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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장문의 평가가 한국 비석의 독특함이죠”

해암도 2021. 6. 24. 05:55

[짬] 고려대 심경호 명예교수

영화를 좋아해 요즘도 아이패드로 일주일에 한 편은 본다는 심 교수는 “지금은 한문학을 버려야 한다는 김태준 생각에 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를 지나치게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석비문을 보면 감탄할 수밖에 없어요. 일본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우리 비문을 많이 가져간 것도 그 때문이죠.” 강성만 선임기자

 

“고려대 앞에 ‘바르게 살자’ 비석이 있더군요. 요즘은 참 비석을 쉽게 세웁니다. 허허.”

심경호(66) 고려대 한문학과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한국의 석비문과 비지문>(일조각)은 보통 책보다 큰 판형(크라운판 변형)에 천 쪽 가까운 벽돌책이다. 교정에만 2년 걸렸다는 이 책은 광개토대왕 비문부터 조선 사대부 묘비까지 선인들이 돌에 새긴 글을 두루 살펴 그 문학적 특성과 역사성을 파고들었다.

 

기공비나 전승비처럼 국가나 개인, 집단이 힘을 드러내고 이념을 선전하는 비석이 석비라면, 비지는 한 인물의 삶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묘비 혹은 묘역에 묻는 묘지를 말한다. 일본 교토대에 있는 <금석집첩>(18세기에 김재로와 그의 후손들이 석비와 묘비 탁본 2천여 점을 수록해 엮은 <금석집첩>과 <금석속첩>의 통칭)을 저자가 3년 동안 열람하고 기존 판독문과 문집 글 등을 활용해 집필했단다.

올해 초 정년 퇴임한 저자는 지난 4월에는 그림으로 중국 명·청 시대 예술과 사회사를 조망한 <도성행락-명청 문인의 화상 제영>(고려대 출판문화원)을 번역 출간했다. 이 책도 900쪽이 넘는다. 그는 올해 이런 벽돌책을 서너권 더 낸다. “한국의 호를 주제로 책이 곧 나옵니다. 이황 호가 왜 퇴계인지 그런 질문에 답을 합니다. 1200쪽 정도 됩니다. 정조의 학문 방법론을 다룬 책도 두 권 나옵니다. 이 책도 합치면 천 쪽이죠.”

<한국의 석비문과 비지문> 표지.

 

지난 18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교정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정년 이후 삶을 묻는 말에 “이제야 체계적인 저술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답했다.

심 교수는 그동안 약 25권의 단독 저술과 30종 가까운 번역서를 냈다. 2018년과 2019년에는 <김삿갓 한시>와 <안평-몽유도원도와 영혼의 빛>으로 김달진문학상(학술평론 부문)과 월봉저작상을 잇달아 받았다. 이렇게 맹렬하게 읽고 쓰지만 그는 20대 중반 이후 한쪽 눈으로만 책을 본다.

 

서울대 국문학과 대학원 시절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10년 전에는 11시간 가까이 뇌종양 수술을 받아 오른쪽 귀 청력도 떨어졌단다. “수술 전에는 더는 책을 못 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수술 뒤에 의사가 안경을 써도 된다고 해요. 다행이었죠. 제가 (서울대 국문학과) 학부 때부터 천태산인 김태준(1905~1949)이 쓴 조선 한문학 결산보고서를 보완하는 책을 내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수술이 끝나고 이제라도 서두르자고 생각했죠. 안 되면 김태준 책 주석서라도 내자고요. 눈이 보일 때까지 읽고 써야죠.”

김태준 <조선한문학사> 표지.

 

해방 공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처형당한 김태준이 1931년에 낸 <조선한문학사>는 심 교수가 한문학의 영토로 첫발을 떼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단다. “대학 다닐 때 김태준을 좋아했는데, 그가 쓴 <조선한문학사>는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가 조선 한문학은 골동품이니 없애야 한다며 서둘러 결산보고서를 쓰겠다는 생각으로 낸 책입니다. 하지만 김태준이 자료를 본 게 별로 없었고 일제 연구 틀에서도 벗어나지 못했어요. 조선 시대를 부정적으로 보고 고려 시대를 우월하게 서술한 게 단적인 예이죠. 근거도 없이요. 그때 한문은 싫었지만 저라도 공부해 이 책을 완벽하게 보완하자고 생각했죠.”

