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앞둔 하월곡동 집창촌
‘건강한 약국’ 이미선 약사
미아리도 아니고 텍사스도 아니다. 그러나 ‘미아리 텍사스’로 불린다. 정체불명의 지명처럼, 이곳의 정체는 여전히 불명(不明)의 영역에 있다.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88-1번지. 사람의 몸을 사고파는 재래시장, 환락과 환멸의 거처마다 ‘미성년자 출입 금지 구역’ 표지판이 붙어 있다. 붉은 천막 아래 다닥다닥 은신한 성매매 업소. 서낭당에나 걸려 있을 법한 기다란 천 조각이 골목 입구에서 장막처럼 햇빛을 차단하고 있다.
2005년부터 추진된 재개발 계획, 최종 이주 완료 기한이 지난 2월이었다. ‘공가(空家)’라고 적힌 빈 건물이 늘었지만, 보상금을 요구하며 업소 수십 곳이 버티고 있다. 유곽의 여자들이 밤마다 손님을 받는다. 아프게 신음하는 자들이 진창에 있다. 그래서 약국이 이곳에 있다. 이미선(63) 약사는 “아직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며 “나마저 외면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병원도 없는 후미진 집창촌 골목에서 ‘건강한 약국’이 문을 여는 이유다. 30년째.
◇솜털 보송한 여자애가 들어왔다
“여기는 제 고향이에요”라고 이씨가 말했다. “제가 다녔던 교회 유치원이 지금도 있어요. 월곡교회 2회 졸업생이거든요. 동네 건물은 별로 변한 게 없어요.” 한때 정릉천이 흐르고, 강물에 빨래를 하고, 솥을 걸어 국수 삶아 먹던 곳. 고운 한복 차림의 언니들이 모여들자 동네는 표정을 바꿨다. “가장 흥했던 시절은 1980년대 후반인 것 같아요. 동네 개들도 지폐를 물고 다녔대요.” 1994년 이곳에 약국을 차렸다.
–왜 여기였나요?
“빚 때문에. 남편 사업이 잘 안됐거든요. 결혼하고 인천 살 때였는데 부채가 아파트 두 채 값이었죠. 그래서 귀향한 거예요. 이혼하고 부모님 계시던 이곳으로. 어머니 지인 분이 여기 건물을 갖고 계셨는데, 몇 달은 월세 안 받을 테니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허덕이며 살았네요. 인테리어 업체에서 ‘약사님도 참 딱하우’ 하면서 대금을 두 달 뒤에 받아갈 정도로.”
대로변도 아니고 근처에 병원도 없다. 장사가 잘되기 어려운 위치. 대책이 없었다. 신용불량자 처지에, 어린 아들까지. 하루에 20시간씩 일했다. 밤 손님이 많았으니까. 한약 조제까지 병행했다.
–빚 독촉이 심했다고요.
“당시에는 채무자 보호가 거의 안됐어요. 대형 카드사에서도 전화로 욕이란 욕은 다 하더라고요. 아들 학교 찾아간다고도 하고…. 여기 아가씨 대부분이 신용불량자 상태로 와요. 그 마음 내가 알죠. 겪어봤으니까. 얼마나 사람 미치게 하는지.”
–그들이 주 고객인가요?
“여기 일하는 여성이 8할. 아가씨들 머리 해주는 미용 이모, 삐끼 이모…. 동네 주민들도 오고요.”
–‘진상’ 손님은 없나요?
“많았죠. 술 먹고 와서는 비아그라 내놓으라고. 처방전도 없이. 그럼 의자에서 딱 일어서요. 깔아서 뭉개려고요. 제가 만만한 사이즈는 아니거든요. 그러다 몇 번 맞은 적도 있어요. “내가 오늘 저놈 죽인다”고 펄펄 뛰었더니, 나중에 후배가 알려주더라고요. 주먹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가끔 펀치 연습도 해요.” 직접 시범을 보여줬다. 맞으면 제법 아플 것 같았다.
정신없이 일한 지 1년 남짓, 한밤에 한 여자애가 약국에 들어왔다. 딱 봐도 미성년이었다. 목덜미에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애들이 겁에 질리면 몸에 털이 바짝 솟아요. 집은 나왔지 갈 데는 없지…. 여태 어디 있었냐고 했더니, 동대문 상가 쪽에서 노숙을 했대요. 새벽에 한번 가봤어요. 진짜 두더지 새끼들마냥 모여서 자고 있더라고요. 춥고 배고프니까 여기까지 온 거예요.”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나요?
