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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쓰고 인재를 죽인 조선, 自滅하다

해암도 2021. 8. 19. 09:47

이기동의 《비극의 군인들》

⊙ 구한말과 日帝 시대를 살아낸 日 육사 출신 풍운아들의 이야기
⊙ 갑신정변 후 유학생들 핍박, 처형… 박유굉은 육사 졸업을 1년 앞두고 자살
⊙ 일본 육사 출신 청년 장교들, 혁명일심회 결성… 고종, 러일전쟁 발발하자 수감 중이던 7명 중 3명 서둘러 처형
⊙ 이갑, 유동열, 노백린, 김광서, 이청천, 이종혁, 이동훈, 조철호 등은 독립운동 투신
⊙ 고종, 통감 이토 히로부미 견제하겠다고 早期 합병 추진 세력이던 조슈 군벌에게 접근
⊙ “황제(고종)가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을 식별해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失政을 저지르게 된다”(주한 영국총영사)

  다시금 옥리(獄吏)가 소리쳤다.
 
  “장호익!”
 
  5명의 동지가 그에게 시선을 보내자 장호익은 “그럼 먼저…”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는 한칼에 죽지 않았다. 세 번째 칼을 내려칠 때까지 그는 “만세!”를 외쳤다.
 
  당시 한성감옥에 수감 중이던 이승만(李承晩)은 옥중 창문을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는 후일 자신의 홍보고문이었던 로버트 T. 올리버에게 이때의 일을 술회했다. 올리버는 자신의 저서 《이승만: 신화에 가린 인물》에서 장호익을 ‘위대한 애국자’라고 지칭했다.
 
  장호익(張浩翼·1871~1904년)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인물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사관후보생) 출신으로 동기생들과 혁명일심회(革命一心會)를 조직, 정부를 전복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됐다.
 
  개화의 역군으로 기대를 모으면서 일본에 가서 신식 군사교육을 받고 왔지만 구한말(舊韓末)의 거듭되는 정변(政變)의 와중에서 비명(非命)에 간 사람은 장호익뿐이 아니었다. 장호익 같은 사람만 ‘비극의 군인’은 아니었다. 장호익의 일본 육사 동기생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노백린(盧伯麟·1875~1926년)처럼 독립운동에 투신,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다가 이역(異域) 땅에서 눈을 감은 이들도 ‘비극의 군인’이었다. 장호익·노백린의 일본 육사 동기생으로 젊은 시절 함께 부패한 나라를 바로잡아 보려 노력했지만, 나라가 망한 후에는 적국(敵國)인 일본 군복을 입어야 했던 어담(魚潭·1881~1943년) 같은 이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비극의 군인’이었다. 그리고 나라가 망하고 한참 후에 태어나 일본 육사에 진학했다는 것 때문에 두고두고 ‘친일파(親日派)’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 이들도 있다. 그들도 ‘비극의 군인’이었다.
 
  이기동(李基東·78) 동국대 명예교수의 《비극의 군인들》(일조각, 2020년)은 바로 그런 이들의 이야기다. ‘이기동’이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맞다. 신라사를 비롯해 고대사(古代史)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원로 국사학자 바로 그분이다. 원래 이 책의 초판은 1982년에 나왔다. 이기동 교수가 몇몇 잡지에 실은 글 7편을 모은 것이다. 그러다 작년에 초판이 나온 지 28년 만에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그러면서 당초 ‘일본 육사 출신의 역사’였던 부제(副題)를 ‘근대 한일 관계사의 비록(祕錄)’으로 바꾸었다.
 
 
  박유굉의 자살
 
  이 책을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한국인의 일본 육사 진학이 무척 이른 시기에 시작됐다는 점이다. 이미 1883년 1월 박유굉(朴裕宏·1867~1888년)이라는 소년이 육사의 예비과정인 도야마 학교에 입교, 1886년 일본 육사에 진학한 것이다. 박유굉은 1883년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로 파견됐던 박영효(朴泳孝・1861~1939년)를 따라 도일(渡日)했다. 그해 5월에는 14명이 도야마 학교에 입교했다. 이때 입학한 사람 중 하나가 서재필(徐載弼·1864~1951년)이었다.
 
