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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g 종이 비행기에 인생을 건 3총사 “행사·강연·캠프로 너무 바빠요”

해암도 2024. 4. 27. 08:28

종이비행기 국가대표 삼총사
이정욱·김영준·이승훈 선수

5g짜리 종이비행기에 인생을 쏟아부은 세 청년이 있다. 예비행 국가대표 이승훈, 멀리 날리기 국가대표 김영준, 오래 날리기 국가대표 이정욱 선수 인터뷰./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곡예비행 국가대표 이승훈(왼쪽부터), 멀리 날리기 국가대표 김영준, 오래 날리기 국가대표 이정욱 선수가 종이비행기를 동시에 허공으로 던졌다. 5g짜리 종이비행기에 인생을 쏟아부은 지 올해로 10년째. 세 청년은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멜로디처럼 살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정치나 사업, 문학에만 인생을 걸 일이 아니다. 종이비행기에 인생을 걸 수도 있다. 이정욱(37), 김영준(33), 이승훈(33)씨는 그 동화 같은 상상을 구체적 현실로 바꾼 ‘종이비행기 국가 대표 삼총사’다. 손바닥만 한 종이비행기의 무게는 약 5g. 세 청년은 작고 가벼운 세계에 인생을 10년째 콸콸 쏟아붓고 있다. 진지하게 명랑하게.

 

“마음대로 접어서 마음 가는 방향으로 날릴 수 있는 건 종이비행기뿐이었어요.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고. 종이비행기가 내 삶의 지팡이였어요.”(이정욱)

 

세 남자는 취미로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페셔널이다. 이정욱씨는 ‘오래 날리기’, 김영준씨는 ‘멀리 날리기’, 이승훈씨는 ‘곡예비행’ 국가 대표를 맡고 있다. 이승훈씨는 2022년 예선부터 60국 6만명이 참가한 레드불 페이퍼윙스 세계 대회(오스트리아에서 열리는 ‘종이비행기 올림픽’)에서 곡예비행 챔피언에 올랐다.

 

종이비행기로 ‘먹고사는’ 세 남자를 지난 17일 서울 염창동 위플레이(WePlay)에서 만났다. 이정욱 대표는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직업을 창조한 셈”이라며 말을 이었다. “종이비행기는 날개를 조금만 바꾸면 멀리 갈 수도, 곡예비행을 할 수도 있어요. 사소한 1%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이들에게 ‘뭐가 될래?’ 묻지 말고 ‘뭐가 되고 싶니?’로 질문을 살짝 바꿔보세요.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다 보면 미래가 따라올 수 있으니까요.”

이승훈(가운데) 선수가 2022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레드불 종이비행기 세계 대회(Red Bull Paper Wings World Finals) 곡예 부문에서 우승했다. /레드불
 

◇활주: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위플레이 사무실은 종이비행기 공작소 같았다. 여느 방문객처럼 종이를 직접 접어 날려보는 체험을 한 다음에야 세 남자와 마주 앉았다. 모두 조종사 제복을 입고 있었다. 견장에 금실로 짠 네 개의 줄이 반짝였다. 기장(機長)이라는 뜻이다.

 

-모든 사건에는 씨앗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 종이비행기를 더 오래, 더 멀리, 더 멋있게 날리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나요?

이정욱(이하 욱): “저는 경북 상주 시골에서 자랐어요. 장난감이 없어 물수제비를 뜨고 놀았습니다. 그러다 중2 때 TV에서 오래 날리기 챔피언 켄 블랙번이 종이비행기 날리는 장면을 보고 매료됐지요. 알아보니 그는 미국 공군 전투기 엔지니어였고, 종이비행기를 잘 날리려면 항공역학과 유체역학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더라고요. 누구한테는 손흥민이 히어로이듯이 저한테는 블랙번이 그랬습니다. 그렇게 점점 빠져든 거예요.”

김영준(이하 김): “저는 평범했어요. 시험을 망치면 문제지를 접어 창밖으로 날리곤 했지요(웃음).”

이승훈(이하 훈): “잘 날리고 싶은 욕망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종이비행기를 100개 접어 아파트 5층에서 날린 기억은 있어요. 하나쯤은 멋지게 날지 않을까, 했는데 그렇지 않아 실망했지요.”

-고향도 나이도 학교도 전공도 다른데,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 “성장 만화를 보면 누가 드럼통을 배처럼 타고 출발했다가 동료를 모으게 되잖아요. 저는 서강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다큐멘터리 PD를 꿈꿨는데, 2014년에 레드불 종이비행기 세계 대회가 이듬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졸업을 연기했어요. 레드불에 연락해 ‘기술고문 역할을 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군인이라 자주 이사를 다녔어요. 동국대에서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했지요.”

