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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합탕 한 그릇’

해암도 2021. 12. 31. 06:09

 

일본 사람들은 ‘해 넘기기 우동’을 먹는다.

 

삿포로의 한 우동 가게에도 12월 31일 늦은 밤 남루한 차림의 여인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1인분을 주문했다. 딱한 사정을 알아챈 주인은 몰래 1.5인분을 내어주고 세 모자는 맛있게 나눠먹는다.

 

구리 료헤이의 소설 ‘우동 한 그릇’의 줄거리인데 실제로 따뜻한 한 끼의 추억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 뉴욕에 사는 A 씨도 그중 한 명이다.

▷A 씨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겨울 밤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A 씨는 서울 신촌시장 뒷골목에서 홍합을 파는 리어카를 보았다. 배가 고팠던 그는 “홍합탕을 한 그릇 먹을 수 있겠느냐. 돈은 내일 드리겠다”고 했고, 아주머니는 선뜻 한 그릇을 내주었다.

 

그 다음 날이라고 없던 돈이 생겼을까. A 씨는 이후 이민을 떠났다. 홍합탕 값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A 씨는 50년이 지난 최근 이 같은 사연을 담은 손 편지와 1000달러짜리 수표 두 장을 서대문경찰서 신촌지구대로 보내왔다. 1만 원짜리 홍합탕을 200그릇 넘게 먹을 수 있는 돈이다.

▷식당들이 코로나 폐업 위기에 몰린 올해도 ‘홍합탕 한 그릇’의 사연이 줄을 이었다. 특히 “애들 굶는 건 절대 못 보겠다”는 식당들이 많았다. 홍대 앞 치킨집은 “동생이 치킨을 좋아하는데 5000원밖에 없다”는 소년 가장에게 세트 메뉴를 공짜로 주었다.

 

망원동 분식집은 결식아동 카드를 가진 아이는 물론 동반 1인에게도 식사를 준다. 혼자 먹기 부끄러워할까봐서다. ‘뭐든 먹고 싶은 거 얘기해줘. 눈치 보면 혼난다’라고 문 앞에 써 붙인 식당도 있다. 이렇게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가게가 전국에 3000개 가까이 된다.

 

▷홍합탕 한 그릇은 일방적 나눔이 아니다. 식당 주인들은 “아이들을 먹이는 일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몰랐다”고 한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싶다가도 “사장님 덕분에 밥 잘 먹고 성인이 됐다”는 편지를 받으면 마음을 다잡게 된다. 영업난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던 파스타집 사장은 “‘1년간 매일같이 신세졌는데 눈치 안 보고 잘 먹었다’는 감사 인사를 받고 수면제 없이 잘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소설 ‘우동 한 그릇’의 형제는 14년 후 의사와 은행원이 돼 노모와 함께 그 우동 집을 찾아 3인분을 시킨다. 그날 밤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열심히 살았다면서. A 씨는 편지에서 “50년간 친절하셨던 아주머니 덕으로 살아왔다”며 가장 어려운 이들에게 따뜻한 한 끼를 제공해달라고 당부했다. 올 한 해 넉넉지 않은 이들 덕분에 ‘홍합탕 한 그릇’의 추억을 갖게 된 아이들도 나눔의 힘을 믿는 반듯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입력  20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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