  하지만 지지리도 가난했던 조선 조정은 이들의 학비를 댈 수 없었다. 결국 박유굉을 제외한 나머지 14명은 1년 만에 귀국했다. 이들은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가담했다. 갑신정변이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나자 서재필, 이재완, 신응희, 정난교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청군(淸軍)에게 피살되거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갑신정변에 관한 기록에 보이는 ‘사관생도’가 이들이다.
 
  이제 개화파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몇 안 되는 유학생들은 조선 조정의 눈에는 ‘역적 예비군’이었다. 조선 조정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 정부에 유학생들의 본국 송환(送還)을 요구했다. 직접 유학생들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귀국을 종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1886년 5월 조선 조정으로부터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고 귀국한 유학생 6명은 귀국 즉시 처형됐다. 귀국을 거부한 유학생들의 경우, 그 가족이 처형되거나 구금됐다.
 
  이런 상황에서 박유굉은 1886년 정규 일본 육사 생도(생도 11기·사관후보생 11기와는 다름)가 됐다.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일본인 동기생들은 “자네는 우리와 같이 학생으로서 수양할 때이다. 정변과 같은 것들로 고민해서는 안 된다. 졸업한 다음에 지위를 얻게 되면 결사적으로 나서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위로해주었지만, 그의 고뇌는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1888년 5월, 졸업을 1년 앞두고 권총으로 자신의 목을 쏘아 자결했다. 박유굉과 약간의 교분이 있었던 윤치호(尹致昊·1865~1945년)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일본 사관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여 내년에 졸업하게 된 박유굉이 6~7일 전 자살한 소식을 들으니 참혹하고 가련하다. 비록 그 사연은 자세히 모르겠으나 그 국가형세 한심한 일과 그 가사(家事) 창망한 것을 슬피 여겨 자살한 듯. 더욱 불쌍하며 이때까지 공부하여 일시에 무단히 버렸으니 아깝다. 이것도 또한 우리나라 국운(國運)인가.〉
 
 
  버림받은 장교들
 
  갑신정변 때 희생된 ‘사관생도’나 박유굉의 자살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진행 중이던 1895년 국비(國費) 장학생으로 일본에 건너와 1898년 육사 11기(사관후보생)로 입교한 21명의 운명도 기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유학을 떠날 때 내부(內部)대신이던 박영효는 “장차 조선을 개화시킬 역군은 그대들밖에는 달리 없다”고 격려하면서 “그대들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에는 틀림없이 중용(重用)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일개화정부가 전복되면서 이들의 운명은 고단해졌다. 본국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어렵게 졸업했지만, 당장 숙식할 곳조차 없었다. 조정은 이들을 참위(參尉·현재의 소위)로 임관한다는 사령(辭令)을 냈지만, 귀국을 시켜 보직을 주지도, 봉급을 지급하지도 않았다. 견디다 못한 이들은 주일공사관의 행랑채로 들어가 자취를 시작했다. 이들은 주일공사 이하영(李夏榮)·조병식(趙秉式) 등에게 딱한 사정을 호소했다. 하지만 조정은 이들을 박영효의 당여(黨與)로 간주, 그냥 방치하기만 했다. 이를 보다 못해 나선 사람이 있었다. 일본군 참모본부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소좌(소령)였다.
 
  그는 1900년 9월 조병식 공사를 만나 “전도양양한 청년 사관들을 이곳에서 썩히는 것은 귀국(貴國)의 손실”이라면서 그들을 구제해달라고 청했다. 특히 우쓰노미야는 이기옥과 권승록이 임관조차 하지 못한 이유를 따졌다. 이에 대해 조병식은 이기옥의 아버지, 권승록의 숙부가 전(前) 정권에서 관리로 봉직한 탓에 “현 정권이 본다면 역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우쓰노미야는 벌컥 화를 냈다.
 
