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그날밤 호킹은 별을 보여주었다

해암도 2021. 5. 15. 08:45

루게릭병 앓던 물리학자 호킹이 런던 패럴림픽 개막식서 말했다
“별을 보라 호기심을 품으라 자기만의 재능을 힘껏 발휘하라”

 

도쿄올림픽까지 이제 겨우 두 달 남았는데도 ‘한다, 안 한다’ 뉴스가 날마다 쏟아진다. 그래서 요즘 나는 스티븐 호킹(1942~2018) 박사를 자주 생각한다. 올림픽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엉뚱하게도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호킹 박사다.

2012 런던 패럴림픽 개막식 무대에 오른 스티븐 호킹 박사.

 

 

왜냐하면 그가 9년 전 런던올림픽 직후 열린 런던 패럴림픽 개막식에 출연을 했고, 당시 내가 당혹감에 휩싸인 채 현장 기자석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연출가는 호킹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장애인”이며 “인품과 유머 감각 때문에 섭외했다”고 개막식 직전 밝혔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루게릭병이 악화돼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는 과학자가 대형 스포츠 이벤트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 간단한 축사나 덕담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10부터 0까지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그가 탄 휠체어가 무대에 올랐다. “문명의 첫새벽부터 사람들은 세상의 근본 질서를 이해하길 갈망해왔습니다.” 폐렴으로 기관절개술을 받아 목소리를 잃은 그는 음성 합성장치를 통해 미리 준비해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왜 그러한가. 대체 왜 존재하는가.”

 

개막식 공연은 다리 불편한 소녀가 세상을 탐험하고 과학과 우주를 탐구한 끝에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여정을 따라갔다. 호킹의 ‘목소리’는 공연의 맨 처음과 중간중간, 그리고 마지막에 내레이션처럼 울려 퍼졌다. 조각조각 이어붙여 보면 과학과 우주에 대한 짤막한 강연이었는데, 공연 흐름과 맞아떨어졌다.

 

전 세계 장애인 선수들과 수만 관중이 모인 축제의 자리에서 호킹 박사는 만물의 완전법칙을, 빅뱅과 블랙홀을, 우주의 경계를, 중력과 힉스 입자를 이야기했다. 지붕 없는 거대한 경기장에서, 새까만 밤하늘 아래 “발을 내려다보지 말고, 별을 올려다보라.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애써보라”고 격려했다. 경계 없는 호기심과 노력이 위대한 과학적 발견들을 이뤄냈으며,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꿔놨다고 설명했다.

 

 

3시간 넘는 개막식이 끝나갈 무렵 호킹 박사는 마지막으로 등장해 ‘패럴림픽’을 말했다. 이 또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을 기회라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창조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 능력이 운동이든 이론 물리학이든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뿐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다 다르기 때문에 ‘표준적 인간’이나 ‘평범한 인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삶이 아무리 어려워 보이더라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다”고 했다.

 

인간의 노력에 대해, 평등과 다양성에 대해 이보다 더 역설적이고도 완벽한 강연을 나는 들어본 적 없다. 근육과 힘줄이 격렬하게 맞부딪치는 스포츠 현장에서, 몸이 거의 완전히 마비된 과학자가 눈동자와 얼굴 근육을 움직여 기계음으로 완성한 이야기는 경쟁과 인간 세계를 보는 관점을 뒤흔들었다. 그날 이후 눈앞의 일들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나는 호킹 박사의 런던 패럴림픽 개막식 원고를 찾아 찬찬히 읽었다.

 

내가 잘났니, 네가 못났니 인간끼리 지지고 볶아도 우주에서 바라보면 다 고만고만한 것이다. 다만 저마다 다른 재능이 어우러져 세상이 찬란한 것이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해도 무한한 우주를 가슴에 품고 그 비밀을 풀어낼 수 있어 인간은 위대하다.

 

호킹 박사는 “패럴림픽은 각자의 분야에서 탁월함을 발휘하고 전력을 다할 기회를 준다. 모두 행운을 빈다”며 말을 맺었다. 순간 공중에서 성화가 내려와 어두운 밤을 대낮처럼 밝혔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4년마다 돌아오는 그 값진 기회를 결국 앗아간다면 정말이지 두고두고 아쉬울 것이다.

 

 

최수현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1.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