로 남긴 사례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역사적 문헌 기록과 함께 거의 원형 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고승의 초상 조각으로는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런 점에서 1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희랑대사 좌상은 우리 불교 회화사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천 년 이상 영구히 보존해야 할 소중한 불교문화유산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 130호 (2022년 5, 6월)에도 실립니다.

 
 

임영열     오마이뉴스.     입력2022.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