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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유럽 최강이었는데…우크라 군 몰락이 한국에 준 교훈

해암도 2022. 2. 24. 06:58

 [Foucs 인사이드]

 

1991년 독립 당시 우크라이나의 재래식 군사력은 유럽에서 최강이었다. 당시 총 병력 78만명, 전차 6500대, 장갑차량 7000대, 화포 7200문, 항공기 2000대 등을 보유했다. 이는 1991년 걸프 전쟁에 투입된 다국적군(미군 포함)보다 큰 규모의 군사력이었다.

러시아의 침공 위기가 높아지면서 우크라이나 국민이 자기 고장을 지키겠다며 군사 훈련을 받고 있다. 총기가 모자라 나무총을 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로이터=연합

 

그리고 23년이 지났다. 2014년 3월 11일, 크림 반도를 상실할 위기에 직면할 때 우크라이나의 이고르 텐유크 국방부 장관이 의회에 보고한 실상은 충격적이었다. 전체 병력 20만명 가운데 즉각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6000명이 전부였다. 전차ㆍ장갑차 등 기동장비는 연료가 부족했고, 배터리는 제거돼 있었다. 600대의 항공기 중에서 가동 가능한 것은 100대 미만이었다.

 

유럽 최강 수준의 재래식 군사력을 보유한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국가로 전락한 것이다. 인류 역사상 그렇게 강력했던 군대가 이렇게 빨리 몰락했던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크라이나군 붕괴, 어떻게 시작됐나

우크라이나 군대의 붕괴 과정은 크게 2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기간은 1991년 독립부터 2005년의 오렌지 혁명까지이고, 두 번째 기간은 이후부터 2014년 크림 반도 사태까지다.

우크라이나군이 감군 과정에서 폐기한 T-72 탱크들. trip.com

첫 번째 기간(1991~2005) 동안, 우크라이나 정부는 소련식 동원시스템을 유지한 가운데 단순하게 군대 규모를 줄이는 데 집중했다. 대규모 동원 체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즉시 전투력 발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체 병력 규모는 2001년까지 40만명으로 줄었다가, 추가 감축을 통해 2005년에는 25만명이 됐다.

징병제도는 그대로 유지됐으나, 면제 대상을 확대하면서 질적 수준이 급속히 떨어졌다. 장비는 전차 3000대, 장갑차 4200대, 화포 3400문, 항공기 750대로 감소했다. ‘정비’는 고사하고 ‘폐기’ 예산조차 확보할 수 없었던 장비는 방치되다시피 했다.

 

두 번째 기간(2006~2014) 동안, 우크라이나 정부는 나토(NATOㆍ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추진했다. 전체 부대를 ‘제병협동신속대응부대(JRRF)’와 ‘일반방어부대(GDF)’로 이원화(二元化)했다.

전자를 평시부터 병력ㆍ장비를 완전하게 충원한 뒤 위기가 발생할 경우 즉각 투입한다는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실제 병력ㆍ장비의 충원 비율이 70% 수준에 불과했다. 규모도 2만 4000명(전체의 10%)이어서 결정적인 전투력이 될 수는 없었다.

 

후자는 대부분(전체의 90%)의 부대들이 포함됐으며, 병력ㆍ장비 충원 비율이 20~50% 수준에 불과했다. 최소 수 주일 동안의 대규모 동원을 통해서만 전투력 발휘가 가능했다.

 

2009년에 불어 닥친 세계적인 금융위기는 국방 예산 부족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부족한 국방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군사 장비를 ‘잉여장비’라는 명목으로 해외에 매각했다. 2011년 우크라이나 직업 군인의 봉급은 러시아 직업군인의 3분의1 수준으로 저하됐다. 대대 단위 이상 훈련은 사실상 중단됐다.

 

2013년 10월 우크라이나 정부는 최소한의 준비기간도 없이 ‘징병제’를 폐지(2014년 1월 1일 부)하고 ‘모병제’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2014년도 크림 반도 위기에서 우크라이나군은 어떠한 조치도 실행할 능력이 없었다. 특히, 크림 반도에 주둔했던 우크라이나 군인 대부분이 저항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군인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만약 위기의 초기 단계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제대로 대응했더라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군 투입을 승인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러시아의 크림 반도 병합을 도운 것은 다름 아닌 ‘우크라이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군은 크림 반도를 상실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좌절을 경험했다. 이후 기간은 2개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기간은 2014년 4월부터 2021년 10월까지이고, 두 번째 기간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대규모 군사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한 그해 11월부터 현재까지이다.

2015년 친러 반군이 파괴한 우크라이나군 탱크를 살펴보고 있다. AP=연합

 

첫 번째 기간 (2014년 4월~2021년 10월) 동안, 우크라이나군은 동부 지역 반군을 상대로 한 군사 작전에 집중했다. 하지만 2014년 7~8월, 공세에 나선 우크라이나군은 많은 병력과 중장비의 손실을 보고 사실상 패배했다.

