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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수록 거리를 두라

해암도 2021. 7. 2. 08:53

오직 골프에만 매달리는 선수는 경기 중 더 큰 압박감 시달려
다양한 각도에서 자부심 느끼면 더 자유롭게 실력 펼칠 수 있어

 

이번 주 여자 골프 세계 1위에 처음 오른 넬리 코르다(23)는 두 대회 연속 우승을 거뒀지만, 사실 그 직전까지 상심에 빠져 있었다. 선수들이 가장 우승하고 싶어 하는 US여자오픈에서 2년 연속 컷 탈락했기 때문이다. 그때 코르다는 두 남자 골퍼의 인터뷰를 보게 됐다.

지난달 28일 메이저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넬리 코르다./AP 연합뉴스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ADHD), 대인 기피, 불안 장애 등을 겪어온 베테랑 버바 왓슨(43)과 신예 매슈 울프(22)가 마음 상태를 털어놓은 인터뷰였다. 왓슨은 “골프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실수하면 나에게 화가 치솟지만, 사실 아무 의미 없다. 좋은 남편, 아버지, 친구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너무 열심히 노력하는 게 나의 문제다. 자유롭게 스윙하고 싶다”고 했다.

 

울프는 두 달간 쉬면서 정신 건강 회복에 집중하다 복귀했다. “팬들은 좋은 샷을 기억해주지만, 난 부담감과 기대에 짓눌려 부족한 점만 찾는다. 샷을 잘못하면 세상 끝날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매일 아침 침대를 벗어나기가 어렵다. 즐겁고 편안하게 경기하는 것만이 요즘 목표다.”

 

두 선수 인터뷰가 코르다에게 깊이 와닿았다고 한다. ‘맞아, 골프는 그냥 골프야.’ “골프를 너무 사랑해서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다. 한 걸음 물러서니 새롭게 보였다.” 코르다는 완벽한 샷을 하는 데만 집중해왔고, 조금만 틀어져도 자신에 대한 분노에 휩싸였다. 하지만 동료들 경험담을 들으면서 골프가 곧 나 자신이 아니며, 골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걸 깨달은 것 같다. “경기 내내 되새겼다. ‘그건 골프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9언더파, 10언더파를 몰아치고 미 LPGA 투어 연속 우승에 첫 메이저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코르다 얘길 들으니 지난달 한국 여자 투어 최초로 1000라운드 출전 대기록을 세운 홍란(35)이 떠올랐다. 2005년부터 17시즌 연속 출전권을 지켜낸 것도 역대 기록이다. 롱런 비결 중 하나로 그는 ‘거리 두기’를 꼽는다. 골프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써온 덕분에 오랜 세월 지치지 않았다고 한다. 의외였다. 24시간 매달리고 끊임없이 집착해야 겨우 성공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는 2008년 그토록 바라던 첫 우승 직후 혼란에 빠졌다. 다음 대회 나가니 또 컷 탈락 걱정이 밀려들고 달라진 게 없었다. 골프를 ‘직업’으로, 좋고 싫고를 떠나 ‘해야 되니까 하는 책임’으로 정의 내리면서 나름의 답을 찾았다. “밀당 잘하는 골프에 끌려다니지 않고 주도권을 쥐기 위해,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객관적으로 바라봤다. 훈련 끝나면 철저하게 ‘퇴근’하고 골프와 분리된 일상을 가졌다. 일상을 담는 소셜미디어도 공개하지 않는다.

 

미 PGA 투어와 일해온 그레그 스타인버그 스포츠심리학 박사는 “골프 선수가 ‘자아의 계란’을 골프 한 바구니에만 담으면, 골프 빼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된다. 경기할 때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다양한 각도에서 자신에게 만족감과 자부심을 느끼면 부담을 덜고 더 자유롭게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전설’ 잭 니클라우스(81)를 예로 든다. “위대한 골퍼이자 코스 디자이너, 장비 디자이너, 5남매의 아버지였고 취미로 농구를 즐겼다. ‘여가 시간에 가장 위대한 선수’로 불렸을 정도다.”

 

너무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너무 열심히 애쓰다 너덜너덜해진 이들이 요즘 많다. 치열한 경쟁 환경에서 실패를 용납 못하고 자신을 용서 못 해 소진돼버린 이들. 코르다가 찾은 답은 이거다. “하루 동안 안 풀린 일은 거기 그대로 놔두고, 집에 가서 좋은 시간 보내고, 한결 나아진 마음가짐으로 다음 날 돌아오면 되죠!”

 

 

최수현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1.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