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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두고 바위서 왜···수도승 생활 자처하는 사람들 정체

해암도 2021. 3. 6. 05:54

프로젝트인데 회사 아닌 바위서? 2주간 3㎏ 빼야하는 최 부장님

 

 

“그 문제는 이렇게 풀었으면 해요.”

‘프로젝트 등반’ 나서는 클라이머들
금주에 소식 수도승 생활, 루트 익혀
“잠들기 전 천장에 코스 그려질 정도”

 

같은 회사에 다니는 최용석(52·경기도 고양) 부장과 이제성(31·경기도 용인) 사원. 또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지난 3개월간 최 부장은 세 번째, 이 사원은 두 번째다.

 

문순자(50)씨가 지난 2월 24일 경기도 용인 백암면의 조비산 암장에서 5.13a 난도인 '블랙홀' 루트를 등반하고 있다. 문씨는 블랙홀 루트를 완등하기 위해 트레이닝과 식이요법을 병행하며 '프로젝트 클라이밍'을 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여기까지, 회의실에서나 새어 나올만한 대외비 프로젝트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발 디딘 곳은 회의실이 아니라 깎아지른 바위 앞. 대체 최 부장과 이 사원은 왜 암벽을 쳐다보며 프로젝트 운운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문제'는 뭘까.


# 한겨울에도 암벽 등반하는 사람들
프로젝트.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작업 과정.’ 이게 클라이밍의 수식어가 된다. 암벽 등반이되, 특정 목표를 설정하고 몸과 마음을 만드는 지난한 흐름이다. 모든 스포츠에는 프로젝트가 있다. 그중 암벽 등반 프로젝트는 험난한 축에 속한다.

 

우리나라 나이로 70세인 김용기씨가 지난 2월 28일 경기도 용인 조비산에서 등반하고 있다. 아래에 등반 순서를 알리기 위해 줄 세운 암벽화들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김용기(69, 전 김용기등산학교장)씨는 “프로젝트 클라이밍은 등반의 한 장르가 아니라, 등반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느냐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프로젝트 등반은 음식 조절로 등반의 최대 적인 체중을 줄인다. 루트를 파악해 몸이 저절로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이게 암벽의 '문제 풀이'다. 등반 중 언제 숨을 내뱉고 들이쉬며, 팔을 털어 경직된 (팔뚝) 전완근을 풀어줄 휴식처까지 알아야 한다.


봄이다. 바위 냉기가 공기 속으로 빠져나간다. 온기가 올라오며 마찰력이 거세진다. 암벽 등반 시즌 개막을 알리는 '느낌'이다. 암벽 등반은 산행의 한 방법. 하지만 겨울에도 암벽 등반하는 사람들이 있다. ‘맑음, 낮 최고 영상 5도’라는 기상청 예보관의 말을 믿는다. 이렇게 나름 겨울 등반의 기준을 정한다. 날씨가 급변할 수 있는 긴 루트 대신 짧은 루트를 택한다. 봄에 시즌이 시작하는 멀티 피치(인수봉 등에서 여러 구간에 걸쳐 등반하는 방법)에 견줘 단피치라고 한다. 혹은 하드-프리클라이밍((hard-free climbing)이라고 한다.

 

최용석씨가 지난 2월 28일 경기도 용인 조비산에서 자신의 프로젝트 등반 대상인 ‘구름처럼(5.12c)’ 루트를 등반 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프로젝트 등반은 계절 따라 자리를 옮긴다. 겨울엔 용인 조비산과 원주 간현암, 봄에는 고창 선운산과 남한산성 범굴암, 여름에는 아산 영인암장, 군포 수리산 매바위 등이다. 가을부터는 다시 선운산으로 들어간다. 지금은 조비산·간현암에서 선운산으로 옮기는 시즌이다.


# 암벽 등반 인구 150만 명 넘어
지난달 28일 조비산. '클린이(클라이밍하는 어린이)' 김인해(28·경기도 파주)씨가 ‘블랙홀(난이도 5.13a, 그래픽 참조)'을 완등했다. 추락 없이 상급자 루트를 통과한 것이다. 환호성이 터졌다. 덕담에 “고생했어”라는 말도 나왔다. 고생했다니, 클라이밍이란 게 쉽게 돌아갈 수 있는 길을 굳이 벽에 부딪쳐 가며 나름 즐거움을 얻는 일 아닌가.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김인해씨는 “지난 2개월간 이 루트만 생각했는데, 잠자리에 들기 전 천장에서 그림이 그려질 정도”라며 “음식 섭취량을 최소화하는 대신, 운동량을 최대화했다”고 털어놨다. 등반 경력 30년의 김종오(53·아트클라이밍센터장)씨는 “쉽게 말해, 눈앞의 먹고 마실 것에 넘어가면 그 주말의 프로젝트 등반은 물 건너간다고 보면 된다”며 “수도승 같은 생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등반가의 하루 식단.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음식을 섭취하느라 이마저도 다 먹고 마시지도 않는다. 김홍준 기자

