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에서 국립경주박물관까지… 치장·기교 없는 아름다움 추구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지 위에 먹을 뿌려 놓은 듯하다. 따뜻한 원목으로 만든 창살 무늬는 고서(古書)들이 놓인 책장 같다. 중앙에서 옆으로 이동한 돌 질감의 안내데스크는 먹을 가는 벼루. 정원을 향해 놓인 벤치와 시시각각 화면이 바뀌는 기둥은 어느 5성급 호텔 로비를 떠올리게 한다.
기둥 화면 속 글자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2014년 문을 연 후 8년 만인 지난 1월 재개관한 국립한글박물관이다. 이 공간을 리모델링하고 전시 공간을 디자인한 사람은 양태오(41) 태오양 스튜디오 대표. 그는 2019년 국립경주박물관 재개관 리모델링에 이어 두 번째 박물관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스타들의 신혼집 인테리어로 유명했던 그는 어느덧 세계 3대 아트 서적 출판사인 파이돈 프레스 선정 ‘세계 최고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100인’, 세계적인 건축 디자인 잡지 아키텍처 다이제스트가 선정한 ‘2022년 100명의 디자이너(AD 100)’ 등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디자이너들의 명예의 전당 같은 곳이다. 국내 스타 디자이너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거듭난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에서 만났다.
박물관을 데이트 장소로
어두운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위에서 떨어지는 조명 아래 훈민정음 해례본 총 33장이 투명 아크릴 모형으로 빛나고 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 속 주인공이 돼 진귀한 보물을 찾으러 온 기분이다. 그다음 공간은 차분하게 톤이 바뀐다. 하늘의 둥근 모양과 서 있는 사람의 형체를 따와 천지인처럼 만들어진 공간 속에 훈민정음 해례본 복제본(원본은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유)과 훈민정음 언해본(한문본 훈민정음을 우리말로 풀어쓴 글)이 놓여 있다.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도 차분해지고 치유되는 느낌이다.
-박물관이 젊어졌다.
“한글의 감성은 전통이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젊은 언어다.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최신 기기에서 사용하기 편한 완벽한 문자다. 이런 한글이 가진 양면성, 현대성, 감성적인 가치를 전달해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특히, 로비 공간은 MZ세대들이 편하게 데이트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미디어 아트 형식의 스크린을 로비에 설치해 단조로울 수 있는 공간을 예술적이고 역동적으로 바꿔 소셜미디어에 부합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인테리어에서 느껴지는 감성은 직관적으로 ‘한글’은 아니다.
“디자인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그 지점이다. 한글로 디자인한다고 하면, 다들 문자의 패턴화만 생각한다. 문자를 가지고 일차원적인 해석만 하려고 한다. 난 거기서 탈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린이 박물관이 아닌 한글을 업(業)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도 와서 영감을 얻는 공간이 되길 원했다. 한글박물관의 주요 유물은 ‘책’이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문자 자료부터 현대의 한글 자료까지 191건 1104점의 한글 관련 유물이 있다. 그래서 기본 디자인은 책으로, 색은 한지와 먹으로 표현했다.”
-어떻게 국립한글박물관 리모델링을 하게 됐나.
“2019년 작업을 한 국립경주박물관이 미국 타임지에 게재되고 젊은 층이 찾는 등 이슈가 되자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시간 등 여건이 맞지 않아 자문위원만 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한글박물관의 가치를 전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직접 설계까지 맡게 됐다.”
“당신, 박물관 해봤어?”
그의 말대로 국립경주박물관 프로젝트는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물관 로비는 안내하고 기다리는 기능적인 장소, 박물관 전시는 정해진 동선을 따라 이동하며 연대기순으로 진열장 속 유물을 감상하는 것이 공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로비 한가운데에 신라 굽다리 접시와 토기들을 진열장 없이 노출 전시했고, 천장에는 별처럼 떨어지는 조명을 달아 사진 촬영이 용이한 공간으로 바꾸었다. 바깥쪽 통로는 일부를 막아 유리벽을 설치하고 벤치를 놓아 박물관 중정(中庭)과 경주 남산을 바라보도록 했다.