“웬 여자애가 피임약을 달래요. 이거 먹으면 오늘부터 피임 되는 거냐면서. 생리 주기에 맞춰서 먹어야 하는데, 얘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휴대폰 요금 폭탄이 사회적 문제였어요. 게임하다가 300만원 나오고, 엄마한테 혼날까 봐 그 돈 벌겠다고 도망쳐 나온 애도 있었어요. 걔 손잡고 제가 그랬어요. 오래 있지 마. 빨리 나가. 여긴 1년이 10년 같은 곳이야.” 결국 나가지 못했다. “그들이 내 삶의 흐름을 조금씩 바꿔놨다”고 이씨는 말했다.
–연령대가 어떻게 되나요?
“예전에는 10대도 제법 됐어요. 이 일이 뭔지도 모르고 몇 달만 벌고 나간다고. 이제 그런 경우는 없어요. 20대도 없고,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줄긴 했어도 ‘뉴 페이스’가 계속 보여요. 돈 때문이죠. 여긴 늪이에요.”
–왜 늪인가요?
“계속 발목이 빠지니까요. 감금되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아가씨들, 현대백화점도 가고 이마트도 가요. 그런데 여기 오래 있으면 세상을 몰라요. 사람을 어떻게 만나고 대화하고 관계를 쌓는지 아예 모르는 거예요. 편의점 알바조차 할 생각을 못해요.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되는 거죠. 왜 남녀가 평등한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거창하게는 인문학 교육, 소박하게는 사회 소통 훈련이 제공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요.”
올해는 ‘성매매 방지 특별법’ 시행 20년이 되는 해다. ‘성매매 피해자 및 성을 파는 행위를 한 자의 보호와 자립의 지원을 목적으로 제정된’ 법률. 이 일대 도시환경정비조합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성매매 업소는 116곳, 실제 영업이 이뤄지는 곳은 30여 군데로 추정된다. “대책 없이 떠나게 될 경우 여자들은 더 지하로 갈 것”이라고 이씨는 말했다.
◇구치소에서 배운, 몸 녹이는 ‘약손’
숙명여대 80학번, 열렬한 운동권이었다. 결혼 전에는 인천에서 노동 운동도 했다. 이씨는 “세상이 거지같았다”고 했다. “제가 뭔가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높은 편이에요.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한 인지 속도가 빨라요. 눈물이 많아요. 얼마 전에 친하게 지내던 교회 집사님이 돌아가셨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울었어요. 눈이 어찌나 아프던지….”
–왜 약대를 가셨습니까.
“집이 어려웠어요. 수학·과학을 좋아해서 집 근처 고려대 물리학과 가려고 했는데, 여자가 돈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약사니까 약대를 가라고 어머니가 권하셨죠. 네가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전형적인 ‘K–장녀’랄까요.”
–데모는 왜….
“그때는 그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였어요. 한 달에 한 번은 시위 나간 것 같아요. 4학년 때는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까지 됐어요.”
–수감 생활을 하셨나요?
“서울구치소로 갔어요. 미결수일 때는 여럿이 한방을 쓰거든요. 거기 같이 있던 언니가 안마를 가르쳐줬어요. 제가 여자 치고는 손도 크고 뼈가 굵거든요. 힘이 좀 세요.”
어느 날, 한 아가씨가 약국에 들어왔다. 픽 주저앉았다. “일단 119를 불렀어요. 그 사이에 목을 풀어주는데, 얼마나 딱딱하던지요. 꾹꾹 정성껏 만져주니까 울더라고요. 울음의 의미를 대충은 알 것 같았어요. 이 일을 오래한 애였는데, 성격이 방실방실한 편이 아니거든요. 사는 게 얼마나 버거웠겠어요. 여기 여자들이 많이 아파요.”
–주로 어디가 아픈가요?
