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문화계 女傑' '운동권 代母' 전옥숙 前 시네텔서울 회장]

해암도 2015. 7. 11. 06:18

  • 左右 정치·문화인 한자리 불러 '형·동생'으로


조용필은 늘 '어머니'라 불러… 영화감독 홍상수가 막내아들

전옥숙씨 사진
"80년에 김지하(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가 석방된 날, 대학로 주점에서 모였어. 일본 텔레비전도 여러 군데서 취재를 왔어. 그때 일본이 한국 뉴스를 많이 다뤘거든. 대뜸 김지하가 마주 앉은 선우휘한테 욕을 해. 박정희한테 붙어 호의호식했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귓방맹이'를 갈겼어. '니 선우휘 때문에 목숨 붙어 있는 거 모르나?' 79년에 박정희가 선우를 불러 청와대에 갔었어. 선우가 자기를 비판했지만, 대통령이 글 잘 쓰는 사람을 좋아했었거든. '그래, 나한테 부탁할 거 있나' 대통령이 물어보길래 선우휘가 그랬대. '다른 건 없고 김지하를 석방해주시오.' 그런데 얼마 후 박 대통령이 총에 맞아 석방이 늦어졌던 기라."

70년대 술 마시다 대뜸 "YS나 부를까" 하면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달려왔다는 증언이 있다. 그 시절 그의 집은 운동권 인사와 돈 없는 글쟁이들의 식당이자 잠자리였다. '문화계 여걸(女傑)' '운동권 대모(代母)'로 불렸던 전옥숙(86) 전 시네텔서울 회장이 9일 오전 9시 서울 압구정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최근 몇 년간 노환을 앓아온 끝이다.

통영에서 태어난 전옥숙씨는 이화고녀를 졸업하고 문화사업에 투신했다. 1960년대에 대한연합영화사와 답십리촬영소를 만들었고, 70년대에는 일본 후지TV 한국지사장을 지냈다. 계간 한일문예(韓日文藝)를 발행해 한국 소설을 일본에 소개했고, 외주제작사 효시 격인 '시네텔서울'을 만들어 '베스트셀러극장' 등 TV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젊어서 좌파 운동을 했던 그는 타협이 없었다. 당시 유일한 여성 제작자로 1968년 만든 영화 '휴일(감독 이만희)'이 염세적이라는 이유로 '가위질'당할 처지가 되자 "그러면 극장에 안 건다" 선언, 필름을 창고에 처박아뒀다. 이 영화는 2005년 발굴돼 일반에 공개됐다.

2010년까지 10년 이상 계속됐던 '전옥숙 주최 망년회'는 좌우의 정치, 문화인이 '형, 동생'으로 함께하는 자리로 유명했다. 김지하, 이영희, 김근태, 최시중, 김부겸, 이애주, 윤흥길, 손학규, 이영애, 원희룡 등 하나의 '키워드'로 묶이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그와 각별했다. 조용필은 여전히 그를 '어머니'라 부른다. 일본 정치인·언론인들과 유대가 두터운데, 일본에서 그의 별명은 '시베리아의 유키코(雪子)'. 눈같이 흰 얼굴에 강한 성격 때문일 것이라 짐작들 하고 있다.

홍상수 감독(건국대 교수)이 막내아들이고, 오세정 서울대 교수가 사위다. 다른 유족으로는 맏아들 홍영수 MDS 회장, 딸 홍난실(주부)씨가 있다. 발인 11일 오전 10시 서울 건국대병원. (02)2030-7906


  • 박은주 블로그
    편집국 선임기자
    E-mail : zeeny@chosun.com
    2013년 현재, 24년째 신문사에서 주는 월급으로 밥 사먹고,..
  • 입력 : 2015.07.10



    [만물상] '뮤즈 전옥숙'

    이병주 소설 '남로당'에 전옥희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E대학 영문과 2학년. 좌익 계열 학생동맹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다. 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 기자인 주인공 박갑동은 처음 만난 순간의 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긴 머리칼 속으로 고혹적인 얼굴이 깎아놓은 조각처럼 빛났다. 큰 눈 속 흑진주를 닮은 눈동자의 광채가 신비스러운 여울로 되었다.' 소설은 '가냘픈 전옥희가 발언을 시작하자 강철의 칼날을 연상케 했다'고 썼다.


    ▶'남로당'이 박갑동의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한 실록 소설이듯 전옥희는 실재 인물이었다. 본명은 전옥숙. 사회주의자인 그는 6·25 때 패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가다 미아리 근처에서 투항한다. 전옥숙은 이때 자기를 돌봐준 헌병대장과 결혼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을 만든 영화감독 홍상수가 막내 아들이다. 어제 전옥숙이 86세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했다. 신문들은 그를 "문화계의 여걸(女傑)이었다"고 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한국의 뮤즈' '여왕벌' '문화계 대모(代母)'…. 전옥숙에겐 별명이 많았다. 1984년 한·일 문화인들이 대한해협에서 선상(船上) 토론을 벌였다. 일본 영화감독 오오시마 나기사가 토론 중 한국 참가자에게 "바카야로(바보 같은 놈)"라고 내뱉어 유명해진 이벤트였다. 이 행사 설계자가 전옥숙이었다. 당시 일본 언론의 서울 특파원이 부임하면 맨 먼저 하는 일이 전옥숙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들 중 전옥숙과 폭탄주를 나누며 지한파(知韓派)가 된 사람이 많다. 반대로 일본에 가는 한국 문화예술인들에게 다리를 놓아준 것도 전옥숙이었다.


    ▶그에게 사람을 움직일 공적(公的)인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스타가 돼 전면에 나선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루 살로메 주변에 니체·릴케·프로이트가 있었던 것처럼 주변에 많은 문화인·지식인이 모였다. 그는 상대방 장점을 발견해 치켜세워 주고 어려운 일 있으면 인맥을 동원해 풀어줬다. 저항 가요의 상징이던 김민기가 80년대 말 처음 외국에 나갈 수 있게 길을 열어준 것도 전옥숙이었다고 들린다.


    ▶그는 국내 첫 방송 외주(外注) 제작사 시네텔서울을 운영하는 한편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여의도에 '기러기'라는 술집을 차리기도 했다. 전옥숙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미모와 지성, 친화력을 그의 힘의 원천으로 얘기했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때로 베일 속 인물처럼 비치기도 했다. 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겪으며 문화를 키워드 삼아 남녀·좌우와 국경을 뛰어넘으려 했다는 점에서 비범한 일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