: “대전에서 초·중·고를 나왔고 중앙대에서 체육교육학을 전공했습니다. 공통점이요? 요즘 저희 얼굴이 친형제처럼 점점 닮아간대요. 하하.”

-종이비행기에 세 종목이 있고 국가 대표도 뽑는 줄은 몰랐습니다.

: “시골에는 바람도 불고 넓은 공간이 있으니 어릴 적부터 오래 날리기를 좋아했어요. 2015년에 국내에서 첫 국가 대표 선발전이 8번 열렸고 약 1600명이 참가했습니다. 대체로 똘기가 있거나 도전적인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이었어요. 나중에 보니 창업하기에도 잘 맞는 성향이었습니다.”

: “저는 처음부터 곡예비행에 흥미가 있었어요. 오래 날리기는 뭔지 모르겠고, 멀리 날리기는 힘이 달렸고.”

: “멀리 날리기 기록이 좋아서 그 종목에 집중했습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체중이 10kg 가까이 늘었어요. 종이비행기에 힘을 싣는 요령을 익히면 더 멀리 날릴 수 있거든요.”

-원래는 각자 다큐 PD, 공학자, 체육 교사를 지망했다면서요. 궤도에서 너무 멀리 벗어난 것 아닌가요?

: “다른 방식으로 저마다 그 꿈을 이뤘다고 봅니다. 김영준 선수는 가르치는 일을 종이비행기로 하고 있고, 이승훈 선수는 과학을 종이비행기로 알려주고 있어요. 저는 가끔 ‘내가 좋은 다큐멘터리처럼 살고 있네’라고 생각합니다(웃음).”

종이비행기 국가대표 삼총사(왼쪽부터 이승훈, 이정욱, 김영준)는 “어떤 방향으로 날아갈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게 종이비행기의 매력”이라고 했다. 모두 조종사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견장에 금실로 짠 네 개의 줄이 반짝였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륙: 희망과 불안의 터뷸런스

세 청년은 2015년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처음 만났다. 이정욱씨는 실내에서 26초까지 오래 날려본 기록이 있다. 김영준씨의 멀리 날리기 최고 기록은 63m. 곡예비행은 창의성과 비행 성능, 퍼포먼스를 기준으로 채점한다.

-선발전을 앞두고 어떤 각오를 다졌습니까.

: “저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100명이 참가해서 내가 우승하면 의미 없고, 내가 우승 못 하더라도 1000명이 참가하는 게 낫다고, 그렇게 판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이비행기를 어떻게 접고 어떤 자세로 어떻게 날려야 하는지 제 노하우를 유튜브에 모두 공개했어요. 종이비행기 문화를 퍼뜨리고 싶었지요.”

: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친구가 대회 소식을 알려줬어요. 우승하면 오스트리아 세계 대회에 보내준다는 거예요. 우아, 멋지네! 제가 음악과 춤을 좋아해요. 장점을 살려 미니 뮤지컬처럼 구성했더니 1등을 했지요.”

: “진로 고민이 많았던 때예요. 다양한 스포츠 알바를 하다가 대회 소식을 듣고 경험 삼아 참가했습니다. 1차 시기엔 즐기자는 마음으로 던지니 좋은 기록이 나왔고, 2차 시기엔 욕심을 냈더니 파울을 범했어요(웃음).”

-종목별 국가 대표로 선발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날아갔는데.

: “레드불 페이퍼윙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대회예요. 국가 대표 선수들끼리 경쟁해 종목별 상위 10명만 결선에 진출합니다. 커다란 비행기 격납고에서 펼쳐지는데 결선에 오르면 태극기와 애국가와 함께 입장을 해요.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2022년 레드불 종이비행기 세계 대회 /레드불
 

-종이비행기 프로젝트를 설계한 사람은 이정욱 대표지요?

: “가는 비행기 안에서 제가 가진 꿈 이야기를 했어요. 당시 저는 졸업을 연기했고 두 사람은 학업이 1년 남은 상태였습니다. ‘내가 1년 동안 사업을 키워볼 테니 월급 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같이 일을 해보자’고 제안했지만, 저 또한 확신이 없으니 강하게 푸시하진 못했고요.”

: “저는 그 제안을 듣고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었어요. 학교로 돌아와 창업 지원과 창직 지원을 신청했더니 둘 다 뽑혔습니다. 잃을 것도 없으니 망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근거 없는 자신감이랄까, 재밌겠다는 마음 하나로 도전한 거예요.”

: “저는 경험해 보고 판단하는 성격이에요. 오스트리아 다녀와서 한강 종이비행기 축제에서 체험 부스를 운영했어요. 그때 ‘어, 이게 되네!’를 체감했지요. 종이비행기를 1~2년 해보고 안 되면 임용고시 보지 뭐, 그런 생각으로 동참했어요.”