전시장 내부도 미로 같은 통로를 없앴다. 대신 연회색 배경 벽에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보물 2010호)를 걸어 놓는 방식으로 현대 미술관처럼 만들었다. 최근 반가사유상을 밖으로 꺼낸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 도자기 500점을 설치미술처럼 펼친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고미술 소장품 특별전 등은 모두 ‘경주의 충격’ 이후 탄생한 전시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어떻게 하게 됐나.
“당시 민병찬 관장(현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연락이 왔다. 박물관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디자이너에게 박물관은 경력의 정점이다. 아무에게나 제안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한 건 현대인들과 신라인들의 접점이었다. 그래서 불상도 앞에 서서 봤을 때와 앉아서 봤을 때의 거리감을 고려해, 과거 신라시대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이것들을 바라봤을까 고민했다. 이를 통해 신라시대의 미학이 아직도 현대에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반대는 없었나.
“처음 다들 황당해했다. 아이디어 미팅을 할 때마다 ‘이 사람 보게, 박물관 해봤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유물을 누가 만지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걱정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박물관은 의도대로 나왔고, 많은 사람이 좋아했다. 나조차도 그때 박물관의 가능성을 본 것 같다. 겉으로 꺼내놓은 유물들은 시민들이 공동으로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게 공간의 힘이다.”
-왜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나.
“어릴 때 내가 갔던 박물관에 대한 이미지는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어둡고 위압감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박물관은 충남 아산에 있는 온양민속박물관, 일본 민예관, 덴마크 루이지애나 미술관 등이다. 감상과 사유를 모두 할 수 있는 곳이다. 난 해외 출장을 가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먼저 가본다. 그 나라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정점의 것을 볼 수 있어, 시선이 바뀌기 때문이다. 내가 디자인한 박물관들도 그런 공간이 되길 바랐다.”
-국제갤러리, 타데우스 로팍 등 갤러리 인테리어도 담당했다.
“갤러리는 미술 애호가가 오는 공간이지만, 박물관은 모두가 오는 공간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하고, 누가 와도 자신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 나도 사실 박물관 프로젝트를 하며 디자인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이전에 난 무조건 ‘공간은 예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그런 게 없어졌다. 공간은 도구일 뿐이다. 내가 하는 작업은 공간을 완벽하게 만들어 전시대에 올려놓는 것이 아닌, 사용하는 사람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인테리어는 아름다워야 하는 것 아닌가.
“코로나 이전의 디자인은 굉장히 물질적이고 과시적이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모든 명품 브랜드에서 스웻 셔츠(운동용 방한 셔츠)가 나온다. 친환경도 강조돼 일회용품 사용도 줄었다. 아름다움과 편리함은 내가 아직도 고민하는 부분이긴 하다. 한글박물관의 안내표지판만 해도 ‘디자인에 신경 쓰느라 화살표가 잘 안 보이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든다. 어쨌든 난 끊임없이 아름다움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
책으로 집 만들던 소년
그는 미국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공부하고, 네덜란드 마르셀 반더스 스튜디오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2011년 태오양 스튜디오를 열고, 100년 된 한옥 ‘청송재’를 집과 사무실로 꾸민 후에는 ‘한옥 인테리어’를 국내에 유행시키기도 했다. 스위스 시계 브랜드 바쉐론 콘스탄틴,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인 구찌와 펜디, 프랑스 패션 브랜드인 루이비통 등 다양한 럭셔리 브랜드들과 작업하고 있다. 최근에는 디자이너 커리어의 최정점인 ‘파이돈 선정 전 세계 100명의 디자이너’ ‘AD100(아키텍처 다이제스트가 선정한 전 세계 100명의 디자이너)’에도 선정됐다.