“근육통이나 몸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소화불량. 비타민을 많이 줘요. 되게 피곤해하거든요.” 인터뷰를 진행한 지난 4일, 한 여성이 약국에 들어왔다. “소염제 좀 주세요.” 귀 뚫은 자리가 아프다고 했다. 말투가 어눌했다. 이씨가 “소독도 하고 연고도 발라야 한다”면서 약을 건넸다. “(저분) 여기서 30년 가까이 일했을 거예요. 대부분 학력이 낮아요. 양아치들한테 이용도 잘 당하고.”
처음부터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건 아니었다. “솔직히 나 살기 바빴다”고 했다. 2005년, 약국 앞 건물에서 큰불이 났다. 성매매 여성 5명이 사망했다. “그날 시신을 봤어요. 약국에서 막 친해진 여자도 있었어요. 전남편한테서 딸 양육권 가져오려고, 빨리 돈 모으려고 들어온 여자. 보름 만에 죽어서 나간 거예요. 조금 더 얘기 들어줄 걸, 뭐라도 더 줄 걸….” 부채감이 생겼다. 동네의 동정에 더 깊숙이 관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이 이씨를 ‘약사 이모’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이 오십에 딴 사회복지사 자격증
약국 외벽에는 ‘건강한 상담센터’라는 나무 명패가 걸려 있었다. 지난 겨울 한 취객이 깨뜨리는 바람에 잠시 떼어두긴 했지만. 여덟 평 남짓한 실내에 들어서면 조제실 앞에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이 보인다. “50세 때 땄어요. 간판 불 끄고 하루 3시간씩 3개월 바짝 공부했어요.” 누구나 이곳에 들러 고민을 털어놓고 솔루션도 얻어갈 수 있다. 물론 공짜로.
–왜 자격증까지 따셨나요.
“본격적으로 얘기 들어주려고요. 이곳 사람들은 주민센터 가는 것도 무서워해요. 잔뜩 주눅이 들어 있어요. 수급권자 신청하는 법도 몰라요. 아픈 노모를 모시는 여성은 ‘노인 장기 요양’ 등급 받게 하고, 돌봄 서비스 혜택 알려주고요.”
–상담 주제는요?
“가족이 나를 무시한다, 배우자가 용서가 안 된다, 외롭다…. 제발 버려라, 이게 제가 드리는 조언의 90%예요. 쓸데없는 집착 다 버리라고. 지지고 볶아도 오래 못 사는 게 인간이라고. 나를 보라고, 여러 상황 다 끌어안고 살았으면 머리가 터져버렸을 거라고. 쓰레기통을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있나요? 버리는 훈련을 해야 돼요.”
–어떻게요?
“손바닥을 펴세요. 거기 감정을 집중해서 올려놓고 보자기처럼 꽉 쥐세요. 그걸 손가락으로 튕기세요. 모든 인간관계는 훈련이에요. 그게 안 되면 지옥에서 살아야 합니다.”
–책방도 운영하시죠?
“집에 책이 많아서 정리할 겸 약국 한쪽에 100권 정도 갖다 놓은 거예요. 아가씨들이 과연 책을 볼까? 반신반의했죠. 근데 빌려가요. 추천해달라고도 하고.”
–가장 인기있는 책은요?
“만화책이죠. ‘신의 물방울’ ‘몬스터’ ‘불의 검’…. 저도 만화방 자주 가거든요. 제일 좋아하는 건 김혜린의 ‘북해의 별’. 근데 얼마 전에 누가 전집(全集)째 빌려가서는 연락 두절됐어요.”
–가끔 화도 나시겠어요.
“대학 다닐 때 과외를 많이 했어요. 공부 못하는 애들 있잖아요. 몇 번을 알려줘도 모르는 애들. 한 번도 안 다그쳤어요. 걔가 더 갑갑할 테니까. 힘들게 벌어서는 엄한 데 빨대 꽂히는 인생, 걔네가 더 답답하지…. 나까지 돌 던지지 말자. 질책은 쉽다, 손잡고 울어주는 게 어렵다.”