2014년 한 해 동안 병력 보충을 위한 ‘부분 동원령’을 3차례나 했지만, 소집한 병력의 규모와 질적 수준은 지극히 낮았다. 2014년 8월, 불과 1년 전에 폐지했던 ‘징병제’를 부활할 수밖에 없었다.

 

2014년 한 해 동안 우크라이나군 전차 150대 이상이 반군에 의해 파괴ㆍ노획됐으며, 항공기도 20여대나 격추됐다. 우크라이나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잉여장비’로 판매할 예정이었던 장비를 작전 부대로 전환하고, 서방국가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경험이 쌓이면서 우크라이나군의 ‘전문성’은 점진적으로 올라갔다. 2018년 우크라이나군 합동작전사령부 창설은 육ㆍ해ㆍ공군의 합동작전 수행능력을 향상했다. 병역제도는 ‘징병제’(18개월)를 유지한 상태에서 ‘계약’을 통한 직업 군인의 규모를 늘리면서 부분적인 전문성 향상 효과를 가져왔다. 현재 전체 병력 25만명 가운데 직업 군인으로 입대한 장병은 6만명(전체의 약 24%)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돈바스 교전 지역에 계약을 통해 입대한 직업군인들만 투입하고 있다.

 

두 번째 기간(2021년 11월~현재) 동안,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 정규군의 전면적인 침공에 대비하고 있다. 2021년 11월부터, 10만 이상의 대규모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지역에 집결했다. 돈바스 지역 반군과는 차원이 다른 위협이었다. 이에 서방국가들도 보다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언론을 분석해보면, 재블린ㆍNLAW 대전차 유도미사일 수 천발과 스팅어 단거리 지대공미사일 등을 포함한 다양한 무기 체계가 우크라이나군에 지원되고 있다.

 

만약 러시아 군이 대규모로 침공한다면 우크라이나군이 이를 막아낼 수 있을까? 대부분의 군사 전문가들은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부에선 러시아군의 진출 속도를 일정 기간 지연시키기조차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특정 무기 체계가 개별적으로 발휘하는 전투력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무기 체계는 전투의지를 가진 병사ㆍ부대조직과 시스템적으로 결합해야 전투력 상승효과(Synergy Effect)를 발휘할 수 있다.

한국의 국방혁신에 주는 시사점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오늘의 불행은 과거에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라고 말한 바 있다. 국가도 개인과 동일하다. 특히 국가의 존망과 직결한 국방의 문제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군의 ‘잃어버린 30년’이 한국의 국방 혁신에 주는 시사점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우크라이나군이 영국이 지원한 NLAW 대전차 유도미사일 발사 훈련을 하고 있다. AP=연합

 

첫째, 위협의 본질은 상대방 ‘의도’가 아니라 ‘능력’이다. 상대방 ‘의도’는 언제나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선의’를 믿고 위협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1952년 3월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독일의 중립화를 수용하면, 동서독 통일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재무장도 허용하겠다”는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내놓은 파격적인 제안(일명 ‘스탈린 노트’)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의 통찰과 결단은 우크라이나 정치 지도자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전략적 사고(Strategic Thinking)의 중요성이다. 전략은 ‘목표ㆍ수단ㆍ방법’이라는 3가지 요소의 ‘균형성’과 ‘연계성’ 유지가 핵심이다.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은 국방의 ‘목표’를 ‘NATO 가입’과 동일시 한 것은 아닐까? 즉, NATO 가입이 국방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을 수도 있다. “1년 만에 강력한 육군을 만들 수 있다” 혹은 “20년 단위의 대규모 함정 건조 계획을 추진하겠다” 등 어느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호언은 ‘수단’의 가용성을 무시한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했다.

 

주요 무기체계를 ‘잉여장비’라는 명목으로 외국에 팔고, 군대의 규모 축소에만 집중하는 것은 ‘방법’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전략적 사고의 부재가 우크라이나 군의 붕괴를 가속화했다고 생각한다.

 

셋째, ‘유형전력’도 중요하지만 이와 연계한 ‘무형전력’이 더욱 중요하다. 통상, 이 두 가지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거나 ‘무형전력’을 ‘정신전력’으로 축소ㆍ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전투현장에서 발휘되는 현실적인 무형전력은 내가 적보다 우수한 무기체계(유형전력)를 가졌다는 자신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무형전력’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정신전력’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운용능력’이다. 이는 장기간의 체계적 교육과 실전적 훈련을 통해서만 체득할 수 있다. 더욱이 그 어떤 동맹국가도 이를 지원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갖출 수밖에 없다. 국방혁신을 추진하는 지도자들이 ‘무형전력’에 대해 더욱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국방혁신이 시대적 사명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의 ‘잃어버린 30년’이 한국의 국방혁신에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기를 바란다.

 

 

방종관 한국국방연구원 객원연구원ㆍ예비역 육군 소장    중앙일보     입력 2022.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