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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무부대장 김창룡 口述 회고록 ①

해암도 2022. 1. 10. 06:15

“공산주의와 싸우지 않은 날은 과거 나의 생활에 있어서 하루도 없었다”

 
 
 

⊙ 1954~1955년경 대학 출신 특무부대원들에게 口述
⊙ 1940년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 투입… 1941년 관동군 편입 후 특수 임무 띠고 蘇滿국경 하이라루(하이라얼)로 파견
⊙ 거지 행세하며 3개월간 중국인 공산 스파이에 대한 정보 수집
⊙ 싸구려 중국 여관에 투숙, 거기서 만난 중국인의 정체는?

[편집자 주]
2022년 1월 30일은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金昌龍·1916~1956) 소장(少將·사후 중장 추서)이 암살을 당한 지 66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그는 육군 수뇌부의 부패 의혹을 수사하다가 함경도 군맥(軍脈)의 사주(使嗾)를 받은 허태영 대령 등에 의해 피살됐다.


1960년 4·19 이후 그의 이름은 부정적 일변도로 기억됐다. 자유당 정권 시절 야당의 맥을 이은 민주당·신민당 계열의 정치인들은 그를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충복(忠僕)으로 기억했다. 군(軍) 출신 인사 가운데서도 군부(軍部) 내의 대전복(對顚覆) 업무를 담당하면서 인사(人事)에 영향을 미치던 특무부대(이후 육군방첩부대-육군보안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 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대한 껄끄러운 기억 때문에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그를 가장 미워한 것은 좌익 세력이었다. 김창룡 장군이 1948년 여순반란사건 후 숙군(肅軍)의 주역이었고, 이후 공비(共匪)소탕 등에서 역량을 발휘한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좌익 세력은 김창룡 장군의 관동군 복무 경력을 문제 삼아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를 파묘(破墓)해야 한다고 선동해왔다. 대한민국의 공안 기관 종사자들을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로 매도해온 자들에게 장군은 ‘공적(公敵) 1호’였다.
하지만 1950년대 당시의 기록을 보면 흥미롭다. 김창룡 장군을 아들처럼 생각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피살 소식을 접하고 “나라가 망했군! 나라가 망했어! 그런 애국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나?”라고 비통해했다. 이 대통령은 잠옷 바람으로 병원으로 달려가 그의 죽음을 확인했다.


이승만 정권과 대척점(對蹠點)에 있던 《동아일보》는 1956년 2월 1일 자(字)에 ‘김창룡 중장의 순직을 애도함’이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이 사설은 “김창룡 장군이 우리의 해방 후, 더군다나 전쟁 후에 세운 공적은 여기에 엄숙히 말할 필요조차 없이 짐작하고도 남는다”며 “그의 민첩한 지혜와 전력성은 대외적으로 적에게 두려움을 주어 항시 전전긍긍케 한 바 있었으니 오늘의 방첩전의 철칭을 자랑하게 된 것도 그의 진두지휘 위력의 소치일 것이다”라고 했다. 사설은 “그 저격자가 공산적의 오열(五列)분자였는지 혹은 우리의 동포 중에서 이단자의 소행이었는지 이를 분간할 수 없는 형세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김창룡 장군은 공산적이 무서워하는 우리의 특무부대장이요, 국내적으로는 정적의 반역자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무부대사》를 편찬하는 데 참여했고, 《대한민국 특무부대장 김창룡》을 쓴 이대인 선생은 가장 훌륭했던 역대 사령관으로 김창룡(제5대), 강창성(제17대), 임재문(제31대) 세 사람을 꼽았다.


《월간조선》은 김창룡 장군이 생전에 남긴 구술(口述) 회고록 원고 가운데 일부를 유족으로부터 입수했다. 이대인 선생은 이 구술 회고록에 대해 “작성 시기는 1954~1955년경으로 추정되며, 당시 대학 영문학과 및 국문학과 출신 특무부대원들에게 구술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원고를 보면 과거 TV에서 방영했던 〈113수사본부〉 같은 대공(對共)수사물이나 첩보영화를 보는 것 같다.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는 것’이 그의 유일한 인생의 목적이요, 낙(樂)이요, 보람이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구술 회고록의 내용 가운데 일부는 《대한민국 특무부대장 김창룡》 등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으나, 구술 회고록의 존재나 그 내용은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월간조선》은 이 회고록이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 1월호부터 〈특무부대장 김창룡 구술 회고록〉이라는 제목으로 발췌, 연재하고자 한다. 원고는 대체로 정자체(正字體)로 정서되어 있으나 상당히 흘려 쓴 것도 있어 지명(地名)이나 인명(人名)에서 일부 착오가 있을 수 있다. 미리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표현은 최대한 원문의 것을 따랐으나, 일부는 현대어에 맞게 고쳤다. 큰 제목은 원문대로이며, 필요할 경우 편집자가 중간 제목을 붙였다.

