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람의 아들일까, 아니면 신의 아들일까.
2000년 전 예수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약혼한 상태의 처녀였다. 아버지가 수수께끼다. 마리아와 함께 갓난 예수를 키운 요셉은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요셉 역시 예수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님을 알고 키웠다. 성서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됐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에서는 어땠을까. 사람들은 예수가 ‘신의 아들’임을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그냥 받아들였을까. 그랬던 사람들도 있었고,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에서도 ‘예수는 누구의 아들인가’는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심지어 1세기 후반에는 “예수는 사생아”라는 주장도 있었고, 이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 신학자의 반박도 역사적 문헌에 남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예수는 누구의 아들인가?” “예수는 인간인가, 신인가”라는 물음을 사람들은 중시한다. 왜 그럴까. 그 답에 따라 ‘우리가 가고 있는 목표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수의 출생은 파격이었다. 처녀의 몸으로 마리아가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 당대에 결혼이란 집안간의 만남이었다. 결혼 상대자도 대부분 부모가 결정했다. 가문의 명예는 목숨과 바꿀 만큼 중요했다. 혼전 처녀가 임신을 한다면 대가는 가혹했다.
성서에는 간음한 여자를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는 대목이 나온다. 혼전 임신도 마찬가지다. 집안의 남성들은 임신한 여성을 돌로 쳐 죽이는 게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니 마리아는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수태고지(受胎告知)는 마리아에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건’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천사는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첫 마디가 그랬다. “두려워하지 마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1818~1882)의 그림 ‘수태고지’에서는 두려워하는 마리아가 여실히 보인다. 침대에 앉은 마리아는 천사의 ‘수태 통보’를 듣고 벽 쪽으로 몸을 움츠린다. 천사가 건네는 백합의 꽃말은 순결과 신성(神性)이다. 마리아는 그걸 선뜻 받지 못한다. 두 손은 바닥에 떨어져 있다. 꽃을 받은 뒤에 자신에게 몰아칠 ‘운명의 폭풍’을 직감적으로 본 것이다.
그림 속 마리아의 얼굴은 무척 앳되다.
마리아는 당시 몇 살이었까. 그런 운명을 감당할만한 나이나 됐을까.
성서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마리아가 몇 살인지, 예수와 몇 살 차이인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
당시 풍습을 통한 추정은 가능하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상태였다. 양가에서 결혼을 승낙하고, 예식을 준비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니 마리아는 결혼적령기였을 터이다. 당시 갈릴리 지방에서 여성은 첫 월경을 하는 나이가 되면 시집을 갔다고 한다. 그게 열서너 살이다.
그때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다. 의술도 발달하지 않았으니 출산 도중 목숨을 잃는 여성도 많았을 터이다. 여성의 출가 연령도 낮았다. 그럼에도 열서너 살이면 아직 어리지 않았을까. 성령에 의해 임신이 되는 ‘초월적 사건’을 목숨을 걸고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았을까.
천사 가브리엘은 아이의 이름까지 불러주었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Jesus)라 해라.“ 한국말로 바꾸면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철수’라 해라“쯤 된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예수’는 그만큼 흔한 이름이었다.
로마 시대의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100?)는 『유대 전쟁사』에서 “당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니 국어책에 등장했던 ‘철수’나 ‘영희’처럼 유대인에게 흔하고 친숙한 이름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었다.‘예수’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는 뜻이다.
구약성서는 대부분 히브리어로 기록됐다. 유대 민족이 오랜 세월 바빌론의 포로가 되면서 말이 바뀌었다. 예수 당시에는 히브리어가 일상 언어는 아니었다. 구약을 연구하는 일부 율법학자들만 익히는 문자 언어였다.
훗날 이스라엘의 건국(1948년)과 함께 히브리어가 다시 유대인의 공용어가 됐다. 그럼 예수가 사용한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 광야에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루살렘의 골목에서 예수가 말하고 들었던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람어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썼다. 그리스어는 외교용 언어였고, 지중해 지역에선 공용어였다. 이 때문에 신약성서는 처음 그리스어로 기록됐다. 예수 당시에는 일부 식자층이 그리스어를 썼고, 대다수 평민은 아람어를 썼다.
예수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썼던 언어는 다름 아닌 아람어였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Yehoshuah)’이고, 아람어로는 ‘예수아(Yeshua)’다. 그러니 마리아와 요셉이, 갈릴리의 이웃들이 어린 예수를 부를 때는 “예수아! 예수아!”라고 불렀을 터이다.
정작 예수는 어땠을까. 자신을 스스로 무엇이라 불렀을까. 예수는 평소 자신을 지칭할 때 ‘메시아(구원자)’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인자(人子)”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란 뜻이다.
예수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썼던 언어는 다름 아닌 아람어였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Yehoshuah)’이고, 아람어로는 ‘예수아(Yeshua)’다. 그러니 마리아와 요셉이, 갈릴리의 이웃들이 어린 예수를 부를 때는 “예수아! 예수아!”라고 불렀을 터이다.
정작 예수는 어땠을까. 자신을 스스로 무엇이라 불렀을까. 예수는 평소 자신을 지칭할 때 ‘메시아(구원자)’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인자(人子)”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란 뜻이다.
그런데 ‘인자(人子)’의 뜻은 깊다. 그 울림도 크다. ‘인자’가 히브리어로는 ‘Aben adam(아담의 아들)’이다. 예수는 자신을 지칭하며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정확하게 ‘아담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예수는 왜 자신을 ‘아담의 아들’이라고 불렀을까.
사람들은 생각한다. 신의 외모가 인간의 외모와 똑같을 거라고. 우리처럼 눈이 있고, 코가 있고, 팔다리가 있을 거라고. 구약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 따 인간을 빚었다고. 미켈란젤로의 성화 ‘천지창조’를 봐도 하느님은 흰 머리칼을 휘날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인간의 형상은 신의 형상에서 따왔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한 차동엽 신부는 “‘형상’이란 단어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성서에 기록된 ‘형상’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셀렘(Selem)’이다.
‘셀렘’은 본질 혹은 속성이 닮았을 때 쓰는 말이다. 겉모양만 붕어빵처럼 똑같이 생긴 ‘형상’을 말할 때는 히브리어로 ‘데무트(Demut)’를 쓴다.
결국 성서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외모가 아니라 속성을 본 따 인간을 지었다’는 뜻이다. 차 신부는 “하느님을 의인화하고 인격화하며 ‘하느님은 이런 존재’라고 못박는 건 곤란하다. 그건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이고 편협한 생각 속에 가두는 일”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온 곳은 어디일까, 또 예수가 간 곳은 어디일까. 구약 창세기의 구절을 다시 떠올렸다.
하느님은 당신의 속성(Selem)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구약 창세기 1장27절).
그러니 아담 안에 신의 속성이 흐른다.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아담의 아들”이라고 한 까닭도 그랬다. 누군가 예수에게 물었다. 하느님을 보여달라고. 그분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나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하느님)를 보는 것이다.” 예수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 달리 말할 수가 없었을 터이다. 자신 안에 가득 찬 ‘하느님의 속성’이 바로 예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게 예수의 진정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베들레헴을 떠났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 물음이 올라왔다. 예수는 인간인가, 아니면 신인가. 그랬다. 아담의 아들 예수, 그는 신을 품은 인간, 인간을 품은 신이었다.
20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예수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의 아들인가.”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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