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일하게 두번 본 영화 - "길"

해암도 2013. 2. 23. 08:53

 

유일하게 두번 본 영화… 그 '길'에서 삶의 길 배웠지

[나의 시네마 천국]  임권택 감독의 '길'
밑바닥 인생의 애환 다룬 '길'…

잠파노의 마지막 눈물신 보며 나에 대한 성찰과 각성을 했지
감독 데뷔 후 영화 '찍어' 댄 10년… 작품 욕심에 美 영화 흉내도 냈다
어느 날 '이건 아니다' 悔恨 밀려와 그 뒤부터 한국 영화 찍기 시작
오랜 시간 성찰하며 살았는데  아직 모르겠어, 삶이 무엇인지

 

임권택 감독
영화를 두 번 보는 법이 없다. 하지만 딱 한 편은 예외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은 두 번 본 유일한 영화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20대 초반 영화 촬영 현장 연출부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지인을 따라 영화계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었다. 그전까지는 영화를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 영화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에는 몰아(沒我)의 경지로 순수하게 빠져들었다.

'길'은 밑바닥을 사는 인생의 애환을 다룬다. 6·25전쟁 직후 다들 지독히 가난하게 살아야 했기 때문에 이 영화는 당시 많은 사람에게 절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곡예사 잠파노는 순박한 자신의 조수 젤소미나를 막 대하다 결국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는 젤소미나가 죽자 세상에서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자가 자신을 돌아보고 각성한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 그건 홀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고독이란 걸 알아차리고 바닷가에서 눈물을 흘리는 마지막 장면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기억난다. 이 영화를 다시 본 것도 그 때문이다.

끊임없이 나를 성찰하고 각성하는 건 범인(凡人)으로선 힘들다. 그러나 젤소미나의 죽음으로 잠파노가 인생을 돌아보고 깨달은 것처럼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그럴 만한 기회나 계기가 온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1961년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10년간 약 50편의 작품을 정신없이 찍었다. 나 자신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고, 젊은 기운에 그저 열심히 일했다. 언젠가는 미국 영화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만든 영화들은 지금 봐도 너무 부끄러워 확 불태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을 정도다. 회의가 들었다. 연출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야 내가 미국 영화를 흉내 내는 게 터무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삶에서 이런 낭비는 그만해야 한다. 내가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영화 만드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이를 그만둘 순 없었다. 허투루 보낸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나에 대해 그리고 내 영화에 대해 치열하게 성찰했다. 나를 들여다보는 시선은 자연스레 세상을 향해 옮겨갔고, 거기서 어떤 영화를 어떻게 만들지 어렴풋이 감을 잡았다. 미국 영화 흉내 내기를 그만하고 한국 사람만 찍을 수 있는 '한국 영화'를 찍기로 했다.

다들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살아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을 연구하는 학자나 성직자가 아닌 이상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살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성찰하고 각성하는 순간이 있다. 돌이켜보면 '길'을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들여다보며 살아온 것 같다. 하지만 오해는 말길. '길'이란 영화로 대오각성(大悟覺醒)했다는 건 아니다. 오랜 시간 성찰을 했는데도 사는 게 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도 얻지 못했다. 이 성찰이란 건 끝나질 않는다.

☞영화 ‘길’(La Strada·1954)…

이탈리아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가 연출했고, 그의 아내 줄리에타 마시나와 앤서니 퀸이 각각 젤소미나와 잠파노 역을 맡았다. 마시나는 니노 로타가 작곡한 이 영화의 주제가를 장례식에서 연주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영화 개봉 당시 프랑스 영화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신화적 등급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밥 딜런은 자신의 대표곡 ‘미스터 탬버린맨’이 이 영화에 영향을 받아 만든 곡이라고 밝혔다. 베네치아 영화제 은사자상,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 

조선  2013.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