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한줄명상]
“그릇을 크게 가져라”
#풍경1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는
독립운동가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의
배후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폭탄 사건과
연루돼 4년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도 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았던 거물입니다.
도산 안창호는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항일 독립운동의 배후로 지목돼 체포되기도 했다. [중앙포토]
도산 선생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청ㆍ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국력 배양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평양에서 서울로 왔습니다.
안창호는 당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했습니다.
거기서 3년간 공부하며
서구 문물을 접하고 기독교인이 됐습니다.
그 뒤에는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신민회 등에서
활약했습니다.
1902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가,
을사조약(1905년 11월)의 비보를 듣고
구국 운동을 펼치고자 돌아왔습니다.
그런 도산 선생이 평양 부근의 송산리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장소는 송산리 교회였습니다.
이 설교가 도산 안창호의 마지막 설교,
마지막 강연이었습니다.
저는 참 궁금합니다.
도산 선생은 목사가 아닙니다.
종교인도 아닙니다.
오히려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설교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어떤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던졌을까.
그의 마지막 설교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라도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형석 교수는 간디, 톨스토이와 함께 도산 안창호를 마음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중앙포토]
그런데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도산 선생의 마지막 설교를
송산리 교회에서 직접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고요?
다름 아닌 올해 102세인
김형석(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입니다.
#풍경2
김형석 교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마지막 설교에서 남긴
메시지를 말입니다.
커피숍에서 마주 앉은 김형석 교수는
차분하게 당시 설교 현장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송산리 교회에는 청중이 200명 정도 모였다.
도산 선생은 1시간가량 설교를 하셨다.
당시 교회에서 하던 설교 시간으로 따지면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김형석 교수도 크리스천입니다.
그를 기독교로 인도한 두 분의 목사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도산 선생 이야기를 할 때
존경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1918년 도산 안창호 선생 가족. 왼쪽부터 안필선, 도산 선생, 안수라, 안필립, 안수산, 이혜련 여사. [사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내게 신앙을 가르쳐주신 분은 두 목사님이다.
두 분 다 말년에 그렇게 존경받는
크리스천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신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닌
도산 선생의 설교는 다르더라.”
무엇이 그렇게 달랐을까요.
목회자의 설교보다
더 깊이,
더 강하게 ,
더 울림 있게
열일곱 김형석의 가슴을 적신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풍경3
김형석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목사님들의 설교는 비슷비슷했다.
주로 교회 이야기를 하거나
기독교의 교리 이야기를 했다.
도산 선생의 설교는 달랐다.
그는 ‘우리 사랑하자’고 웅변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라고 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해주시는 것과
같다고 했다.”
김형석 교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설교는 달랐다. 나는 그런 설교를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초롱초롱한 눈으로 당시를 회고하던
김형석 교수는 힘주어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설교를 들은 적이 없었다.
‘저 어른은 애국심이 있어서,
기독교를 저렇게 크게 받아들였구나’ 싶었다.”
김 교수는 그때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신학자다, 장로다, 목사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더라.
신앙에도 ‘그릇의 크기’가 있더라.”
그 말을 듣고서 저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인터뷰 중간에 짧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릇의 크기’라는 말이
제 가슴에 날아와
깊숙이 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다 같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불교인이라고
다 같은 불교인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릇의 크기’가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앞줄)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 형무소에서 두 차례에 걸쳐 4년이 넘는 옥살이를 했다. [사진 흥사단]
예수님은 어땠을까요.
그가 가진 ‘그릇의 크기’는 얼마만큼이었을까요.
또 석가모니 붓다는 어땠을까요.
그의 내면을 담아내는 그릇은
과연 얼마만 한 크기였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너무 쉽게
마침표를 찍습니다.
세례를 받았고,
교회에 다니니까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겠지.
그렇게 마침표를 꾸욱 찍고서
내 신앙의 크기,
내 그릇의 크기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걸 더 키우고, 더 넓혀나갈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신앙에도 그릇의 크기가 있다”는
김형석 교수의 일갈은
아프게 날아와 박힙니다.
김 교수는 “그릇을 크게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큰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릇이 작으면 작은 신앙밖에 못 가진다.
기독교 장로였던 고당 조만식(1883~1950) 선생이나
도산 안창호 선생은 그릇이 컸다.
그들의 그릇은 민족과 나라를 생각하는 그릇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컸겠나.
그릇이 큰 만큼,
기독교 신앙 역시 그들은 크게 받아들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의 사진. 앞줄 가운데가 도산 안창호다. [사진 흥사단]
물론 작은 그릇, 작은 신앙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작은 신앙이 뭔가.
교회만 생각하고,
교회만 위하는 신앙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라.
지금도 작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나.”
#풍경4
도산 안창호 선생은 평양 근처 송산리 교회에서
마지막 강연을 하고서
8개월쯤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차례의 옥살이로 건강이
무척 악화한 상태였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두 차례 옥살이를 한 도산 안창호의 여윈 모습이다. [사진 흥사단]
지금 돌이켜봐도
도산 선생은 큰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거인을 아쉬워하고,
또 그리워하면서 푸념합니다.
종교계도 그렇고,
정치권도 그렇습니다.
왜 이 시대에는 큰 인물이 없느냐고,
왜 갈수록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도산 선생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 자신의 어록에 남겼습니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이
인물이 되려고 노력을 하지 않지 않는가.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도산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서
대한의 후손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공적은 ‘우리’에게로 돌리고
책임은 ‘나’에게로 돌리자.”
지금 되씹어봐도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조언입니다.
공적은 ‘나’에게로 돌리고
책임은 ‘우리’에게 돌리는
2022년 대한민국 정치인들을 향한
뼈아픈 충고로 들립니다.
결국 ‘그릇의 크기’더군요.
우리가 크게 보고
크게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입니다.
종교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습니다.
김형석 교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설교가 목사님 설교보다 더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도산 선생은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남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 해서
그를 미워하는 편협한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면
세상에 화평이 있을 것이다.”
나의 편,
나의 신앙,
나의 진영만 담아내는
작은 그릇을 가진 우리에게
도산 안창호 선생은 ‘큰 그릇’을 가지라고
간곡하게 말합니다.
〈‘백성호의 한줄명상’은 매주 수요일 연재〉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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