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의 애정 만세]
영화 '코코'를 드디어 봤다. 냉혹하게 별점을 매기기로 유명한 평론가 P가 유례없이 별 네 개★★★★(별 다섯이 만점)를 준 걸 보고 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토록이나 냉정한 남자의 마음까지도 녹였다니… 대체 어떻길래?'라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던 거다.
과연… P가 그럴 만했다. '코코'는 트집 잡기 힘든 영화였다. '성장'과 '죽음'과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따뜻하고도 화사하게 그린다. 플롯의 긴장감도 적절하고, 색채감도 좋고, 이야기의 디테일도 있고, 멕시코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답게 흥성스러운 라틴의 정취도 물씬 풍겼다.
과연… P가 그럴 만했다. '코코'는 트집 잡기 힘든 영화였다. '성장'과 '죽음'과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따뜻하고도 화사하게 그린다. 플롯의 긴장감도 적절하고, 색채감도 좋고, 이야기의 디테일도 있고, 멕시코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답게 흥성스러운 라틴의 정취도 물씬 풍겼다.
'코코'는 온 집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뮤지션을 꿈꾸는 소년 미구엘이 저승 세계로 빨려 들어가 죽은 친척들을 만나는 영화다. 천진무구하나 자신의 꿈을 향해서라면 겁 없이 돌진하는 미구엘은 매력적인 주인공이었으나 내 애정이 향한 대상은 따로 있었다. 단테다. '신곡'을 쓴 이탈리아 작가 단테가 아니다. '코코'에서 단테는 개다. 미구엘이 챙기던 비루먹은 떠돌이 개. 피부가 헐어 털이 빠지고 얼룩덜룩한 짐승을 형용하는 말인 '비루먹다'라는 말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개.
나는 영화나 책을 볼 때 주인공보다는 조역에 곧잘 끌리곤 하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그래서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이런 결론을 내렸다. 상상할 수 있는 여백이 넘쳐나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대부분의 영화는 주인공 위주로 흘러가기 때문에 조연에 대해서는 불친절하기 마련.
그런데 그 불친절이 나 같은 관객에게는 상상의 날갯짓을 하게 하기도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특히 '코코'는 애니메이션답게 어린이 관객을 배려해 모든 게 명확한 편이었다. 거의 유일하게 신비에 싸인 등장인물(?)이 단테였다.
비루먹은 개가 어떻게 신비하냐고? 그건 이 세상의 기준일 뿐! 무슨 말이냐면… 이 단테는 알고 보니 그냥 개가 아니었다. 저 세상에서 단테의 진면목이 드러났던 것인데… 미구엘과 함께 저세상으로 건너간 단테는 대활약을 한다.(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고 보니 이 개는 미구엘을 저세상으로 인도하는 길동무였다.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길동무 삼아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는데, 이 영화 '코코'에서는 단테가 미구엘의 길동무였던 것.
이 글을 읽으시며 내가 쓰는 '이 세상'과 '저세상'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있을 걸로 안다. 쓰는 나 역시 어색한데, 그렇게 쓰는 이유는 이렇다. '코코'에서 그려지는 사후 세계는 우리가 알던 것과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이승'과 '저승'이라고 부르기도 꺼려지는 거다. '코코'에서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단테가 '신곡'에서 그린 것처럼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이분법적인 세계인 천당과 지옥으로도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놀랍게도 닮아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복사판이었다.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가 있고, 할렘가가 있으며, '셀렙'과 셀렙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으며(죽어서도!), 그들은 그 세계의 가장 높은 곳(스카이라운지 느낌)에 모여 샴페인을 터뜨리고 파티를 벌인다. '물관리'를 담당하는 이 세상의 '기도' 같은 사람도 있다! 나는 이게 상당히 으스스했다.
'코코'의 세계관에 따르자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경쟁(그게 무엇을 위한 경쟁이든 간에)을 죽어서도 하게 된다는 거다. 그리고 그 성취는 계속해서 평가받는다. 더 으스스한 건 뭐냐면? 저세상에서 벌일 그 경쟁의 출발점은 평등하지 않다는 거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마지막 모습으로, 외모와 신분과 재력과 인맥과 건강 상태가 이 세상에서의 그 모양 그대로 저세상에 도착한다!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코코'의 세계관대로라면, 죽어서도 안식은 글렀다. 그 비정한 죽은 자들의 세상을 당차기만 하고 요령도 뭣도 없는 미구엘이 헤집고 다니는 것이다. 단테가 없었다면 정말이지 큰일 날 뻔했다. 미구엘이 자신의 할아버지를 만나 가족의 응어리를 풀었지만 악당의 술책으로 위험에 처했을 때 단테는 알레브리헤로 변한다. 죽은 자들의 수호 성령인 알레브리헤! 저세상에서도 이 세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루먹은 개의 외양을 했던 단테의 몸이 사이키델릭해지면서 날개가 돋아난다. 그런데 다른 알레브리헤처럼 위풍당당하고 권위 있는 모습은 아니다. 날개도 짝짝이에, 크기가 작다. 나는 알레브리헤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짝짝이 날개가 돋아나는, 변신하고 있는 순간의 단테를 보면서 깊은 애정과 감동을 느꼈다.
