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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하나님)은 어떻게 생긴 분일까.

해암도 2021. 5. 29. 05:35

짧은 생각


이런 물음을 던져봅니다. 하얀 머리카락과 긴 수염을 휘날리는 인자하신 할아버지. 우리는 그런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만약 꿈에서 그런 분을 만났다면 “나는 하느님을 만났어”라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은 그렇게 생긴 분이겠지”라고 정해놓고 있으니까요.

따져보면 딱히 근거가 없습니다. 그럼 많은 사람이 왜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는 걸까요. 저는 미켈란젤로의 성당 벽화 ‘천지창조’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진흙으로 빚은 아담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할아버지 하느님의 이미지 말입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하느님은 그렇게 생기셨을 거야”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창조'에서 아담을 창조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정말 궁금합니다. 하느님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요. 영성의 눈이 깊은 이재철 목사(전 100주년기념교회 담임)에게 이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대답은 이랬습니다. “하나님은 차원을 넘어서 계신 분이다. 3차원, 4차원이 아니라 9차원, 10차원도 넘어서 계신 분이다. 그렇게 무한하신 분이다.”

오스트리아 성서신학을 전공한 고(故) 차동엽 신부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차 신부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차원을 넘어서 계신 분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렇게 생긴 분이야, 저렇게 생긴 분이야라고 단정하면 어떻겠나.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우리의 좁은 3차원적 생각 속에 가두는 일이 되고 만다.”

한 분은 목사, 한 분은 신부였지만 대답은 통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희고 긴 수염과 머리칼을 휘날리는 인자하신 할아버지 하느님. 그건 우리가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 하나의 상(像)입니다. 본래부터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만든 하느님입니다. 그게 뭘까요. 다름 아닌 ‘우상(偶像)’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수도(修道)가 뭔가요? 십자가를 통해 내 안의 잣대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그걸 통해 마음이 자꾸 가난해지는 길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게 뭘까요? 내 안의 욕망과 내 안의 집착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걸 통해 생겨난 가난의 여백을 통해 우리는 신의 속성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우상(偶像)’을 세우면 어떻게 될까요. 거꾸로 가게 됩니다. 역주행을 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더 멀어지게 됩니다. 왜냐고요? 우상은 대부분 나의 욕망을 성취할 창구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 북부인 갈릴리 호수 일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하늘의 소리'를 전했다.


구약의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을 본 따 사람을 지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겉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외양이 닮았다고 봅니다. 하느님을 눈ㆍ코ㆍ입과 머리, 팔다리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 의인화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은 달리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건 겉이 아니라 속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단어는 겉모습을 뜻하는 ‘데무트(Demut)’가 아니라 속성ㆍ성질을 뜻하는 ‘셀렘(Selem)’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하느님의 겉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을 닮은 존재입니다.

이걸 알면 성경이 달리 보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수의 속성은 신의 속성이니, 너희도 신의 속성을 회복해라. 그럼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도 내 안에 거하게 된다. 물과 물이 통하고, 기름과 기름이 통하듯이 말입니다.

이제 명확해집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을까요. 저는 이유가 하나라고 봅니다. 우리의 속성을 신의 속성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신의 속성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지을 때,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1.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