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건 몰라도 조선왕국은 법체계는 완벽했다. 백성과 공무원을 그물처럼 관리하고 감시하고 보살필 수 있는 각종 성문법이 완비돼 있었다. 법대로만 운영했다면 조선은 낙원이 됐을 텐데, 실천은 다른 문제였다.
‘대전통편’에는 ‘고과(考課)’라는 항목이 있다. 사또들 인사평점을 매기는 기준이 여기 제시돼 있다. 이름해서 ‘수령칠사(守令七事)’다. 수령이 해야 할 일곱 가지 업무 고과 체크리스트다. 내용은 이렇다.
‘매년 말 관찰사는 수령칠사(守令七事) 실적을 왕에게 보고한다. 논밭과 뽕밭을 성하게 하고(農桑盛·농상성), 인구를 늘리고(戶口增·호구증), 학교를 일으키고(學校興·학교흥), 군정을 바르게 하고(軍政修·군정수), 부역을 고르게 하고(賦役均·부역균), 송사를 간명하게 하고(詞訟簡·사송간), 간사하고 교활한 풍속을 그치게 하는 것(奸猾息·간활식)이다.’
며칠 남지 않은 문재인 정부를 본다. 훌륭한 사또였는가?
먼저 논밭과 뽕밭을 성하게 했나? 성하게 하지 않았다. 서울 명동과 종로 상가에 가보면 안다. ‘임대’라는 안내문을 유리창에 붙여 놓고 세 집 건너 하나씩 비어 있는 상가를 보면 된다.
인구를 늘렸나? 못 늘렸다. 2017년 합계출산율은 1.0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0.84명이었다. 저출산 대책에 목숨을 걸겠다는 정권이었다.
학교를 일으켰나? 무너뜨렸다. 자사고와 외고에 가한 행위를 기억하는가. 학생과 학부모와 여론이 일치단결해서 반대했지만 문재인 정권은 폐지를 밀어붙였다. 코로나 대책이 난장판이 되면서 2년 동안 정상 수업은 사라졌다. 이런 사례가 너무 많아서 굳이 나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 군정을 바르게 했나? 더럽혔다. 현역 군인 그 누구에게든 물어보라. 북한이 미사일을 날려댈 때 문재인 정부는 꼬박꼬박 ‘불상’을 날렸다고 주장하고 한반도에 평화가 왔다고 외쳤다.
부역, 그러니까 세금을 고르게 했는가? 구한말에 버금가는 무명잡세 시대였다. 좌파 정권의 특징인 ‘부동산 가격 앙등’ 현상은 문재인 정권에도 재발했고,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늘려서 시민들을 허망하게 만들었다.
송사를 간명히 했는가? 복잡하게 만들었다. 대통령 부인 외유를 비판한 기자에게 ‘가짜뉴스’라면서 소송을 걸었고, 패했다. 청와대는 대통령을 비난하는 전단을 뿌렸던 시민 또한 고소했다가 여론에 밀려 취하했다. 취임 직후 “그 어떤 조롱도 감수한다”고 했던 대통령이었다.
마지막으로, 간사하고 교활한 풍속을 그치게 했는가? ‘짤짤이’ 논쟁으로 대미를 장식한 정권인데 무슨 고과가 필요한가. 정권 자체가 성추행과 부패로 점철됐는데. 수령칠사 가운데 이 간사하고 교활한 풍속 부문에 관해서 이 정권은 역사에 길이 남을 낙제생이다.
수령칠사 고과에 합격한 수령은 더 기름진 마을로 영전하거나 포상을 받았다. 주민은 선정비를 세워 그들을 기렸다. 선정비 이름은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영세불망비’, 떠나도 생각하겠다는 ‘거사비(去思碑)’, 자기네를 아끼고 사랑해줬다는 ‘애휼비(愛恤碑)’ 등이다. 웃음보따리가 터진다. 조정에서 ‘선정비 금지령’을 내릴 정도로 선정비가 전국팔도에 널렸다. 그 가운데 많은 돌덩이들 뒤에는 ‘선정비까지 강요한’ 악정(惡政)과 원한밖에 없다.
나흘 남은 이 정권은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검수완박 법을 통과시키고 바로 대통령 훈장 수여를 의결했다. “역대 대통령들 관행인데 뭐가 문제냐”라면서 금과 은과 루비와 자수정을 박아 넣은 억대 무궁화대훈장을 스스로 결재했다.
나라 꼬라지가 이 모양이 됐는데 관행이라면서 받기로 했다니, 할 말이 많지만 관두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찬양해 마지않는 군주가 있다. 정조다. 정조는 말년에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불렀다. ‘만 갈래 강을 비추는 밝은 달의 주인 되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국정 장악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하지만 귀를 닫고 눈을 닫고 본인만이 길이며 진리라는 오만과 자만이기도 하다. 이제 나흘 남았다. 이 나흘 동안 꼭 자문해보라. 내가 수령칠사를 이행했는가. 내가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는가. 선정비를 세울 자격이 있는가. 꼭.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2.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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