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상식

암세포 저격수 돕는 스위스 ‘눈’…세계 두 번째로 한국에 설치

해암도 2024. 11. 8. 07:14

 스위스 의료영상 기업 ‘테라펫’ 창업자 3인
중입자 치료 중 실시간으로 방사선 영상화
세브란스병원에 지난 9월 설치, 전임상 시험 중

 
 

세브란스병원은 지난 3월 ‘꿈의 치료기’라고 불리는 중입자 치료기를 도입했다. 중입자는 양성자 치료에 사용되는 수소 입자보다 12배 무거운 탄소 입자를 가속하기 때문에 암세포 살상 능력이 더 뛰어나다. 방사선 치료나 양성자 치료보다 더 정밀하고 강하게 암세포를 공격할 수 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중입자 치료기를 두고 ‘암세포만 파괴하는 저격수’라고 평가했다.

 

아무리 뛰어난 저격수라도 조준경으로 표적을 확인하는 탄착 관측병이 없다면 혼자 적을 처치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중입자 치료기도 영상 장비의 도움을 받으면 더 정확하고 강력하게 암을 치료할 수 있다. 세브란스병원이 선택한 파트너는 스위스의 의료영상 장비 기업 테라펫(Terapet)이다. 테라펫이 개발한 감마선 탐지 장비 ‘퀄리스캔(Qualyscan)’이 중입자 치료기의 탄착 관측병 역할을 수행한다.

 

지난달 30일 제네바 본사에서 만난 크리스티나 발그렌 테라펫 최고경영자(CEO) 겸 공동 창업자는 “한국과 스위스 정부 양쪽의 지원을 모두 받아 세브란스병원과 협력해 퀄리스캔을 설치했다”며 “중입자 치료기가 꿈의 치료기라면 퀄리스캔은 ‘꿈의 영상장치’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스위스의 의료영상 기업 테라펫의 공동창업자 3명. 왼쪽부터 크리스티나 발그렌 CEO, 마커스 팜 최고기술책임자(CTO), 레이몬드 미라벨 최고전략책임자(CSO)다. 이들이 개발한 퀄리스캔은 지난 9월 세브란스병원에 설치됐다./제네바(스위스)=이병철 기자

◇유럽입자물리연구소 기술로 암조직 저격

 

스위스 서부의 도시 제네바는 유엔(UN) 유럽본부를 비롯해 국제기구 37곳과 국제 비영리기구(NGO) 250여 곳이 자리한 국제 도시다. 동시에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혁신적인 발전이 이뤄지는 곳이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대학인 로잔 연방공대(EPFL)의 바이오 특화 캠퍼스와 세계 최대 규모의 입자물리연구소인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있다.

 

테라펫은 CERN 출신의 발그렌 CEO와 마커스 팜 최고기술책임자(CTO)가 종양학 전문의인 레이몬드 미라벨 최고전략책임자(CSO)와 함께 2019년 설립했다. 이들은 CERN에서 연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암 환자의 치료 효과를 높이고 부작용을 줄인다는 목표를 세웠다. 팜 CTO는 “중입자 치료기는 암 치료에 효과적인 장비지만, 환자 몸 속 어디가 치료되고 있는지 불확실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며 “암 환자를 위한 장비를 개발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고 말했다.

 

퀄리스캔은 CERN에서 쓰이는 감마선 탐지 기술을 이용해 신체 내부에서 방사선이 나오는 위치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영상 장비다. 퀄리스캔은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 장치와 원리는 비슷하지만, 진단 목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PET과 달리 방사선 치료 중 나오는 감마선을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다.

 

의료진은 퀄리스캔 정보를 보고 암 환자에게 방사선 치료를 계속 할지, 위치를 옮길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미라벨 CSO는 “환자의 몸은 블랙박스에 가까워 방사선 치료를 할 때마다 어디에서 치료가 되는이뤄지는지 보고 싶었다”며 “지금은 별도의 표지 물질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치료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테라펫과 세브란스병원은 지난 9월 퀄리스캔을 설치한 이후 팬텀(phantom·인체 모사체)을 이용해 방사선 감지 성능을 검증하고 개선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팬텀이란 의료영상기기의 성능을 평가하기 위한 도구로 인체 대신 장비에 삽입된다. 자동차 충돌실험에 사용되는 인형인 ‘더미(Dummy)’와 같다.

 

목표는 내년부터 실제 환자에게 적용해 중입자 치료기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발그렌 CEO는 “세브란스병원과 2026년까지 협력하는데, 내년부터 본격적인 임상시험에 나설 예정”이라며 “중입자 치료기를 사용하는 의사들이 치료 전략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테라펫이 개발한 방사선 영상장치 퀄리스캔 모형과 한국 특허증. 테라펫은 세브란스병원과 협력해 퀄리스캔의 전임상을 진행 중이다. 내년부터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성능을 검증한다./제네바(스위스)=이병철 기자
 

◇한국과 스위스 정부가 공동 투자

 

테라펫은 지난해 스웨덴의 병원인 스칸디온클리닉에 퀄리스캔 첫 제품을 설치했다. 세브란스에 설치한 장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설치한 제품이다. 이전에는 중입차 치료 중 방사선 조사 영상을 얻을 수 있는 상용 장비가 없었다. 발그렌 CEO는 “양성자와 중입자 치료 기술은 연구가 시작된지 30년이 채 되지 않는다”며 “연구용 장비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상용화된 장비는 퀄리스캔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테라펫이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CERN 덕분이다. 발그렌 CEO는 “CERN에서 일하던 시절 함께 근무하던 한국 교수가 세브란스병원 관계자를 소개했다”며 “세브란스병원이 도입한 중입자 치료기와 우리가 가진 기술이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협력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국과 스위스 정부도 혁신적인 의료 기술의 상용화를 앞당기기 위해 협력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과 스위스 혁신청에서 이들에게 300만프랑(약 48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의사인 미라벨 CSO는 “한국과 스위스의 협력을 통해 환자들도 빠르게 의료 기술의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테라펫 설립자들은 퀄리스캔이 본격적으로 환자에 이용되면 소아암 환자들이 가장 큰 혜택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라벨 CSO는 “소아암 환자는 나이가 어린 탓에 기대수명이 길어 암 치료 후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양성자, 중입자 치료기로 암세포를 정확히 공격할 수 있다면 부작용 없는 치료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테라펫은 세브란스병원 외에 다른 한국 병원들과도 협력할 예정이다. 발그렌 CEO는 “서울은 양성자 치료기와 중입자 치료기 시설을 보유한 병원이 다수 몰려 있어 암 치료 기술의 혁신이 이뤄지는 곳”이라며 “한국을 발판으로 아시아 시장 공략에도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