  〈倭軍에의 從軍〉
 
  과거를 추억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괴로운 일인 동시에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과거 속에서 아름다움이란 것을 그리 찾아낼 수가 없다. 그 대신 쓰라리고 가시덤불 같은 험한 과거만을 회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될 수만 있으면 과거를 추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철이 든 뒤부터 오늘까지 나는 공산주의와의 싸움으로써 나의 역사를 이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과거는 복잡하고도 다난한 것이었다. 공산주의와 싸우지 않은 날은 과거 나의 생활에 있어서 하루도 없었다. 그런 만큼 복잡하고 다난한 과거라 해도 공산주의와 싸웠다는 점에서는 단순하다고도 말할 수 있으며 연결성이 있는 하루하루였다고도 할 수 있다. 운명이라고 하면 운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사회에 발을 들여놓는 날부터 오늘까지 공산주의와 싸운 이야기 이외에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운명이 시작된 것은 4273년[단기(檀紀) 4273년=1940년. 편집자 주] 1월부터였다. 나는 본의 아니나마 일본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중일전쟁의 싸움터 중국으로 끌려가 남경(南京), 무창(武昌), 한구(漢口)를 거쳐 영수(永修)에 이르러 다시 노산(盧山)을 지나 안의(安義)로 전전하며 죽음의 산악지대를 헤매었다.
 
  비참한 종군이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고난과 고난의 계속이었다. 정신적으로 그러했고 육체적으로도 그러했다. 만약 좀 더 계속하기만 했다면 나는 뛰쳐나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참한 전사를 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싸우라는 운명이 미리부터 준비되어 있었는지 종군한 지 만 1년 되는 날 나는 뜻밖에도 관동군(關東軍)으로 편입되었다. 관동군으로 편입되는 동시에 특수지대인 쏘만국경(蘇滿國境) 하이라루[海拉爾·중국 내몽골자치구 후룬베이얼(呼倫貝爾)시의 일부. 현행 표기법에 의하면 ‘하이라얼’이나, 구술 회고록에는 ‘하이라루’로 되어 있음-편집자 주]로 배속되었다.
 
  쏘련과 인접해 있는 이 국경지대로 보낸 것은 또한 특수한 사명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 특수한 사명이란 말할 것 없이 공산주의와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비록 왜군에 소속되었다 할지라도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 나의 생리에 들어맞았는지 나는 그 머나먼 국경지대로 부임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와의 투쟁은 여기에서 벌어졌으며 나와 공산주의와의 숙명적 역사는 여기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하이라루의 첫날 밤〉
 

                특무부대장 시절의 김창룡.

 

쏘만국경 하이라루! 하이라루의 정월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추위가 심하다. 산과 나무, 들 할 것 없이 흰 눈에 덮이었다. 한번 내리면 녹을 줄 모르는 눈은 땅 위에서 바위처럼 단단하게 얼어붙는다. 돌담도 얼어붙었고 집집의 벽까지 얼어붙어 있다.
 
  거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는 바람이 불어온다. 시베리아(西伯利亞)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사람까지 땅 위에 얼어붙게 하려는 듯이 모질게 불어오는 바람이다. 바늘구멍만 한 틈만 있어도 그 매운바람은 칼날같이 스며들어 여미라고 한다.
 
  나는 방한복에 방한모를 쓰고 방한화까지 신고 있으나 온몸이 얼어드는 것을 느꼈다. 노출된 곳이란 눈과 코밖에 없다. 그러나 눈두덩이 얼어서 뻣뻣한 것 같고 눈알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눈썹이 하얀 서리를 맞은 것처럼 입김이 얼어붙었다. 뺨은 얼음이 들어박힌 것처럼 근육이 움직이지 않았다.
 
  특수 사명을 띠고 하이라루에 내리기는 했지만 견딜 수 없는 추위에 나는 그저 아연할 따름이었다. 그러한 곳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아무리 특수 사명을 가지었다 하기로서니 이런 곳이 아니면 그 사명을 다할 곳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나의 기구한 운명을 자탄해보기도 했다.
 
  고향에서 떨어지기 수천 리다. 아시아 가운데서도 가장 먼 북쪽 맨 끝이었다. 서글프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도 청춘이 있으련만 아름다워야 할 그 청춘을 얼음과 같은 쏘만국경에서 썩히다니….
 