그는 이 목표의 중단 단계로 2013년에 <한국 한문기초학사>(전 3권, 태학사)를 냈다. 모두 2500쪽 가까운 이 저작에는 고조선부터 조선 후기까지 한문학에 관한 거의 모든 기초 정보가 담겼다.

이번에 낸 <한국의 석비문과 묘지문>도 필생의 꿈인 한국한문학사 서술로 가는 징검다리란다. 3년 뒤에는 과거 시험 문제의 문체나 사상,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다룬 학술 총서를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연구자들과 함께 낼 계획이다. 그는 퇴임 전 4년 동안 소장으로 이 연구소를 이끌었다. “한국 한문학사는 토대가 되는 다른 연구들을 다 정리한 뒤에 쓰려고요. 교육과 사상 체계를 보여주는 과거 연구를 일단락하면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화제를 이번 책으로 돌렸다. 왜 비석일까? “지금까지 문학이라면 대개 책에 쓰인 것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문학은 종이에만 있지 않아요. 과거 시험 같은 제도나 비문에도 있어요. <전태일 평전>이 훌륭한 문학이듯 한 개인의 삶이 담긴 비문도 문학입니다.” 그는 돌에 새긴 게 종이 글보다 문학적으로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비문은 마지막에 시(명)가 들어가 짓기 까다롭고 국가나 집안, 종파의 정통을 세우는 글이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어요. 퇴계 같은 초일류 문장가가 썼죠. 제사 때 쓰는 제문이나 상량문도 시가 들어갑니다. 한시는 당대 문화 권력자인 특수한 사람들만 지었어요. 이순신 장군 공훈을 기리는 비석을 국가 주도로 처음 세운 게 정조 때입니다. 정조가 비문을 직접 썼죠. 비석 건립은 그만큼 쉽지 않았어요. 비문은 또 ‘특정 시대나 사람을 어떻게 설명해 후대에 전할까’ 고심하는 긴박감이 있죠.”

옛 비문의 문학성과 역사성 살핀

‘한국의 석비문과 비지문’ 최근 내

계층과 정치적 함의도 깊이 살펴

“우리 비문 특징은 ‘충실한 기록성’

퇴계 같은 초일류 문장가가 써”


“김태준 조선한문학사 꼭 보완할 터”

그는 한국 비문의 특성 중 하나로 충실한 기록성을 들었다. “좋지 않은 내용은 고의로 빼서 한계가 있지만 인물이나 사건 기록이 비교적 충실해 사료 가치가 커요. 우리는 한 인간에 대해 장문의 평가를 담아 비를 세우는 관습이 발달했어요. 하지만 일본은 우리 같은 비석이 메이지 시대에나 나옵니다. 그 전에는 노랫말 비석 정도였죠. 중국은 비석이 우리처럼 근엄하지 않아요. 비석의 절반 정도는 해학적이고 허구가 담겨 지은이의 개성을 느낄 수 있는 글이죠. 서양도 장문의 글이 담긴 비석은 찾기 힘들어요. 4년 전 모스크바를 찾아 작가 안톤 체호프 묘지를 가봤는데 비문이 단순하더군요.”

그는 책에서 비문의 계층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도 두루 짚었다. “비석에는 정치성과 문학성의 결합이 잘 드러납니다. 권력이 없으면 비석을 세울 수가 없었죠. 조선 사신이 압록강 넘어 베이징까지 가는 길에는 이와 관련된 비가 하나도 없지만 우리 땅에는 명 사신이나 명나라 원군을 기리는 비가 여럿이죠. 명 원군이 직접 우리 땅에 비를 세우기도 했죠. 비석은 세력간 힘겨루기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전남 해남에 서산대사 비가 들어섰다는 것은 서산대사를 떠받드는 종파가 거기까지 들어갔다는 이야기죠.”

지금은 돈이 비석을 세우지만 일본 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상인과 공인을 위한 비석은 하나도 없었단다. 조선의 엄격한 사농공상 신분 질서를 반영한 것이다. “중국만 해도 명나라 때 상인이 묘주인 비석을 많이 세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반면 노비를 기리는 기념비는 여럿이죠. 대개 주인을 따라 죽는다든지 주인에게 충직한 행동을 했다는 명분으로 세웠어요.”