여전히 갈피 못 잡는 자들, 여전히 우매하고, 밑바닥에서 삶을 탕진하는 자들은 있다. 그러나 스스로 늪에서 빠져나오는 이들이 있다. 그 몇 건의 실례(實例)가 이씨를 회의주의에서 건져올린다. “2년 전 머리핀 사러 명동의 한 가게에 들어갔어요. 여기서 일하던 친구가 있는 거예요. 놀라서 꼭 껴안았어요. 착한 신랑 만나 시집가거나 미용사가 된 친구도 있죠. 사람은 변할 수 있어요. 자활을 돕는 교육이 절실해요. 현찰 몇 푼보다 그런 통로가 더 중요해요. 제가 매니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친 동료 물 위로 올려주는 고래처럼
돌고래류(類)는 독특한 무리 행동을 한다. 가족이나 동료가 다치면 그의 몸 밑으로 가서는 수면으로 밀어올린다. 숨쉴 수 있도록 몇 번이고. 이씨는 2021년 출범 당시부터 ‘푸른 고래 리커버리 센터’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립 은둔 청년과 자립 준비 청년들을 돕는 비영리단체다.
–어떤 일을 하시나요?
“보육원 갓 졸업해 홀로서기를 준비하거나, 어떤 사건으로 방에 틀어박히게 된 은둔형 외톨이들을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거예요.”
공동 생활을 지원하고,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직업 교육을 연계한다. 간혹 머물 집을 구해주기도 한다. “춘천의 한 후원자 분이 27평짜리 아파트를 무상으로 빌려주시겠다고 했어요. 근데 반(半)상근 스태프 인건비에 이런저런 공과금까지 한 달에 150만원이 들어요. 집은 있는데 집을 유지할 형편이 안 되는 상황이에요.” 너나없이 힘든 시절, 그래도 나눈다.
–노숙자 후원도 하신다고요.
“서울 보문동에 ‘바하밥집’이 있어요. 음식과 생필품 나눠주고, 주민등록 말소된 분들은 살려주고, 병원도 연결해주고. 10년 됐네요. 한 달에 한 번은 제가 뭔가를 제공해요.”
–파스 나눠주는 유일한 밥집이죠?
“제가 약사잖아요. 다른 데서는 아무리 싸게 사도 개당 3000원은 줘야 돼요. 저는 좀 더 저렴하게 구할 수 있죠. 파스 나눠주는 날은 줄이 훨씬 길대요. 아무래도 쭈그려 자는 경우가 많으니 인기 최고죠. 쌍화탕도 잘 나가고요.”
–투약 봉사는 뭔가요?
“이것저것 많이도 하죠? ‘라파엘 나눔 홈리스 클리닉’이에요. 명동성당 앞에 텐트 치고, 주로 가난한 어르신들 복약 지도 해드려요. 약도 제대로 드셔야 하니까요. 눈이 잘 안 보여 헷갈려 하거나 과다 복용하는 분들이 있거든요.”
아픈 미얀마 노동자들에게 1년간 한약을 공짜로 지어 먹이고, 일면식도 없는 지인의 언니가 열병을 앓는다는 소식에 중고 에어컨을 구해다 설치까지 해준 오지랖 넓은 여자. “이 동네 철거되면 약국 접으려고 했어요. 지방에서 ‘근무 약사’나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열심히 기도했어요. 응답이 왔어요. 계속 약국 하라고.”
–후회한 적 없으세요?
“친구들은 저보고 미쳤다고 하죠. 한 달에 200만원 정도 벌거든요. 대형 약국 하는 친구는 ‘여기 오면 최소 두 배는 번다’고 오라고 하고. 돈만 좇았다면 다른 인생 살았겠죠. 그래도 먹고살 만해요.”
–아프신 데는요?
“건강 체질이에요. 하나님이 얼마나 더 부려 먹으시려는지.”
‘건강한 약국’은 다음 달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철거에 대비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가까운 곳이다. “아가씨들이 찾아올 수 있어야 하니까요. 조금 더 나이 먹으면 제가 후원하는 미혼모 모녀 곁으로 가려고요. 지금 초등학교 1학년인데, 그 꼬마의 할머니로 살아가는 게 마지막 소망이에요.” 말을 마치자마자 한 노인이 약국 앞을 지나갔다. 이씨가 우렁차게 외쳤다. “이모, 약 잘 챙겨 먹어야 돼요!” 목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그래야 잘 들리죠.”
–근데요, 왜 ‘건강한 약국’이에요?
“건강하면 좋잖아요. 세상이 건강해지는 데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다시 봄이 왔다. 봄에도 누군가는 아프다. 그 유구한 아픔의 역사를 끊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옆에서 다독일 수는 있다. 너무 오래 아프지는 말라고.
여기, 약이 있으니까.
정상혁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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