  “그 무슨 폭정(暴政)이오? 무슨 만풍(蠻風)이란 말이오! 만약 한 사람의 죄가 그 일족(一族)에 대해서까지 이어진다면 한국은 자멸할 수밖에 없소.”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주일공사가 일개 육군 소좌에게 이런 질타를 받아야 했던 상황이 참담하다. 그러고 우쓰노미야의 말처럼 대한제국은 10년 후 망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9년 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선군사령관이 우쓰노미야였다.
 
 
  ‘혁명일심회’의 쿠데타 음모

 

 

 

 

 

 

                                                                                민영환

 조정으로부터 버림받은 11기생 가운데 15명은 1900년 10월 혁명일심회를 결성, 친러정부를 타도하고 ‘혁신정부를 수립’하자고 결의했다. 이들은 고종과 황태자(순종)를 폐위시키고 의친왕 이강을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 가운데 김형섭(1898~1929년) 등은 1901년 초 귀국, 군부 요인들을 만나 자신들을 구제해달라고 호소했다. 다행히 전 참정대신(參政大臣·총리)이자 당시 원수부(元帥府·대한제국의 최고 군통수기구) 회계국 총장 민영환(閔泳煥·1861~1905년)이 이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민영환은 고종을 설득, 이들을 임용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노백린, 어담, 김형섭 등 5명이 무관학교 교관으로 발령받았다.
 
  한편 다른 일심회 회원들은 일본에 망명 중이던 전 내부대신 유길준(俞吉濬·1856~1914년)과 손잡고 쿠데타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 음모가 발각되면서 1902년 6월 장호익, 조택현, 김형섭 등 8명이 체포됐다. 용케 체포를 면한 이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체포된 일심회원들은 모진 고문을 받은 후 한성감옥에 갇혔다. 이들은 이때 박영효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1899년부터 수감 중이던 이승만과 교분을 나누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군대를 파병, 한성(서울)을 장악했다. 얼핏 보기에는 일본 육사 출신인 일심회 회원들에게는 살길이 열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고종은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일본이 일심회 회원들의 구명을 요구해올 경우에 대비해 이들의 처형을 서두른 것이다.
 
  3월 9일 평리원(平理院·대법원)에서 유길준의 쿠데타 음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일심회원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그러고 나서 바로 그날 처형이 시작됐다. 먼저 조택현(1894~1904년)이 참수됐다. 이 글의 첫머리에 소개한 장호익이 그 뒤를 이었다. 이어 김홍진(1873~1904년)이 처형됐다. 권호선은 1903년 옥사(獄死)했다.
 
  같은 시각, 일심회원의 가족은 필사적으로 구명운동을 벌였다. 주한일본군 참모장 사이토 리키사부로(齊藤力三郞) 중좌(중령)가 나섰다. 그는 우쓰노미야 다로의 친구로 일심회원들을 동정하고 있었다. 사이토 중좌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에게 일심회원들의 구명을 간청했다. 이지용은 급히 궁궐로 들어가 고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고종은 나머지 4명을 사면했다.
 
  이들은 나중에 복권되어 대한제국 군대에서 복무하면서 한때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고, 1910년에는 나라가 망한 것이다. 고종과 순종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하던 김형섭은 나라가 망한 후에는 일본 군복을 입고 대좌까지 승진했다. 김희선(1876~1950년)은 일제하에서 군수를 지내다가 3·1운동 후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에 추대되었으나,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귀국했다.

 

 

‘역적’들을 중용한 일본

 

                                                        에노모토 다케아키

 

혁명일심회의 이야기를 길게 쓴 것은 그들의 사연이 너무 딱해서이다. ‘역적모의’를 했으니 극형(極刑)에 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을 일본의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1836~1908년)와 비교해보면 한숨이 나온다. 도쿠가와 막부의 해군 부총재(해군차관)였던 에노모토는 메이지유신에 반대해서 도쿠가와 막부의 잔당을 이끌고 홋카이도로 탈출, 하코다테에 에조(蝦夷)공화국을 세우고 총재(대통령)가 됐다. 이들의 반란은 1869년 5월에야 진압됐다.
 