  혼자서 자탄을 하며 거리를 거닐 때였다. 나는 문득 추위에 떨며 지나가는 늙은 백계노인[白系露人·1917년 공산혁명 후 러시아를 떠난 제정(帝政) 지지자들-편집자 주]을 보았다. 허름한 오바(외투-편집자 주)를 입고 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늙은 노파였다. 한 손에는 조그마한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먹을 것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노파를 보자 나는 갑자기 내 마음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자기 나라를 가지고도 자기 나라에서 살지를 못하고 쫓겨 다니는 불쌍한 족속- 더구나 쫓겨 다니는 백계노인들 그 대부분이 옛날에 귀족들이라는 생각을 할 때 조국을 등진 그 노파의 처참한 모습이 나의 가슴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같은 민족이건만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국토 내에 살지도 못하게 하는 적색 로서아(러시아-편집자 주)의 야만성이 하나의 증오로 변하여 나의 마음을 긴장케 했다.
 
  만주뿐만이 아니라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해서 쫓겨난 백계노인은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내 고향에서도 손풍금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구걸하고 다니던 백계노인을 본 일이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감히 행하고 있다. 같은 피를 받은 동족에게까지 그러한 참혹한 행동을 감행하는 공산주의자인 만큼 그들은 세계 모든 인류에 대하여도 잔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로서아는 강국이 되어 그 세력을 세계에 뻗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만약 세계가 공산주의화 된다면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도 모르고 공산주의가 좋다고 날뛰는 자가 없지 않다.
 
  나는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서면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쏘련의 국경 저 너머를 생각해보았다. 수많은 백성이 공산주의자들의 눈을 피해가며 숨도 마음대로 못 쉬며 살아가고 있을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조금만 협력지 않는다 해도 뒤를 밟아가 잡아 죽이는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 가슴을 졸이며 공포를 밥 먹듯 먹으며 사는 가련한 백성들!
 
  그러나 그 공포는 시베리아의 무서운 바람과 같이 아시아로 불어오려고 하고 있다. 하이라루 사람들을 떨게 하는 시베리아 찬바람처럼 공산주의의 공포가 언제 그들을 떨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얼어붙은 듯 호흡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얼어붙은 하이라루의 밤거리를. 그리고 내일부터라도 시작될 나의 사명을 생각했다. 시베리아 바람이 내 살과 뼈를 예리가는(의미 불명-편집자 주) 한이 있다 해도 나는 나의 사명을 다하리라 결심했다.
 
  만주 어떤 곳이라도 우리의 동족은 살고 있다. 고향을 등지지 않을 수 없어 낯설고 물선 타향으로 흘러 흘러가는 불서러운 동족들! 그 동족들을 생각할 때 나의 괴롬쯤 문제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이라루에도 동족이 살고 있으리라. 물이 흐르고 빈 땅만 있으면 찾아드는 민족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생명을 유지하고 민족성을 잊지 않으려는 강인한 민족이 아닌가!
 
  나는 한두 사람만이라도 우리의 동족이 하이라루에 살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동족의 얼굴만 보아도 즐거울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하게 한 사람의 동족도 살지 않는다면…. 그래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내가 맡은 적색주의 타도의 특수사명을 수행하고야 말 것이다. 어둠 속과 같은 하이라루의 첫날 밤은 자꾸만 깊어갔다.
 
 
  〈3년간의 중국인 뽀이 생활〉
 
  쏘만국경을 중심으로 한 북만 일대에는 쏘련으로부터 들어온 밀정과 그들의 앞잡이가 쭉 깔려 있었다.
 
  하이라루, 만주리(滿洲里), 베레하(불명-편집자 주), 크귀퉈어(불명-편집자 주), 찌라린(吉拉林), 치책(불명-편집자 주) 일대에는 쏘련인과 중국인 스파이들이 눈부신 암약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쏘련은 언제나 외국의 침략과 붕괴를 계획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외국의 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간첩행위를 하고 있다. 더구나 하이라루는 쏘련의 국경과 인접해 있는 관계로 연락이 편리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간첩과 그 앞잡이들이 더욱 많았었다. 더구나 국가적인 사업으로 계획적인 간첩행위를 하는데는 그 교묘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누가 간첩이고 누가 간첩이 아닌지를 분간하기가 힘들 만큼 그들은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하이라루는 국제공산당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지만 좀처럼 그 정체를 밝힐 수가 없었다. 나는 쏘련의 간첩들을 내사하는 특수 사명을 띠고 하이라루에 도착했지만 한 달이 지나는 동안 아무런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한 임무를 처음으로 맡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한 달 동안을 아무 수확 없이 지냈다.
 
