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방송, "서로 다른 남북 같은 민족인 근거 뭐냐"
통일 후 우리가 北 주민 가족처럼 느낄 수 있을까
'민족=가족' 이데올로기, 이제 조금은 거리 둬야
외국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면 참 좋다. 어학도 늘고 세상을 보는 안목도 확 달라진다. 지난주에는 독일 공영방송인 체데에프(ZDF)에서 하는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를 봤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이 직접 찍은 영상을 모아 보여주고, 그들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평양의 그로테스크한 풍경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독일 내레이터의 마지막 코멘트는 충격이었다. 남과 북 모두 '같은 민족'이라며 통일하겠다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저토록 다른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같은 민족'이냐는 거다. 아차 싶었다.
'민족'은 원래 없었다. 단어 자체가 아예 없었다. '민족'은 메이지 시대 이와쿠라 사절단 일원으로 구미 각국을 여행한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가 1878년 펴낸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에 처음 나타난 표현이다. 그 후 독일제국의 국가론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민족'은 '국가(Nation)'와 '종족(Volk)'이 결합한 뜻으로 본격 사용되기 시작한다. '국민', '민족', '종족'의 의미론은 이때부터 마구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을 거치면서 근대적 형태의 '국가(state)'가 성립된다. 왕의 '신민(臣民)'은 '국민(nation)'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는다. 이전의 국가 형태에서는 왕조나 종교, 혹은 농업 공동체를 중심으로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러나 근대국가에서 '국민'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줄 연결고리는 없었다. 이때 '가족'과 '국가'의 심리적 연합이 생겨난다. '가족처럼 국민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근대 국가의 '가족 로망스'다. 그렇지 않고야 프랑스 혁명의 이념('자유, 평등, 형제애')에 뜬금없는 '형제애'가 들어가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역사학자 린 헌트(Lynn Hunt)는 되묻는다. 또 다른 역사학자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국민'은 아예 구체적 실체가 없는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가족 메타포'는 아주 기막혔다. 특히 일본에서 고안된 '민족' 개념과 무척 잘 어울렸다. '민족'에 내재한 '가족 메타포'는 동양에선 아주 쉽게 이해되고 실천되었다. 분단의 한반도에서 '민족=가족' 이데올로기의 파워는 더욱 강력해졌다. 서구가 수백년 걸린 근대화의 과정을 수십년 만에 해치울 수 있었던 그 엄청난 저력도 '흩어진 가족'과 같은 민족의 '한(恨)'이었다. 어떻게든 돈 많이 벌어 흩어진 가족이 다시 모여야 했다. 그래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민족의 분단은 항상 '이산가족'의 슬픔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 스스로 한번 확인해봐야 한다.
정말 우리가 분단을 이산가족의 슬픔처럼 느끼고 있느냐는 거다.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들을 내 가족처럼 느낄 수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독일 통일을 현장에서 경험한 나로서는 지극히 비관적이다. 심리적 통일까지 이루려면 분단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 과연 우리는 북한 사람들을 위해 70~80년 넘는 세월을 인내할 수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김정은이 나타나면 감격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박수 치고, 눈물까지 흘리는 저 북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 각자는 그 엄청난 '통일세'를 수십년 동안 기꺼이 낼 수 있을까? 통일 후,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의 오만함에 분노하여 '김정은 시절이 더 좋았다'며 '조선노동당'을 다시 창당하면 도대체 무슨 느낌이 들까? 그 '조선노동당'이 북한 지역에서 몰표를 얻어 대한민국 국회의 한구석을 당당히 차지하는 모습을 '가족처럼'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을까?(이는 독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지난 시대의 '민족=가족' 이데올로기는 이제 좀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찬란했던 시절의 부서진 유물을 볼 때 생기는 절망적인 심리 상태를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은 '멜랑콜리(Melancholie)'라고 했다. 아울러 구시대의 유물로부터 새로운 극복의 가능성을 찾는 창조적 통찰을 '숭고한 멜랑콜리(erhabene Melancholie)'라고 불렀다.
바닷가 화실에서 혼자 지내며 뉴스로 접하는 북핵 사태는 참으로 고통스럽다. 과거 독일에서 13년, 일본에서 4년을 사는 동안 나는
아주 심각한 '국수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남북한 '단일민족'의 이념과 '통일'이라는 '무의식적 전제'들을 '숭고한 멜랑콜리'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민족'이라는 '당연한 전제'를 해체하면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는 아주 달라진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옵션도 확연히 넓어진다.
'민족'은 '가족'이 아니다. '우울'이다.
조선일보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입력 : 2017.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