  하지만 메이지정부는 역적의 수괴(首魁)인 에노모토를 사면했을 뿐 아니라, 국제법 등에 밝은 그의 식견을 높이 평가해 초대 주(駐)러시아공사, 체신·문부·외무·농상무대신으로 중용했다. 에노모토의 부하였던 하야시 다다스(林董)는 주영공사로 있으면서 영일(英日)동맹을 성사시켰고 이후 외무·체신대신을 지냈다. 갑오경장 당시 주한일본공사로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도 에노모토와 함께 하코다테까지 달아나 메이지정부에 저항했던 ‘역당(逆黨)’ 출신이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역적의 수괴까지도 중용했다. 반면에 고종의 조선은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金玉均)을 기어이 암살했고,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서둘러 혁명일심회 회원들을 처형했다. 비록 정치적 입장은 달리했다 해도 언젠가는 나라를 위해 그들을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100년 전 일본과 조선의 운명이 그렇게 엇갈린 것은 인재를 대하는 태도가 이처럼 달랐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8형제배
 

                 구한말 고급 장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왼쪽부터) 노백린, 이갑, 유동열.

 

 

  고종의 마지막 칼날을 피한 일본 육사 출신들에게는 일본군을 배경으로 잠깐이지만 ‘좋은 시절’이 왔다.
 
  구한말 무관(武官) 출신으로 1896년을 전후해 일본 육사 유학을 했던 이희두(1869~1925년), 이병무(1864~ 1926년) 같은 사람은 참령(參領·소령)-군부 과·국장급으로 있다가 불과 1~2년 사이에 장관(將官)으로 승진했다. 이희두는 후일 군부 협판(차관)을, 이병무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부대신을 지냈다. 이들은 망국 후에는 각각 일본군 소장, 중장 대우를 받았다.
 
  반면에 대한제국군 정령(正領)으로 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노백린(일본 육사11기)은 군복을 벗은 후 독립운동에 투신,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 시기에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일본 육사 15기 출신 8명이었다. 러일전쟁 발발 당시 참위(소위)급이었던 이들은 1~2년 사이에 참령~부령(副領·중령)급으로 승진, 대한제국 군부의 요소요소에 포진했다. 당시 영관급 장교는 지금보다 훨씬 위상이 높았다. 이들은 ‘8형제배(八兄弟背)’라고 불렸는데, 김기원, 김응선, 남기창, 유동열(柳東說·1879~1950년), 박두영, 박영철, 이갑(李甲·1877~1917년), 전영헌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간섭 아래에서나마 군부를 개혁해보려 노력했지만, 군대 해산과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겪으면서 길이 엇갈렸다. 김기원은 일본군 중좌, 김응선은 일본군 대좌가 됐다. 박두영과 박영철은 일제 시대 친일파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인 중추원 참의까지 올라갔다.
 
  반면에 이갑은 비밀결사 신민회 창설을 주도,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다가 망국 후에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시베리아를 떠돌면서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다가 객사(客死)했다.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李應俊·1890~1985년) 장군이 그의 사위다. 유동열도 독립운동에 투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참모총장, 군무총장을 지냈다. 그는 해방 후 미군정(美軍政) 통위부장(統衛部長·국방장관 격)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초석을 놓았으나, 6·25 때 납북(拉北)됐다.
 
 
  대한제국 생도에서 일본군 소위로
 

망국 당시 일본 육사 재학생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왼쪽부터) 김광서, 이청청, 조철호.

 

  대한제국의 유학생으로 일본 육사에 입교했다가, 재학 중 망국의 비운(悲運)을 맞은 이들도 있었다. 일본 육사 23기 김광서(金光瑞·1888~1942년)와 26기생 18명, 27기생 25명이 그들이다. 일본 육사 입학 당시에는 ‘대한제국의 유학생’이었던 이들은 임관할 때에는 ‘일본 육군 소위’가 되어야 했다.
 