  나는 나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거지로 가장했다. 일부러 세수도 하지 않고 옷도 허름한 것만을 입은 뒤 구걸하기 위하여 거리를 헤매는 것처럼 가장했던 것이다.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하이라루에서 하는 일도 없이 지낸다고 하면 도리어 의심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쏘련 스파이들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그들과 접촉할 기회가 없을 것이며 따라서 나의 임무는 조금의 성과도 올리지 못할 것이다. 한국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면 특히 눈에 뜨일 것 같아 거지 행색을 하고 다니느라 그 고생과 쓰라림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매일처럼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였다. 어떤 거리를 지나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귀에 익은 한국 노래가 들려왔다. 나는 귀를 기울이고 노랫소리가 나는 데로 발을 옮기었다. 참으로 즐거웠다. 가슴이 뛰도록 즐거웠다. 즐거운 것만이 아니라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한국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한국 노래를 듣다니…. 만주에서도 제일 북쪽인 하이라루에서 동포를 만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감격적이었다.
 
  노랫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까이 갔을 때 나는 손목을 잡고 노래 부르고 있는 한국 소년 소녀 삼사 명을 발견했다. 그들이 어디서 출생하여 어디서 성장했는지 모르나 나의 눈에는 보지도 못한 고향을 그리면서 부르는 노래같이만 보이었다. 구경도 못 한 고향! 그러나 끝까지 그리워하다가 죽을 고향!
 
  그러한 고향을 그리며 부르는 소년 소녀들의 노랫소리는 내 가슴이 터질 만큼 벅차게 했다. 나는 그 애들을 쓸어안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자기들보다도 더 비참한 거지다. 안아준다고 해도 반가워해 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내가 어린애들에게 접촉했다가 가짜 거지라는 것이 탄로되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다. 나는 어린애들의 부모라도 찾아볼 생각을 했으나 그것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나는 나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그리운 동포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오직 쏘련 스파이의 탐색에만 정신을 기울이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2월도 어느덧 지나갔다.
 
  3월이 왔다. 고향 같으면 푸른 움이 돋기 시작할 봄이다. 그러나 하이라루의 3월은 고향의 삼동보다도 추웠다. 함박눈이 내렸고 무서운 찬바람이 국경을 넘어 불어왔다.
 
  3월도 거의 지나가는 어떤 날이었다. 나는 이상한 정보 하나를 입수했다. 그것은 지극히 간단한 이야기였지만 나에게는 중대한 사실이었다. 즉 시내 동대가(東大街)에 있는 조그마한 중국 여관 푸싱잔(福興棧) 부근에서 사십 넘은 어떤 중국인이 쏘련과 무전(無電) 연락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야말로 나의 활동을 할 때가 온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보를 입수하자 나는 푸싱잔 근처를 중심 삼아 수상한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거지 행색을 하며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했고 이상한 사람의 뒤를 따라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인상을 전혀 모르는 만큼 막연한 수색으로 스파이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며칠 동안 아무런 단서도 얻지를 못하고 헤매기만 하다가 4월 5일에는 푸싱잔에서 투숙(投宿)할 것을 결심했다. 스파이 가까이에 살며 스파이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중국 여관인 푸싱잔으로 들어가 방 하나를 얻었다. 중국 여관 가운데도 삼류 이하인 이 여관의 숙박비는 하루에 3전밖에 안 되었다. 거지 행세를 하면서도 능히 머물 수 있었다. 또 남에게 의심을 받지 않으며 들어 있을 수가 있었다. 손님도 과히 많지 않은 데다가 유숙하는 손님도 거의가 노동자 비슷한 하류 계급이었기 때문에 거지 행세하는 나라 할지라도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방이 불을 때기는 했지만 그리 덥지가 않았기 때문에 손님들은 큰방으로 모여 거기 있는 페치카(러시아식 벽난로-편집자 주)에서 몸을 녹이기 일쑤였다. 나도 저녁만 먹으면 사양할 것 없이 페치카 있는 방으로 가서 다른 손님들과 잡담을 주고받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어떤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계획적인 생각도 없지 않았다. 사실 중대한 사건의 단서라는 것은 뜻하지 않았던 잡담 가운데서 튀어나오는 수가 많다.
 
  나는 시간만 나면 사람이 모이는 페치카 옆으로 가서 그들이 주고받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여관 근처에 있다는 스파이 동정을 살피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페치카 옆에서 어떤 중국인과 이상한 시선이 맞부딪쳤다. 사십은 훨씬 넘었으나 오십이 채 못 되어 보이는 그 중국인은 점잖아 보이기는 했으나 움푹 들어간 두 눈의 광채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육감이 이 사람이야말로 정보로 들어온 쏘련의 스파이라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것이라든가 그러면서도 어딘가 무엇을 감추려는 듯한 태도는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능히 알 수 있게 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던 바로 그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침착하였다.
 
