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

부산 송정해변 분식가게 송정집

해암도 2016. 6. 14. 10:02

갓 찧은 쌀로 갓 지은 밥을 가족 먹이듯… 

식탁 열 갠데 종업원은 열아홉
'나 아니면 할 수 없는 음식점' 궁리하던 주인이 2년간 연구
모든 식재료 직접 들여와 장만… 인재 기르려 '分家' 계획도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사진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짙푸르다. 물기 없이 보송보송한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한껏 숨 들이마셨다. 이리 맑고 깨끗한 날이 얼마 만인지. 이른 아침 서울을 떠나 한낮 부산 송정해변에 섰다. 시간 여행이라도 한 듯 즐거운 반전(反轉)이다.

현충일 연휴 근무 조(組)여서 6월 2일 미리 나만의 연휴를 냈다. 해운대·송정·송도가 전국 맨 처음 해수욕장을 연 이튿날이다. 활처럼 휜 1.2㎞ 백사장이 한적하다. 외국 여인들이 비키니 입고 엎드려 볕을 쬔다. 수영하는 이는 한둘뿐이다. 평일인 데다 선선하다. 서울 낮 기온이 29도까지 올라갔지만 부산은 24도에 그쳤다.

대신 검정 고무 옷 입은 서퍼들이 점점이 떠 있다. 수평선 쪽을 바라보며 기다린다. 파도가 오자 재빨리 몸을 돌려 보드에 오른다. 파도를 타려고 일어서지만 대개는 곧바로 넘어진다. 몇은 멋지게 미끄러지며 해변까지 나아간다. 참 젊다. 여자아이가 돌고래 모양 튜브를 물가로 끌고 간다. 튜브에 올라타 언니·오빠 서퍼들 흉내를 낸다.

송정해변을 걷기에 앞서 남쪽 분식 가게 송정집에 들렀다. 아담한 단층에 상큼한 민트색을 칠했다. 문 연 지 15분 지나 오전 11시 45분에 도착했다. 벌써 사람들이 기다린다. 대기표가 25번이다. 1년 전 낮 2시 넘어 처음 왔을 때도 한참 기다려야 했다.


깔끔한 대기실에 황갈색 가루 담긴 상자와 보온병이 놓여 있다. 누구나 타 마시게 하고, 담아 가라고 비닐봉지도 뒀다. 정미(精米)할 때 나오는 고운 쌀겨다. 이 집은 정미기를 갖추고 매일 아침 그날 쓸 쌀을 찧는다. 전기밥솥 열 개엔 따로 타이머를 달았다. 밥이 다 되고 한 시간 반 지나면 신호가 울린다. 그 밥은 팔지 않고 직원들이 먹거나 누룽지를 만든다. 갓 찧은 쌀로 갓 지은 밥은 그 자체로 진미(珍味)다.

벽엔 주인 휴대전화 번호를 내붙였다. '만족하지 못한 분이 문자 남기면 고치겠다'고 썼다. 50분 만에 번호를 불러준 종업원이 밝고 반듯하게 인사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차림은 2800원 하는 김밥부터 만두·국수·비빔밥까지 여덟 가지다. 둘이서 음식 셋을 시켰다. 작년 것까지 모두 여섯 가지를 맛봤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김밥은 매콤한 무말랭이가 뽀드득 씹힌다. 실멸치도 넣어 고소하다. 윤기 있고 차진 밥과 잘 어우러졌다. 4000원 찐 만두는 고급스러운 대바구니에 담아 낸다. 두께 0.5㎜ 피(皮)에 속이 비친다. 암퇘지 살코기를 채운 소에 육즙이 살아 있다.

면발도 가게 제면실에서 뽑아 3단계 온도로 세 차례 숙성시킨다.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클래식 음악을 틀어준다. 덕분인지 목 넘김이 부드럽고 속이 편하다. 밀가루·소금·물로만 반죽하고도 식감은 쌀국수처럼 매끄럽고 탱글탱글하다. 5000원 김치찌개 국수는 얼큰하고 시원하다. 밥 말아 먹고 싶어진다. 6000원 들깨 오곡 메밀면은 검정콩·검정쌀·검정깨·전분 섞어 빚는다. 들깨 국물이 따끈 구수하다.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써 붙인 번호로 전화를 걸어 예순한 살 장석관을 만났다. 뒷마당 쌀 창고와 제면실, 주방을 구경시켜줬다. 10도로 맞춘 저온 창고엔 1년치 안동 햅쌀이 가득했다. 그는 지난 40년 한식·양식·중식당부터 고깃집·횟집까지 갖은 음식점을 차렸다. 한창때는 열한 곳에서 350명을 부렸다. 그런데 요리사가 아니다. 그는 눈·입·혀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조리사는 배운 틀 안에서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에겐 분방한 상상력이 있었다.

그는 몇 년 전 동업을 접으면서 모든 식당에서 손을 뗐다. '나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을 궁리한 게 '가족 식당' 송정집이다. 2년 동안 문도 안 연 채 사람 쓰며 준비한 끝에 재작년에야 손님을 받았다. 식탁 열 개, 마흔 석(席)밖에 안 되지만 종업원이 열아홉이다. 그래도 다 바쁘다. 모든 식재료를 직접 들여오고 장만하기 때문이다.

그중 열세 명은 '오너 셰프' 수련을 하고 있다. 장석관이 고안한 식당 경영 실습 과정이다. 월 200만원쯤 받으며 2년 일하면 새 가게를 열어 독립시킨다. 개설 비용과 식재료는 송정집이 대고 수익을 반반 나눈다. 적어도 연봉 3600만원은 보장하고 폐점해도 손해를 송정집이 진다.

장석관은 요식업도 사람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예전에 사원 지주제를 도입해 투자한 직원에겐 월급 서너 배를 돌려줬다. 이번엔 인재들이 투자와 실패 부담 없이 찾아오는 길을 모색한다. 종업원 표정이 밝고 활기찬 이유를 알겠다. '이상한 분식점' 송정집은 외지에도 소문났다. 장석관이 찾은 상생의 사업도 성공하면 좋겠다. 첫 분가(分家)는 반년 뒤 나온다.

조선일보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입력 : 2016.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