  이들은 망국의 비보(悲報)를 접한 후 향후 나아갈 길을 의논했다. 당장 자퇴(自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학업을 마치고 임관한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자고 결의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약속을 지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김광서는 중위 시절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됐다. 이때부터 김경천(金擎天)이라는 가명(假名)을 썼는데 신팔균(申八均·1882~1924년), 이청천(李靑天·1888~1957년)과 함께 ‘남만(南滿) 3천’이라고 일컬어졌다. 김광서는 이후 러시아로 무대를 옮겼다. 러시아혁명 후 그는 볼셰비키 적위군(赤軍) 편에 서서 빨치산을 이끌고 시베리아를 침공한 일본군 및 백군(白軍·반혁명군)과 싸웠다. 러시아내전이 끝난 후 김광서는 무장독립투쟁을 이어갈 방법을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는 1935년 반혁명분자로 체포되어 1942년 강제수용소에서 아사(餓死)했다. 김광서가 ‘진짜 김일성 장군’이라는 설도 있다. 이기동 교수는 김광서에 대해 이 책의 한 장(章)을 할애했다.
 
  26기생 중에서는 이청천과 조철호(趙喆鎬·1890~1941년)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청천은 3·1운동 후 김광서와 함께 망명, 만주·시베리아·중국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예하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건국 후 초대 내각에 무임소장관으로 입각했으나, 이후 야당으로 돌아서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조철호는 일본군 중위로 옷을 벗은 후 평북 오산학교・중앙고보 교사로 있으면서 3·1운동 및 6·10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22년 조선소년군을 창설, 보이스카우트운동의 선구자가 됐다.
 
  제27기생 가운데는 이종혁(李種赫·1892~1935년)과 이동훈(李東勛·1890~1920년)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종혁은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마덕창이라는 가명으로 육군주만참의부 군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년간 복역한 후 석방됐으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얻은 병으로 사망했다. 선우휘 전 《조선일보》 주필은 그의 삶을 다룬 소설 〈마덕창대인〉을 썼다. 이동훈은 평양 광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이끌고 3·1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상하이로 탈출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했다.
 
 
 

 

홍사익
 

                                                              홍사익

 

반면에 26기생 이응준, 김준원(1888~1969년), 박승훈(1890~1963년), 신태영(申泰英·1891~1959년), 안병범(1890~1950년), 유승렬(1893~1958년), 이대영(1892~1976년), 이응준 등은 일본군 소좌~대좌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은 후 국군 창설에 참여해 장군이 됐다. 신태영은 국방부 장관, 이응준은 육군참모총장·체신부 장관을 지냈다. 6·25 당시 육군 대령이던 안병범은 서울이 공산군에게 함락되자 인왕산에 올라가 할복 자결했다. 사후(死後)에 육군 준장으로 추서(追敍)됐다.
 
  26기생 가운데 특기(特記)할 인물은 홍사익(洪思翊·1889~1946년)이다. 그는 구한말 고급 장교나 왕공족(王公族)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의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을 나와 일본군 육군 중장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조선인인 그에게 야전 지휘관 자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주로 후방의 교육기관이나 조사기관에 근무했던 그는 필리핀의 포로수용소장으로 패전을 맞았다. 전후(戰後) 그는 포로수용소에서의 포로 학대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돼 전범(戰犯)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홍사익은 중국 근무 시절 임시정부로 탈출하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일본군 내에서 최고위직에 있는 자신이 탈출하면 일본군 내에 있는 조선인들의 처지가 곤란해질 것을 걱정해 이를 마다했다고 한다. 일본군 장성까지 올라갔던 그의 실력을 아까워한 국내 인사들은 존 하지 미군정사령관에게 그의 구명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기동 교수는 홍사익에게도 이 책의 한 장을 할애했다.
 
