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소설 '남로당'에 전옥희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E대학 영문과 2학년. 좌익 계열 학생동맹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다. 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 기자인 주인공 박갑동은 처음 만난 순간의 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긴 머리칼 속으로 고혹적인 얼굴이 깎아놓은 조각처럼 빛났다. 큰 눈 속 흑진주를 닮은 눈동자의 광채가 신비스러운 여울로 되었다.' 소설은 '가냘픈 전옥희가 발언을 시작하자 강철의 칼날을 연상케 했다'고 썼다.
▶'남로당'이 박갑동의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한 실록 소설이듯 전옥희는 실재 인물이었다. 본명은 전옥숙. 사회주의자인 그는 6·25 때 패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가다 미아리 근처에서 투항한다. 전옥숙은 이때 자기를 돌봐준 헌병대장과 결혼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을 만든 영화감독 홍상수가 막내 아들이다. 어제 전옥숙이 86세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했다. 신문들은 그를 "문화계의 여걸(女傑)이었다"고 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507/10/2015071003714_0.jpg)
▶'한국의 뮤즈' '여왕벌' '문화계 대모(代母)'…. 전옥숙에겐 별명이 많았다. 1984년 한·일 문화인들이 대한해협에서 선상(船上) 토론을 벌였다. 일본 영화감독 오오시마 나기사가 토론 중 한국 참가자에게 "바카야로(바보 같은 놈)"라고 내뱉어 유명해진 이벤트였다. 이 행사 설계자가 전옥숙이었다. 당시 일본 언론의 서울 특파원이 부임하면 맨 먼저 하는 일이 전옥숙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들 중 전옥숙과 폭탄주를 나누며 지한파(知韓派)가 된 사람이 많다. 반대로 일본에 가는 한국 문화예술인들에게 다리를 놓아준 것도 전옥숙이었다.
▶그에게 사람을 움직일 공적(公的)인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스타가 돼 전면에 나선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루 살로메 주변에 니체·릴케·프로이트가 있었던 것처럼 주변에 많은 문화인·지식인이 모였다. 그는 상대방 장점을 발견해 치켜세워 주고 어려운 일 있으면 인맥을 동원해 풀어줬다. 저항 가요의 상징이던 김민기가 80년대 말 처음 외국에 나갈 수 있게 길을 열어준 것도 전옥숙이었다고 들린다.
▶그는 국내 첫 방송 외주(外注) 제작사 시네텔서울을 운영하는 한편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여의도에 '기러기'라는 술집을 차리기도 했다. 전옥숙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미모와 지성, 친화력을 그의 힘의 원천으로 얘기했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때로 베일 속 인물처럼 비치기도 했다. 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겪으며 문화를 키워드 삼아 남녀·좌우와 국경을 뛰어넘으려 했다는 점에서 비범한 일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