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예수. 기꺼이 낮은 곳으로 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예수가 바란 바다. 1201년작, 이탈리아 베니스 성 마가 마실리카 성당 소장.

예루살렘에 오신 후, 예수는 왠지 어둡고 비통해 보였다. 반대로 제자들은 이제 곧 예루살렘에 거대한 폭동이 일어나 예수가 왕이 되기를 기대하며 한껏 흥분해 있었다. 예수의 인기로만 보자면 가능할 법했다. 이때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예수는 뜬금없는 말씀을 한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복음 13:34)


폭동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예수의 입에서 일어났다.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랬다. 유대 종교와 사회가 수백 년 동안 목숨처럼 여겨왔던 ‘오리지널’ 계명이 있었는데, 예수가 그것을 대체할 새 계명을 준 것이다.


오리지널 계명,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들의 핵심 계명은 지금도 유대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기도문인 ‘쉐마’에 잘 담겨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신명기 6:4-5) 옛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다.


본래 있었던 계명에 무슨 오류가 있어서 예수가 새 계명을 내린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수는, 계명을 열심히 지키자고 소리 높이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 이유는, 그 계명이 오랫동안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당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는 굳이 다시 설명해야만 했다.


◇좋은 이웃이 되라, 율법의 명령

오래 전 내가 신학교 학생 때 있었던 일이다. 학교 캠퍼스 안으로 차 한 대가 들어왔는데, 운전하던 남자가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고는 심호흡을 크게 하였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다가, 담배까지 꺼내어 피게 되었다. 이때 지나가던 선배 신학생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꾸짖기 시작했다. “여기가 신학교라는 걸 모르시나요? 기독교인은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나가서 피우세요!” 남자는 크게 당혹해 하며 얼른 차를 몰고 그 자리를 떠났다.


쫓겨나간 남자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금기였다는 것도 잘 모르는 분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 남자는 기독교와 교회를 생각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올랐을까? “기독교인은 비흡연자에 성깔 있는 사람들.” 아마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아쉽다.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처음 들었던 말이 “담배 피우면 안 된다”였으니 말이다. “저희 예쁜 신학교 교정에서 잘 쉬시다가 돌아가세요. 이 신학교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선생님을 아주 반가와 하십니다.” 이런 말이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들었을 첫 마디였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 남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하나님은 피곤한 내 영혼보다는, 신학교의 공기 청정에 더 관심이 있으시군.” 흡연자든 술꾼이든 죄인이든, 이 세상 어느 누구든지 다 품으시고 그 짐을 덜어 주시는 예수를 소개받지 못했으니, 정말 아쉬울 따름이다. 하나님이 그 신학교 선배로 인해 잘못 소개되고 말았다.


옛 계명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율법을 잘 지켜야 했다.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이나 성소에서 제사를 잘 드리고 제사법도 엄수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이때에도 정말 아쉬운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정말 중요한 부분은 덜 강조했다는 것이다. 율법의 적지 않은 부분이 가난한 이웃과 소외받는 사람들, 과부나 고아, 외국인 등을 잘 돌보라는 명령이었다. 쉽게 말하여 하나님의 사람은 이웃의 ‘좋은 친구’가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을 돌보는 것 보다는, 자기네 ‘종교’ 기구(institution)를 곤고히 세우는 것에 더 열중했다.


◇예수, 다시 ‘사랑’을 선포하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한다.(요한일서 4:21) 교회에 가서 마음으로, 기도로, 노래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했다면, 사회에서는 자기 가진 것을 꺼내어 이웃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구약시대의 하나님 백성은 이를 실천하는 것에 실패하였고, 신약시대의 예수는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 자신이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는 것인지 실제로 보여주셨다.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최고의 것을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아낌없이 주셨다.


주일 예배는 빠지지 않고 열심이어도, 주위의 곤경에 처한 친구를 돌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와서는 찬양을 온 맘 다해 부르지만, 회사 동료나 아래 직원을 막 대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러 가다가 길에 쓰러진 어느 노숙인을 보았다면, 교회는 가지 못해도 쓰러진 이웃을 돕는 것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 기구가 아니라, 옆집 사람에게 착한 이웃이 되는 것이 참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새 계명을 선언하시기 전에 예수는 갑자기 자기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복음 13:14-15)


예수는 예배나 기도와 같은 어떤 종교적 기제도 언급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제자들에게 남겨주고 싶었던 것은,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는 본보기였다. 가장 낮아져서 서로 사람을 돌보라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이 사람의 사정을 돌보기보단 종교 기구의 원활한 운영에 더 힘쓰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처럼 되기를 원치 않으셨다.

1707년 세워진 체코의 어느 유대교 회당 벽에 적혀있는 히브리어. '쉐마'라 읽고 '들어라'라고 해석한다. 예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어놨다.

예수가 태어나시기 거의 800년 전, 예언자 아모스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과 그 종교적 지도자들이 사람보다는, 자기네 종교 기구 돌보기에 더 열중했기 때문이다. 희생제의, 제사, 절기, 헌금과 같은 종교적 기제가 그들의 주 관심사였다. 이때 하나님이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했던 말씀을 들어보자.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21-24)


◇교회에서만 사랑하는 건 거짓

지금 말로 바꾸어 보자면, 하나님이 교회의 크리스마스 행사나 추수감사 절기, 부활절 예배 등을 때려 치우라 하신 것이다. 보고 있자면 토가 올라오기 때문이시다. 십일조나 각종 감사헌금도 도로 가져가라고 하신다. 성가대도 집어치우라고 하신다. 찬양이 시끄러워 두 귀를 막겠다고 하신다.


왜일까? 성전에 와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그토록 부르짖더니, 돌아서서 성전 밖에서는 지극히 이기적으로 사는 섬뜩한 반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돌보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아모스가 마지막에 힘주어 말하는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는 아모스서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아모스는 매우 반복적으로 사회 기득권자들이 율법에 반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아모스가 말한 공의와 정의는 종교가 참되게 사람을 돌보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에서는 부끄럽게 살면서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께 한껏 사랑한다고 찬양을 올리니, 하나님의 비위가 많이 약해지셨다. 참 기독교인은 모범적인 사회인이어야 한다.

예수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선언한 후, 곧 이어 이렇게 말씀 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3:35) 낮아져서 사람을 돌보는 모본을 교회가 보이지 못하고,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불의와 탐욕만 물처럼 흐르게 한다면, 세상은 결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사람이 반(反)기독교인이 되는 정확한 이유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한국일보  입력 2018.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