 

 

송명진(55·수리클라이밍클럽)씨의 경우엔 고행을 하다시피 생활한 끝에 선운산의 고난도 '호기다림(5.13a)' 루트를 해결했다. 그는 “나도 애주가지만, 2주간 술은 쳐다보지도 않고 라면도 멀리하면서 2~3㎏ 빼고 프로젝트 등반에 나섰다”며 “엄청난 괴로움을 뚫고 성공하니 일터에서도 자신감이 생기더라”고 밝혔다.


요세미티의 엘 캐피탄을 맨손으로 오르는 극한의 프리 솔로 프로젝트 등반을 하는 알렉스 호놀드(36·미국)는 "술은 맛본 적 있지만 마신 적은 없고, 커피도 안 마신다"고 말했다. 몸을 괴롭히는 행위는 안 한다는 것이다. 그의 고행과 번민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솔로'는 오스카상을 받았다.

프로젝트 클라이밍은 5.13급 같은 상급자 루트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김용기씨는 “초급자 수준인 5.9, 5.10이라도 개인이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한다면 프로젝트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성씨의 여자친구 양지원(25)씨도 프로젝트 중이다. 5.10c에 나선다. 양씨는 “어제보다 한발 한발 더 나아갈 때, 바위에 수없이 새겨진 행마를 풀 때, 그게 암벽 등반의 묘미”라고 말했다.

김종오씨가 지난 2월 24일 경기도 용인 조비산에서 '타이거'를 등반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 "배부르면 깨달음 없다" 등반의 금언
암벽 등반 장르는 여럿이다. 장비 도움 없이 등반하는 프리 클라이밍은 1980년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이전에는 장비에 몸을 실어 오르는 인공등반이 성행했다. 프리 클라이밍은 도구 없이 큰 바위를 오르는 볼더링부터 적용됐다. 김용기씨는 "하드프리, 크랙 등반 등도 목표를 설정하고 트레이닝을 한다면 프로젝트 등반이라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혜정(36·교하클라이밍)씨는 요가 강사다. 그에게는 ‘제3의 손’이 있다. 몸이 유연해 손이 가야 할 높은 지점에 훌쩍 발을 올려 손을 대신한다는 것. 그는 볼더링을 프로젝트로 삼는다. 스트레스는 없을까. 그는 “프로젝트라고 해서 스트레스 받으면 큰일"이라며 "암벽 등반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행위인데, 최선을 다하되 안 되면 거기서 마음 추스르는 법도 터득하고 고행을 즐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혜정씨가 경기도 용인 조비산 '마이웨이(5.13c)'에서 등반하고 있다. [사진 김혜정]

 

 

한 루트를 지나치게 오래 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지적도 있다. 한만규(62) 일산클라이밍센터장은 “프로젝트 등반은 지구력·파워 등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인지하고 엄청난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며 "노력을 통해 최대한 기간을 줄여야 다른 루트 등반도 원활해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로젝트 등반은 루트 당 20회 정도 도전이 적당하다”고 덧붙였다.



한국리서치의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등산·트레킹 인구는 2392만 명. 암벽 등반(리지 등반 포함) 인구는 등산 인구의 6%인 150만 명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등반 전문가들은 2021년 현재 150만 명은 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김용기씨는 “최근 2~3년 새 실내암장에서 운동하던 사람들, 특히 2030들이 자연 암장으로 발을 넓히면서 급격하게 등반 인구가 늘었다”고 말했다. 김종오씨도 “용인 조비산만 해도 2년 전에는 한가했는데, 지난해 가을부터 2030이 확 늘면서 붐비고 있다”고 밝혔다.


영국의 유명 등반가 더그 스콧은 "배부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이번 주말, 또 어떤 프로젝트 클라이밍이 성공할까.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중앙선데이] 입력 2021.03.06

 

거친 바위에 쓸려 상처투성이가 된 한 클라이머의손.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