-인생의 항로를 종이비행기로 바꿀 때 불안하지 않았나요? ‘그놈은 사기꾼이야!’ ‘멀쩡한 전공을 왜 버려?’라며 주변에서 말렸을 것 같습니다.

: “저희 부모님 반대가 제일 심했어요.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서, 설명하기도 어렵고 믿을 수가 없잖아요. 제주도에서 행사할 때 부모님을 초대해 보여드렸어요. 그다음부터는 ‘가치 있는 일’이라며 응원해 주셨습니다.”

 
 

: “부모님은 제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순탄하게 살기를 바라셨어요. ‘잘하면 대기업도 갈 수 있는데 웬 종이비행기냐’며 처음엔 만류하셨습니다. ‘휴학하고 2년만 투자하겠다. 혹시 안 되더라도 그 실패의 경험이 취업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득했지요.”

-위기는 없었나요? 10년째 이 일을 한 감회라면.

: “늘 위기였고 걱정이 많았죠. 저희처럼 작은 사업을 할 때는 ‘불안감을 얼마나 당연하게 안고 살아갈 수 있는가’가 중요해요. 저는 어릴 때부터 기초생활수급자라서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데 익숙했어요. 열심히 하느라 몸이나 마음이 축나지 않는지 살피곤 합니다.”

: “사업 초기에도 힘들었지만 코로나 때는 7개월간 일감이 없었어요. 하지만 온라인으로 방향을 돌려 예상보다 빨리 자리를 잡았습니다. 불안은 디폴트(기본값)라고 생각해요. 견디면서 성장했어요.”

국내에서 열린 종이비행기 날리기 행사 /위플레이
 

◇순항: 종이비행기 비수기는 없다

명함도 여권을 닮았다. 종이비행기 조종사지만 실제 파일럿처럼 브랜딩한 것이다. 이정욱 대표는 “이게 어떤 인사이트를 주는지 기업 특강이 들어온다”며 “사원들이 종이비행기를 함께 만들어 날리면 팀빌딩이 되니까 1년 내내 다양한 요청을 받는다”고 했다.

-팀 이름은 왜 ‘위플레이’인가요.

: “과학, 놀이, 스포츠 중에 무엇으로 접근할까 고민했어요. 축구도 처음에는 그냥 놀이였잖아요. 저희는 종이비행기를 이색 스포츠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혼자 날리는 것보다 함께 날리는 게 재미있으니까 ‘위플레이(WePlay)’가 된 거예요. 함께 놀자는 뜻으로.”

-종이비행기로 먹고살 수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 “종이비행기 대회 컨설팅과 행사 운영, 학교나 기업 특강, 교구 제작, 공연과 마케팅 등 수익을 창출할 길이 많아요. 순항 궤도까지 올려놓는 과정이 힘들었지요.”

-취미와 직업은 완전히 다를 텐데 장애물은 없었나요?

: “창업이란 것, 특히 존재하지 않는 분야의 창업은 참고할 통계도 레퍼런스도 없어요. 문어발처럼 운영하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저희는 한 가지 직업만으로 1년 내내 밥벌이를 할 수 없었어요. 모든 걸 다 배워야 한다는 게 버거웠습니다.”

: 다양한 사업으로 확장하려다 보니 저희와 협업하려는 사람들의 유혹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일종의 시험과 자격증을 만드는 거요. 잘 뿌리쳤으니 망정이지, 역량은 부족한데 돈을 빨리 벌고자 했다면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정욱 선수의 2016년 기네스 기록. 1분 동안 수박에 종이비행기를 던져 12개를 꽂았다.
 

-종이비행기는 과학과 스포츠의 집약체라서 항공역학까지 공부했다고요?

: “처음에는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지식을 습득했어요. 대부분 디자인만 예쁘고 기능은 없는 종이비행기들이었지요. 멀리, 오래, 멋지게 날리려면 저희만의 기체를 연구하고 개발해야 했습니다. 부메랑, 편대비행 같은 기술을 익혔고 세계 1위를 한 곡예비행에는 마술을 접목했어요.”

: “힘껏 던진다고 멀리 날아가는 건 아녜요. 종이비행기의 무게중심이 제힘을 온전히 전달받아야 합니다. 각도나 릴리스 포인트도 중요하고요.”

: “하루에 종이비행기 10대를 접었다고 치면, 저는 지난 20년간 8만대를 접은 셈이에요. 지금은 어떻게 접어야 기능이 잘 나온다는 것을 알지만, 때로는 저희가 아이들한테 배워요. 회원들을 ‘주니어 파일럿’이라 부르는데, 날려보고 꺾어보며 스스로 답을 찾습니다. 깜짝 놀랄 만큼 신박한 종이비행기를 접어 오고요.”