 

그는 “고려까지는 일부 스님을 제외하고 학자나 정치가들의 묘지를 주로 땅에 묻어 미래를 위해 보관하다가 조선 시대 들어 비석이 땅 위로 올라왔다”며 “여성들은 임진왜란을 겪고 17세기나 돼야 비석이 세워졌다”고 말했다. “비석에는 강요가 있었죠. 여성 군자상 같은 게 대표적이죠. 비석의 부정적 측면입니다.” 그는 한국 비석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예로 한글 비석이 일본 강점기에야 등장한 것을 들었다. “고종 때 국한문 신문이 나왔는데도 비석은 바뀌지 않아요.”

가장 탁월한 비문을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광개토대왕비라고 했다. “규모도 압도적이고 고문으로 쓰인 글은 장엄해요. 왕권 신화를 앞세운 뒤 왕의 업적을 기술합니다. 신화를 내세운 비문은 우리 땅에 별로 많지 않아요. 후대의 다른 비석들은 중국 고전을 자주 내세우는 데 이 비는 그렇지 않아요. 명문가 출신 유학자인 허균이 쓴 사찰 중수기도 마음에 들어요. 욕먹을 줄 알면서도 사상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소신껏 쓴 글이죠. 지금도 자유롭게 글을 쓰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심 교수에게 지치지 않고 읽고 쓰는 원동력이 뭐냐고 묻자 바로 “모르니까요”라고 답했다. “저는 멀티 태스킹을 합니다. 책을 쓰다 걸리면 미뤄두고 다른 작업으로 넘어가죠. 번역을 많이 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이번에 낸 번역서 <도성행락>이나 <주역철학사>(1994)도 제 공부를 위해 옮겼어요. <논어>에 나오는 ‘학이사’가 저의 주요한 공부 방법론입니다. 학은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을 따라 배우는 것이고 사는 스스로 사유하기죠.”

그는 자신의 작업 원칙을 두고 ‘3M’(MIND(마음), METHOD(방법), MAP(지도))이라고도 했다. “제가 조선 한문학 결산보고서를 내겠다고 결심한 게 바로 마음이죠. 방법은 퇴계와 성호 등 선현들에게 배웠죠. 지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맵은 스승인 서애 민영규(1915~2005) 선생님께 배웠어요.

 

일본 교토대학에서 고증학과 문헌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저에게 서애 선생님이 한국의 옛 당파나 사상까지 한국학 전반에 대해 폭넓게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어요. 저를 제자로 받아줄 때 선생님 나이 77세였죠.” 위당 정인보의 수제자인 서애는 한국사·불교사·양명학·서지학 분야에 두루 밝은 국학계 거목으로 <강화학 최후의 광경>이란 책을 남겼다. 한국 대학 최초로 연세대에 도서관학과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남과 북은 공동의 기억이 있으니 만나야 한다”며 남북 한문학 공동 연구에 대한 열망도 강하게 드러냈다. “제가 비문 책을 낸 데는 2010년 북한 개성에서 한석봉 비석이 발견됐다는 소식도 영향이 있었어요. 이 뉴스를 접하고 북한도 과거 기억을 무조건 버리지는 않는구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뒤로 관심을 가지고 해외에 있는 우리 비문 관련 책을 찾아봤어요.”

<도성행락> 표지.

인터뷰 끝에 가장 좋아하는 한시를 묻자 중국 시인 도연명(365~427)의 ‘귀거래사’라는 답이 돌아왔다. “귀거래사 중에 자기 뜰의 나뭇가지를 보다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는 시구를 가장 좋아해요. 도연명은 나에게 집이 있어 새가 날아온다고 했죠. 이 말은 올바른 내가 성립되어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이뤄진다는 말입니다. 다산도 나이 들어 도연명과 소동파에게 돌아갔고 허균도 귀거래사를 좋아했어요. 허균은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거나 찾는 것을 귀거래와 연결했죠. 사실 고전공부를 하는 것도 돌아갈 곳을 찾거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죠.”

두 시간이 넘는 대담을 마치고 근처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이번에 낸 번역서는 매우 중요한 책인데 1권이라도 팔렸는지 모르겠어요. 팔리지도 않는 두꺼운 책을 자꾸 내 출판사에 미안해요.” 덧붙였다. “저는 내 책이 1권이라도 남아 후세에 전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입력 2021.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