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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靑서 은밀히 北영화 봤다···그를 움직인 의외 인물들

해암도 2022. 1. 29. 09:28

해외 유치과학자 1호 김재관 박사와 홍용식 교수의 숨은 이야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초기의 주역들. 앞줄 중앙이 당시 최형섭소장, 성기수, 전무식, 채영복, 양재현, 정만영, 윤영경, 김은영, 윤용구박사와 작고한 장경택, 최상, 정원, 현경호, 천병두박사의 모습도 보인다. 원 안이 김재관 박사. [중앙포토]

1979년 2월 22일 KIST를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오른쪽)에게 김재관 박사(왼쪽)가 중공업 육성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한국 산업화의 숨은 설계자들 

 포항제철의 설립자 박태준, 한국 최초의 고유 승용차 모델 포니를 만든 정세영(포니 정), 조선소를 세우기도 전에 영국에 500원짜리 지폐 속 거북선을 보여주고 차관을 빌려와 울산 미포만에서 유조선을 만든 정주영….  의류ㆍ가발 수출 등 경공업으로 근근이 먹고살던 한국이 어느날 중화학공업 국가로 변신할 수 있었던 건 이들과 같은 산업화의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이란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중공업 입국이 이들 불세출(不世出) 영웅의 힘만으로 가능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이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건,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시대에도 못 미치던 보릿고개 시절 유학을 떠났다가 ‘해외 유치과학자’ 신분으로 돌아온 과학기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은 그 시절 실질적인 ‘한국산업화의 설계자’ 역할을 했던 김재관(1933~2017) 박사의 비사(祕事)를 발굴한 책이다.

단행본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 박정희 대통령 당시 해외 유치과학자 1호로 귀국한 김재관 박사의 비사를 담았다.

북한이 한국보다 3배는 잘 살던 시절

책 속에는 1960~70년대 한국의 현실이 한 편의 영화처럼 담겨있다.


‘1972년 어느 날 청와대 한켠에서 영화가 상영됐다. 시중에서 볼 수 있는 상업영화도 해외 유명영화도 아니었다. 그날 청와대에서 흘러나온 영상은 바로 북한이 만든 것이었다. 북한의 공업화 현황을 컬러 필름으로 제작해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홍보영상이었다. 북한이 지은 최첨단 공장들의 모습이 소개되었고, 김일성이 그 공장들을 찾아가 시찰하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 자리는 그 자체로 국무회의였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부총리 및 각부 장관들이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영화를 보는 내내 무거운 얼굴로 담배를 뻐끔뻐끔 피웠다. 공업을 비롯해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다 본 대통령의 표정은 침통했다.…’


1970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42달러에 불과했다. 북한은 740달러로 남한을 3배를 넘는 시절이었다. 북한에는 일제가 버리고 떠난 수력발전소와 제철소ㆍ비료공장 등이 가동되고 있었다. 흥남비료공장은 아시아 최대 질소비료공장이었고, 압록강을 막은 수풍댐 역시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 (163쪽)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를 위한 인재와 돈이 필요했다. 앞서 1964년 12월 박 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과 차관 도입을 위해 당시 서독을 찾았다. 귀국길엔 뮌헨에 들러 유학생ㆍ교민 만찬에 참석했다. ‘대통령이 광부ㆍ간호사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는 그 자리다. 이 자리에서 여태껏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한국 현대사를 바꾼 일화가 있었다. 1950년대 독일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뮌헨대학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금속재료 전문가 김재관 박사와 박 대통령의 만남이다. 김 박사는 당시 서독 철강회사 데마크를 거쳐 뮌헨공대 금속연구소 연구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혹 저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해주십시오”라고 물은 박 대통령에게 ‘한국의 철강공업 육성방안’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전달한다.


“각하, 철강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필수이고 기반입니다. 자금이 많이 들어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사업입니다. 혹시라도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 김재관 박사는 독일 유학 중 배운 첨단 철강 이론뿐 아니라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중화학공업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선 독일의 모습을 보면서, 산업화의 바탕이 되는 철강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1964년 독일 뮌헨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현지 호텔에서 한국 유학생들과 조찬을 하고 있다. 김재관가 박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올린 장소다.

제철소·조선소·자동차도 김재관 박사의 기획

김재관 박사는 당시 ‘박 대통령과 뮌헨에서 만남이 계기기 돼, KIST 창립 이듬해인 1967년 고국으로 돌아온다. 해외 유치과학자 1호, 국내 최고의 제철, 특히 특수강 전문가 자격이었다. 이후 KIST 제1연구부장과 특수기자재 연구실장, 상공부 초대 중공업차관보, 국방과학연구소(ADD) 부소장, 표준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설립된 국내 최초 종합제철회사인 포항제철은 차관을 제공한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강 기준 연간 100만t을 생산하는 종합제철소로 지어져야 한다는 김 박사의 집념이 실현된 사례다. 종합제철소가 있어야 조선소와 자동차산업 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후 김 박사를 중심으로 KIST에서 만든 ‘한국 기계공업 육성방안’에서 조선소와 중기계공장ㆍ특수강 공장 등의 싹의 텄다. 1973년 발표된 ‘장기 조선공업 진흥계획’ 또한 김 박사의 책임 하에 KIST에서 만들어졌다.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책 속에는 정주영 회장이 한국을 찾은 외국 귀빈에게 “KIST의 아이디어 덕분에 현대조선소를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책에는 김 박사가 국산 자동차산업에 기여한 얘기도 나온다. 김 박사는 ‘자동차 차관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1970년 내놓은 ‘표준형 차제 개발사업 기획서’가 김 박사의 작품이다. 상공부 차관보 시절인 1973년 정세영 현대자동차 사장을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로 불러 국산 고유모델 자동차를 만들어 볼 것을 권유한다.