-어릴 때 꿈은?
“패션도 하고 싶고, 고고학자도 되고 싶었다. 해리슨 포드가 나온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보면서 이야기가 있는 공간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다. 초등학교 때 한 나라씩 빠져 그에 관련된 책을 찾아 읽기도 했다. 어떤 때는 일본, 어떤 때는 태국 이런 식이었다. 방을 꾸미는 것도 좋아했다. 부모님이 해외여행을 갔다 기념품을 사오시면, 내 방으로 가져가 전시해두곤 했다. 처음 부모님은 이걸 모르고 ‘물건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책도 좋아하고, 집도 좋아해서인지 책으로 집을 만들며 놀기도 했다.”
-왜 해외 브랜드와 미디어에서 양태오를 주목할까.
“사실 우리 스튜디오는 규모도 작고 역사도 짧다. 직원 여섯 명의 11년밖에 되지 않은 젊은 스튜디오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끊임없이 한국적인 미를 찾았다. 우리 고객들은 세상 좋은 것들은 다 써보신 분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돈을 주고 취향을 산다는 것은, 그들이 물질로 갖지 못하는 감흥을 사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한국의 미는 조선시대 후기의 무미(無美)다. 영어로는 ‘비욘드 테이스트(Beyond taste)’, 모든 취향을 넘어선 취향을 말한다. 모든 걸 다 경험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치장과 기교를 버린 아름다움이다. ‘도산서당’과 ‘도산서원’ ‘달항아리’, 고(故) 이어령 선생님의 서재 같은 곳이다. 퇴계 이황은 당대의 부자였다. 모든 걸 경험하고 꾸민 곳이 도산서원인 것이다. 그들이 내게 원하는 것도 유행과 관련 없이 흔들리지 않는 그런 점 같다.”
그는 영국 드고네이 벽지와의 협업에서는 창덕궁에 있는 ‘한국의 정원’을 민화와 궁중화로 표현했고, 스위스 시계 브랜드 바쉐론 콘스탄틴과의 작업에서는 석탑과 석등을 3D프린터기로 구현했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펜디 가방에는 조선시대 ‘옻칠’ 기법을 적용했으며, 망향휴게소 화장실에는 향교(鄕校) 인테리어를 넣었다.
-브랜드에서 특별히 요구한 것이 있었나.
“전혀 없었다. 다만, 브랜드들이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것, 우리만 가지고 있는 가치를 전했으면 좋겠다는 주문만 있었다. 우리에게 럭셔리 브랜드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의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는 좋은 플랫폼이다. 전 세계에 한국의 미학을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루이비통이나 구찌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윈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파이돈이 선정한 전 세계 100명의 디자이너, AD100 등에 선정됐다.
“너무 영광스러운 일이다. 기분이 멍할 정도다. 사실 선정된 후 내 삶이 획기적으로 바뀐 건 없다. 다만 내가 가는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 물론 연락은 많이 왔다. 어떤 분은 ‘더 이상 커리어에 올라갈 곳이 없겠네’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어떤 기업 회장님은 ‘그동안 해외에서 AD100 디자이너 모시고 오느라 힘들었는데 드디어 한국에서도 탄생해 너무 기쁘다’고도 하셨다. 파이돈이나 AD100이나, 여기에 선정됐다는 건 전 세계적으로 믿고 맡길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됐다는 증명서 같아 너무 기쁘다.”
-앞으로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나.
“난 공간을 예쁘게 표현하는 것에는 소질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간에 이야기를 담고,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은 잘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도 더 이상 공간을 보고 예쁘다, 안 예쁘다를 말하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공간에서 어떤 감흥을 느끼는지, 어떻게 삶이 바뀌는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내게 차가 있긴 하지만, 거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이동하면서 책도 읽을 수 있고, 대중교통이라는 공간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은 책들로 ‘트레바리’라는 독서모임에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공간으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그런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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