  27기생 가운데는 김석원(金錫源· 1893~1978년), 백홍석(1889~1960년)이 일본군 중좌까지 올랐다가 해방 후 국군에 참여, 별을 달았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전선에서 무명(武名)을 떨쳤던 김석원은 6·25 때는 제1사단장, 3사단장, 수도사단장으로 활약했다. 성남중·고등학교의 설립자로 유명하다.
 
 
  20여 년 만에 재개된 육사 입학
 

                                  1930년대 일본 육사 진학의 물꼬를 튼 채병덕(왼쪽)과 이종찬

 

 

  한일합병 후 한국인들의 일본 육사 진학은 한동안 중단됐다. 그러다가 1928년 일본 육사 44기로 입교한 이형석(1909~1991년)을 시작으로 다시 한국인이 육사에 입교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미 식민통치가 20년을 경과한데다가 대륙 침략으로 인적 자원이 더 필요해질 경우에 대비, 조선인 징병의 전 단계로 먼저 장교 임용을 시작한 것일 것이다. 이기동 교수는 1930년대 이후 육사에 입교한 이들의 이야기를 ‘계림회 시말기’라는 제목 아래 소개하고 있다. 계림회는 일본 육사 재학 시절 조선 출신 생도들의 친목 모임을 말한다.
 
  1933년에는 채병덕(蔡秉德· 1915~1950년)과 이종찬(李鍾贊· 1916~1983년)이 49기로 입교했다. 이들은 일본군 소좌로 해방을 맞았다. 건국 후 채병덕은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제2·4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지만 6·25 초기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해임됐다. 그는 그해 7월 하동전선에서 전사(戰死)했다. 이종찬은 제6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던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군대를 동원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맞서다가 해임됐다. 4·19 후 허정 과도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그는 ‘참군인’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한국인들의 육사 진학은 계속됐다. 이들 가운데는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李亨根· 1920~2002년), 공군참모총장·국방부 장관·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김정렬(金貞烈·1917~1992년), 국방부 장관을 지낸 유재흥(劉載興·1921~2011년) 등 수많은 장성이 배출됐다.
 
 
  ‘친일파’
 
  이들을 오늘날 일각에서는 ‘친일파’라고 부른다. 그들은 홍안(紅顔)의 소년으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가 군대가 해산되는 바람에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육사에 입교했다가 일제 35년간 일본 군복을 입고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초로(初老)의 나이에 해방을 맞은 후 신생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 6·25 때는 나라를 지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형석·채병덕·이종찬 이후의 육사 출신자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조국’이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들에게 육사 진학의 길이 열렸다. 그리고 20대 중반 혹은 30대 초반이 되었을 때, 해방을 맞이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본 육사 재학 중에도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正體性)을 고민했다. 육사 재학 시절 이들이 친목 모임의 이름을 ‘계림회’라고 했던 것은 그런 고민의 소산이었다. 해방 후에 이종찬 같은 이들은 일본군 경력을 가진 자신들이 신생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해 군에 투신하는 것을 상당 기간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으로 공산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켰고, 군복을 벗은 후에는 여러 자리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
 
  그들을 ‘친일파’라고 낙인찍는 것은 ‘후세에 태어난 행운’을 누리는 자들의 교만치고는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닐까? 그들이 김일성이나 김원봉보다 더 대한민국에 죄를 지었나? 젊어서 몇 년간 일본 군복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이후 대한민국을 지키고 일으키는 데 이바지했다면 전비(前非)는 상쇄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비극의 군인들’ 아닐까?
 
  저자는 이들의 삶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삶과 시대적 배경을 담담하게 보여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역사 속의 개인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고종의 誤判
 
  원래 이 책의 초판 부제는 ‘일본 육사 출신의 역사’였지만, 개정증보판의 부제는 ‘근대 한일관계사의 비록’으로 바뀌었다. 이는 제3장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의 분량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초판에서는 일본 육사 11기 출신으로 고종과 순종의 시종무관을 지낸 어담의 회고록을 중심으로 을사늑약~경술국치 사이의 비화를 소개했었다. 이기동 교수는 개정증보판에서 고종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치열한 줄다리기, 같은 친일파인 이완용과 송병준 및 일진회 간의 매국(賣國) 경쟁, 헤이그 밀사 사건의 내막 등을 크게 보완했다.
 
