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00세가 넘어도 김형석은 묻는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해암도 2022. 4. 15. 06:59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나는 왜 태어났는가?” 누구나 스스로 물어보는 과제다. 제각기 인생을 살면서도 대답에는 공통점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일찍 이 물음을 가졌다. 초등학생 때, 늦게 집에 들어서는데,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병신 같은 자식이지만, 생일날 저녁에 조밥을 어떻게 먹이겠느냐?”는 탄식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엄마! 나 괜찮아. 지금 영길네 집에서 ‘오늘이 장손이 생일인데 우리 집에서 저녁 먹고 가라’ 고 해서 이팝에 고기도 먹었어. 저녁 안 먹어도 돼”라고 거짓말을 했다.

 

항상 어머니가 내 꺼져가는 촛불 같은 나약한 건강을 걱정했기 때문에 그런 거짓말이 쉽게 나왔다. 어머니는 “그럼 됐다. 아버지나 드시면 되니까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배고픔을 참으면서 ‘나는 왜 태어났지.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했다.

 

이번 4월은 102세 마무리하는 달
고생 많았지만 후회 없는 삶 누려

빈곤·일제·전쟁의 아픔 두루 겪어90세 때 결심 “사회 위해 뭘 할까”

장수에 감사하나 자랑할 일 아냐행복은 섬김의 대가임을 깨달아

 

가난과 병에 절망했던 소년기

김형석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14살 이른 봄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버림받은 소년이 되었다. 가난과 병 때문에 중학교에 갈 희망도 없고 앞길이 암담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배운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어른이 되도록 살게 해 주시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는 기도였다.

 

나는 살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기도는 버림받지 않았다. 중학 1학년 크리스마스 때 나는 ‘앞으로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혼자가 아니다’는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중학 생활은 참담하고 가혹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로 자퇴했다가 되돌아가야 했고, 숭실중학교는 폐쇄되고 일본학교에서 졸업했다. 나의 10대 인생은 최악의 세월이었다.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나라를 걱정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 그때부터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며 나를 키워야 한다. 고학을 각오하고 일본으로 대학 공부를 떠났다. 어머니는 “내가 건강한데 굶기야 하겠니. 너도 다른 친구들과 같이 집 걱정하지 말고 떠나거라.” 건강을 되찾은 내가 대견스러웠고 고생을 함께 나누어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대학 생활 3년 반이 지나면서 내 생애에서 치러야 하는 악운이 또 찾아왔다.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끌려가는 운명에 직면했다. 태평양 전선으로 간다면 내 삶은 종말일 수도 있다. 그때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했다’는 성경 구절이었다. 그 뜻은 이루어졌다.

 

일제 말기 도피 생활을 보내다가 해방을 맞았다. 나는 조국과 더불어 다시 태어났다. 해방의 소식을 듣는 날, 새벽녘의 꿈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큰 태양이 동쪽 산 밑으로 지는 저녁인데, 나는 무한히 넓은 옥토에서 소에 연장을 메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 시간은 짧은데 일은 끝없이 많이 남아 있다는 심정이었다. 그 꿈이 나로 하여금 교육계로 진출하자, 파종과 추수는 누가 하든지 나는 마음의 밭을 갈아주자고 결심했다. 북한에서 2년 동안 교육에 종사했다. 그러나 공산세계는 자유와 인간애를 믿고 사는 사람은 살 곳이 못 된다. 탈북을 감행하다가 체포되었다. 5분만 일찍 잡혔어도 수용소를 거쳐 북으로 다시 끌려갔을 순간에 풀려났다.

 

육체는 늙었으나 정신은 안 그래

 

대한민국은 나를 따뜻한 품 안에 맞아 주어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국민도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무에서 유를 창건하는 새로운 탄생을 체험했고 성공으로 이끌어 왔다.

 

30대 중반에 연세대학으로 가면서는 학문과 사상계, 교육과 사회적 활동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65세에 정년을 맞이하면서 가까운 친구들과 뜻을 모아 90까지는 사회적 책임을 같이하자고 약속했고 그 뜻을 성취했다. 나는 90을 맞으면서 자신과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찾아 일하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 강연, 집필 몇 권의 저서를 남길 수 있어 감사한다.

 

지금 나는 내 긴 생애를 후회하지 않는다. 30까지는 성실히 자신을 키웠고, 30여 년은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다. 70부터 30년은 더 열심히 일했다. 육체는 노쇠해졌으나 정신적으로는 그렇게 늙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금년 4월은 내가 102세를 마무리하는 달이다. 자연히 100년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장수한 것에는 감사하지만 자랑거리는 되지 못한다. 중한 것은 오랜 세월이 아니라, 누가 더 풍요롭고 보람된 인생을 살았는가, 이다. 물론 장수와 보람까지 다 갖춘다면 축복받은 인생이 된다. 나에게는 일이 건강을 유지시켰고 정신력이 신체 건강도 지탱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고, 행복은 섬김의 대가라는 사실을 체험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중앙일보     입력 2022.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