-종이비행기 시장이 급성장한 시기가 있습니까.

: “집콕하면서 온라인으로만 종이비행기를 즐기다 코로나가 끝나자 엄청난 인구가 유입됐어요. ‘축구하고 싶다’는 참을 수 있지만 ‘축구 마렵다’는 싸기 직전인 거 아시죠? 대회를 열면 5시간 만에 1000명이 마감돼요.”

: “정말 신기한 게 비수기는 없어요. 과학의 달 4월과 가정의 달 5월은 분신술을 써야 할 만큼 극성수기예요. 여름과 겨울에는 캠프가 열립니다. 행사나 강연 등이 한 달 평균 30건은 잡혀요. 75명 규모면 한 명, 150명 규모면 두 명, 그 이상의 큰 행사에는 삼총사가 출동합니다.”

: “2022년 레드불 페이퍼윙스 세계 대회에서 저희는 ‘오징어 게임’ 의상을 입고 등장해 눈길을 사로잡았어요. 곡예비행에서 역대 최고점(46점)으로 세계 챔피언이 됐을 땐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 방송에도 출연하고 주목을 많이 받았어요.”

마술을 접목한 곡예비행을 선보이는 이승훈 선수. 종이비행기 3개를 날려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해 잡는 '트리플' 기술 등을 보여줬다. 마술사 니키와 함께 훈련했다고 한다. /레드불
 

◇더 멀리, 더 오래, 더 멋지게

종잇조각으로 시장을 만들었다. 이승훈씨는 현재 세계 챔피언이고 이정욱씨는 1분 동안 종이비행기를 던져 수박 12개에 꽂은 기네스 기록을 가지고 있다.

-모든 직업에는 기쁨과 슬픔이 있는데.

: “무명 시절에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는 멸시를 받았어요. 종이비행기를 하루에 200개, 300개씩 납품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돈벌이로 접어야 할 때는 솔직히 지루해요. 하지만 더 잘 날리려고 종이비행기에 작은 튜닝(변화)을 줌으로써 목표를 이룰 때는 희열을 느껴요.”

: “사람들이 제 손을 떠난 종이비행기의 곡예를 보며 즐거워할 땐 늘 뿌듯합니다. 몸이 정상이 아닐 때도 스케줄대로 무대에 올라야 할 때는 슬프고요(웃음).”

: “언젠가 ‘돌이 없어져서 석기시대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종이비행기도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때로는 이색 스포츠로, 때로는 놀이로, 때로는 과학으로 옷을 갈아입듯이 변화하고 적응해 나가야죠.”

2022년 레드불 종이비행기 세계 대회에서 이승훈 선수의 깜짝 청혼 /레드불
 

-앞으로 또 어떤 비행 계획을 가지고 있나요?

: “멀리 날리기와 오래 날리기는 성적이 중요하지만 곡예비행은 달라요. 미디어아트와 결합한 퍼포먼스를 만들고 싶습니다. 종이비행기가 날아가다가 나비로 변한다든가 다양한 연출이 가능해요. 강연과 공연을 섞은 쇼도 반응이 좋더라고요.”

: “종이비행기 커뮤니티가 있고 마니아가 많아요. 처음에는 저 혼자 날렸지만 9년 전엔 1600명이 참여했고 지금은 7만명이 함께 날립니다. 종이비행기 마니아들이 실력을 인정받고 주목받을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당신에게 종이비행기란 무엇입니까.

: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순수한 동심을 유지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존재.”

: “종이비행기는 소고기다, 라고 답하겠습니다. 대충 구워도 맛있고 양념을 가미하지 않아도 되는 소고기처럼 종이비행기로는 뭘 해도 좋아해 주시니까요.”

: “드론이 훌라후프 10개를 통과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신기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이비행기로 하면 탄성을 질러요. 그 이유는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저에게 종이비행기란 ‘예측 불가능한 설레는 비행’이에요. 세상에 던져졌을 뿐 마음대로 잘 안 되는 인생처럼, 어떤 방향으로 날아갈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게 종이비행기의 가장 큰 매력이에요.”

종이비행기 국가대표 삼총사는 “종이비행기는 공룡 같은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평생 좋아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릴 적 공룡을 좋아했다가도 까먹고 살듯이, 30대 중후반에 다시 종이비행기를 접어 아이에게 알려주듯이,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그 순간의 동심이 충만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세 남자가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인생을 건 5g이 제각각 비행을 시작했다. 멀리, 오래, 멋지게.

 

5g짜리 종이비행기에 인생을 쏟아부은 세 청년 . 곡예비행 국가대표 이승훈, 멀리 날리기 국가대표 김영준, 오래 날리기 국가대표 이정욱 선수가 종이비행기에 인생을 걸은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