  이기동 교수는 이 책에서 고종을 망국으로 가는 길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쓴 것으로 묘사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고종이 얼마나 정세에 어두운 사람이었는지가 드러난다. 예컨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후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가 탁지부(재무부) 고문으로 와서 ‘재정개혁’을 명분으로 황실재정을 압박하자, 고종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최고고문으로 초빙하려고 공작한다. 그러다가 을사늑약 후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 국정을 좌지우지하자 이번에는 그를 견제하려고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조선주차군 사령관,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郎) 참모총장 등 조슈(長州) 군벌에게 접근한다. 그 당시 상황에서 조슈 군벌의 조기(早期)합병론에 반대하고 있던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인데, 완전히 번지수를 거꾸로 짚은 것이다. 고종은 힘이 되어주겠다는 하세가와의 다짐에 희희낙락하고, 고다마는 고종이 보내온 밀서를 읽으면서 실소(失笑)를 머금는다.
 
 
  ‘고종, 知的이지만 어리석어’
 

                                                                  고종

 

 

  국사학계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고종을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했던 ‘계몽전제군주’라고 미화(美化)해왔다. 하지만 당대인들의 눈에 비친 고종의 모습은 다르다. 1907년 당시 주한 영국총영사였던 헨리 코번은 에드워드 그레이 영국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황제에 대한 수수께끼는 그처럼 지적(知的)인 사람이 어째서 그토록 어리석게 행동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황제를 잘 알고 있는 많은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꾸밈없는 정중함, 그리고 점잖은 태도 등은 의심할 바가 없다. … 황제가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을 식별해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정(失政)을 저지르게 된다.”
 
  반면에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조지 케넌(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주장했던 외교관 조지 F. 케넌의 집안 아저씨)은 이렇게 말했다.
 
  “고종 황제가 한국인 특유의 음모성을 갖고 있는데다가 너무나도 무신경하며, 남아프리카의 보어인(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인의 후예-기자 주)처럼 집요하다. 또한 황제는 중국인처럼 몽매하고, 아프리카의 호텐토트인처럼 허영심에 가득 차 있다.”
 
  케넌이 일본에 포섭된 인물이었다고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다. 윤치호의 평도 인상적이다.
 
  “황제는 개인적으로는 온화했으나, 대중적으로는 신망을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영국의 찰스1세를 닮았다.”
 
  “나쁜 성격과 좋은 자질을 함께 지니고 있는 전하는 역사에 잘 알려진 한 영국 국왕(찰스1세-기자 주)을 생각나게 한다.”
 
 
  조약 체결 일주일 후에 합병 발표한 이유
 
  한일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체결됐지만 8월 29일에 정식으로 공표됐다. 조선의 망국 과정을 유심히 관찰했던 중국 지식인 량치차오(梁啓超)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기가 막히다. ‘한국 정부가 8월 27일로 예정된 순종 황제의 즉위 3주년 기념행사를 꼭 거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일본 측에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량치차오는 조선이 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조선을 망하게 한 자는 최초에는 중국인이었고, 이어서 러시아인이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일본인이었다. 그렇지만 중국·러시아·일본인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스스로 망한 것이다.”
 
  고종이 개화의 역군으로 키우겠다며 일본으로 유학 보냈던 청년 장교들을 그렇게 기를 쓰고 핍박하고 죽였던 것을 생각하면, 량치차오의 지적에 이의(異議)를 제기하기 어렵다.
 
  책을 덮으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오늘날 우리는 100여 년 전의 못난 조상들보다 얼마나 나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람의 장점을 보기보다는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는 식의 주장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 100여 년 전 고종을 탓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망국과 해방과 건국의 달 8월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월간조선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조선일보 2021,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