  그는 나에게 성명이 무엇이며 어디서 어떻게 왔느냐는 것을 가장 동정하는 태도로 물었다. 나는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묻는 것만을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과 접촉할 기회만 오기를 기다렸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과 접촉을 해야만 그의 정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먼저 말을 붙여보고 싶기도 했지만 잘못하다가는 눈치를 챌 염려가 있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기만 했다.
 
  그날은 그대로 헤어지고 다음 날 저녁 다시 페치카 옆으로 갔을 때였다. 그날은 공교롭게 그 사람과 나 외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단 두 사람만이 있게 되니까 상대방에서도 나라는 존재를 알아보고 싶었는지 우리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소?”
 
  “사과 장사를 해볼까 해서 좀 가져왔더니 어떻게나 추운지 전부 얼어버리고 말아 망했는데요. 남의 말만 듣고 왔다가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에도 못 돌아가고 있는가요?” “그렇습니다. 남의 돈을 돌려서 사과를 사가지고 왔댔는데 이 꼴을 하고야 어떻게 고향엘 갑니까? 빚도 물 수 없고요.”
 
  “참 안됐군요. 만주에서 제일 추운 것도 모르고 사과 가지고 오다니. 사과야 얼기만 하면 썩어버리는 것이니 참 큰 실패를 보았군요.”
 
  “기막힌 이야긴 다 할 수도 없습니다.”
 
  “중국엔 얼마나 있었는데 중국말을 그렇게 잘합니까.”
 
  “고향이 신의주라 어릴 때부터 중국 사람과 놀았습니다. 국경지대니까 중국말이야 배우지 않아도 알지요.”
 
  나는 내 고향을 속이고 말았다. 즉 내 고향은 신의주가 아니라 함흥(咸興)이다. 그러나 중국어 배운 이야기를 사실대로 하기 시작하면 적에게 나의 정체가 드러날 우려가 있었다.
 
  상대는 내 말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라고 물었다.
 
  중요한 질문이었다. 대답 한마디로 내가 의심을 살 수도 있으며 그 반대로 상대방과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다.
 
  “이 꼴을 하고야 고향에도 돌아갈 수가 없고 큰일 났습니다. 여관비도 간들하는데 생각할수록 앞이 캄캄합니다.”
 
  나는 이렇게 그 중국인의 동정을 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중국인의 의심 많은 성격은 그렇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남을 깊이 경계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대방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이삼일이 지나도 별다른 눈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로 그 사람의 옆을 따르며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내 임무의 중대한 포인트를 가진 그 사람을 놓칠 수는 절대 없는 일이었다.
 
  이삼일이 지난 뒤에야 상대방이 “그래 지금도 장사할 생각이 있소?”라고 물었다. “장사가 배운 재간이니 안 할 수가 있나요.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도 돈을 벌어야겠는데 할 장사가 있어야지요. 밑천도 없고. 오도 가도 못 하고 죽게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밑천을 좀 대줄까?”
 
  “농담 마십시오. 뭘 보고 나한테 돈을 줍니까?”
 
  “아니오. 며칠 두고 봤는데 노형은 능히 믿을 만한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한번 장사를 해보시오.”
 
  “고맙습니다. 저를 그렇게까지 봐주시고.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단돈 오십원도 못 가진 제가 어떻게 선생님과 같이 장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오. 나도 가진 돈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가지고 있다가는 통째로 썩어질 것 같아 장사를 해볼까 했는데 같이할 사람이 없어서 망설이던 참이니까 아무 장사라도 시작합시다.”
 
  “그럼 제가 심부름이라도 해드리지요.”
 
  나는 겸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고맙다는 뜻을 표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열흘 동안의 여관비 삼십전을 치르고 나와 그 중국인과 같이 상점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도 나를 어지간히 신용한 모양이었다. 자기와 같이 살면서 상점을 시작하자는 것도 완전한 신뢰감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돈이 없는 관계로 나는 그 중국인 밑에서 뽀이 노릇을 하게 되었다. 거지에서 많이 승격한 셈이기는 했지만 내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뽀이도 사양할 수 없었다.
 
  이렇게 뽀이로서 일을 보며 그 중국인의 스파이 행동을 포착하는 데 나는 만 3년이 걸렸다. 말하자면 나는 중국인 뽀이로서 삼년 동안을 살아온 것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월간조선.    정리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