 

당시 국내엔 새나라자동차 등이 있었지만, 외국 모델의 부품을 수입해 부분조립생산하는 수준이었다. 김 박사는 외국 자동차를 조립해서 생산하는 방식으로는 해외 대기업의 하청공장으로 전락해 수출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산 최초 고유모델 승용차 포니는 이런 과정을 통해 태어날 수 있었다.


신성철 전 KAIST 총장은 “김 박사는 한국 종합제철소의 시작을 견인하고 중공업과 자동차산업을 기획했으며 국가 표준을 수립해 한국 선진화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라며“한 과학자의 미래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열정과 헌신이 한강의 기적을 성취하는데 어떻게 기여했는지 생생하게 밝혀주고 있다”고 말했다.

홍용식 인하대 명예교수의 대한항공 산하 항공기술연구원 부원장 시절. [중앙포토]

'박정희의 꿈' 백곰 미사일 개발 주역 홍용식 교수

김재관 박사의 숨은 이야기가 책으로 나올 즈음, 한국 산업화에 기여한 또 다른 해외 유치과학자가 머나먼 타국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홍용식(1932~2022) 인하대 항공우주공학과 명예교수 얘기다. 홍 교수는 1970년대 국산 지대지 탄도미사일 백곰(NHK-1) 개발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한국 항공우주공학계의 선구자다. 그는 지난해 말 갑작스런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지난 24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천재 로봇개발자로 유명한 데니스 홍 미국 UCLA 교수가 고인의 둘째 아들이다.

홍 교수는 6.25 전쟁 당시인 1951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전쟁 직후인 1955년 학부를 졸업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어번대를 거쳐 일리노이대에서 기계공학 석사를, 워싱턴대에서 기계공학 박사를 마쳤다. 이후 미국 보잉사의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는 1974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미사일 개발과 과학자 유치에 호응해 1호 해외유치과학자 신분으로 귀국, 국방과학연구소(ADD)에 근무했다.

1978년 9월26일 충남 안흥시험장에서 국내최초의 지대지 미사일 백곰의 성공적인 발사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미사일 옆에서 국방과학연구소 관계자들로부터 기체부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중앙포토]

항우연 우주로켓 씨뿌린 백곰 개발자들

홍 교수는 생전 펴낸 자서전 『나는 그때 있었다』에서 “미 공군의 우주국을 지원하는 연구소인 에어로스페이스 코퍼레이션에서 군용 스페이스 셔틀과 ICBM에 관한 일을 하고 있던 1972년에 한국 국방과학연구소(ADD) 심문택 소장에게서 함께 일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며 “당시 심 소장과 함께 유럽의 방위산업계와 연구소 등을 약 한 달간 시찰한 후 ADD 항공우주담당 부소장으로 부임하면서 1974년에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고 밝혔다.

홍 교수는 당시 미사일 개발 목표가 사정거리 500㎞, 탄두 중량 500㎏이었으며, 최종목표는 핵탄두를 운반하는 로켓 개발이었다고 회고했다. 홍 교수는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국방과학연구소에 당시 김종필 총리가 방문했다”며“그때 우리 연구소 간부 몇 명이 모인 사적인 자리에서 핵개발에 성공하면 한 사람당 1억원씩 주겠다고 웃으면서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적었다.

 

하지만 핵무기 탑재용 미사일 로켓 개발 계획은 미국의 압력으로 무산됐다. 이로 인해 미사일 개발도 사정거리와 탑재 하중이 축소되고, 이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ADD 연구소 미사일 담당 연구원 수도 대폭 감원됐다고 홍 교수는 회고했다.

 

홍 교수가 개발에 참여했던 미사일은 1978년 9월 충남 안흥시험장에서 발사에 성공한 백곰 미사일이다. 현장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관했으며, 사거리 200㎞를 날았다. 당시 세계 7번째 지대지 탄도 미사일 개발이었다. 백곰 미사일은 이후 연구가 이어져 오늘날 현무 미사일로 진화했다. 백곰 미사일 개발에 참여했던 일부 과학기술자들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으로 들어가 우주로켓 개발에 참여해왔다.

홍용식 인하대 명예교수가 최근 미국 워싱턴 D.C.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맨 왼쪽이 차남인 로봇 데스니 홍 UCLA 교수. 시계 방향으로 부인 민병희 인하대 명예교수, 장남 존 홍(한국명 홍준서) 미국 국방연구원 부원장, 마지막이 딸 줄리 홍(한국 명 홍수진) 미국 국립암연구소 연구원 [사진 홍용식 교수 가족 제공]

"황무지에 산업화의 토대를 닦으신 분들"

홍 교수는 국산항공기 개발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인하대 교수 겸 대한항공 부설 항공기술연구원 부원장 시절인 1988년, 대한항공ㆍ삼선공업ㆍ한국화이바 등 3개 업체가 합작한 한국항공우주연구조합의 경비행기 개발책임자로 창공 1호ㆍ2호ㆍ3호 등 초경량 항공기를 독자설계하고 개발했다.

앞서 국내 항공기산업 육성방안을 마련해 여러 차례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창공 1호ㆍ2호ㆍ3호는 규모는 작지만 완제기 개발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실용 시제기인 창공 - 91호 (5인승 경비행기)가 탄생할 수 있었다.

 

최동환 전 항공우주연구원장은 “홍 교수는 국내에 미사일은 물론 항공우주 기술 수준이 황무지에 가깝던 시절에 해외 유치과학자로 귀국해 오늘날의 토대를 닦으신 분”이라고 말했다.

 

 

최준호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2.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