어딘지 모자란 단테는 또 어딘지 모자란 저세상으로 떨어진 이들의 수호 성령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거다. 가진 자의 수호성인보다 창녀의 수호성인이나 거지의 수호성인이 그런 것처럼 거칠고 더러운 일을 겪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부족해서, 완벽과는 거리가 멀어서, 마음을 건드리고, 두드리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를테면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해 온 국민의 혼을 빼놓은 인면조라든가. 인형 뽑기 가게의 유리 안에 잔뜩 들어 있는, 비례가 맞지 않아 어딘지 이상하고 그래서 자꾸 돌아보게 만드는 인형이라든가.
그리고 또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나의 알레브리헤는 누가 될 것인가? 내 주위를 스쳐가는 가장 남루하고 비루한 것들이 알레브리헤라면 그들을 놓쳐버린 나는 그동안 얼마나 바보짓을 저지른 건가? 또 기회는 있을까?(아마도…있겠지?) 그런 자기 보신적인 생각을 하다 '알레브리헤'를 검색했다.
나는 영화나 책을 볼 때 주인공보다는 조역에 곧잘 끌리곤 하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그래서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이런 결론을 내렸다. 상상할 수 있는 여백이 넘쳐나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대부분의 영화는 주인공 위주로 흘러가기 때문에 조연에 대해서는 불친절하기 마련.
그런데 그 불친절이 나 같은 관객에게는 상상의 날갯짓을 하게 하기도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특히 '코코'는 애니메이션답게 어린이 관객을 배려해 모든 게 명확한 편이었다. 거의 유일하게 신비에 싸인 등장인물(?)이 단테였다.
비루먹은 개가 어떻게 신비하냐고? 그건 이 세상의 기준일 뿐! 무슨 말이냐면… 이 단테는 알고 보니 그냥 개가 아니었다. 저 세상에서 단테의 진면목이 드러났던 것인데… 미구엘과 함께 저세상으로 건너간 단테는 대활약을 한다.(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고 보니 이 개는 미구엘을 저세상으로 인도하는 길동무였다.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길동무 삼아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는데, 이 영화 '코코'에서는 단테가 미구엘의 길동무였던 것.
이 글을 읽으시며 내가 쓰는 '이 세상'과 '저세상'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있을 걸로 안다. 쓰는 나 역시 어색한데, 그렇게 쓰는 이유는 이렇다. '코코'에서 그려지는 사후 세계는 우리가 알던 것과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이승'과 '저승'이라고 부르기도 꺼려지는 거다. '코코'에서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단테가 '신곡'에서 그린 것처럼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이분법적인 세계인 천당과 지옥으로도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놀랍게도 닮아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복사판이었다.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가 있고, 할렘가가 있으며, '셀렙'과 셀렙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으며(죽어서도!), 그들은 그 세계의 가장 높은 곳(스카이라운지 느낌)에 모여 샴페인을 터뜨리고 파티를 벌인다. '물관리'를 담당하는 이 세상의 '기도' 같은 사람도 있다! 나는 이게 상당히 으스스했다.
'코코'의 세계관에 따르자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경쟁(그게 무엇을 위한 경쟁이든 간에)을 죽어서도 하게 된다는 거다. 그리고 그 성취는 계속해서 평가받는다. 더 으스스한 건 뭐냐면? 저세상에서 벌일 그 경쟁의 출발점은 평등하지 않다는 거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마지막 모습으로, 외모와 신분과 재력과 인맥과 건강 상태가 이 세상에서의 그 모양 그대로 저세상에 도착한다!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코코'의 세계관대로라면, 죽어서도 안식은 글렀다. 그 비정한 죽은 자들의 세상을 당차기만 하고 요령도 뭣도 없는 미구엘이 헤집고 다니는 것이다. 단테가 없었다면 정말이지 큰일 날 뻔했다. 미구엘이 자신의 할아버지를 만나 가족의 응어리를 풀었지만 악당의 술책으로 위험에 처했을 때 단테는 알레브리헤로 변한다. 죽은 자들의 수호 성령인 알레브리헤! 저세상에서도 이 세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루먹은 개의 외양을 했던 단테의 몸이 사이키델릭해지면서 날개가 돋아난다. 그런데 다른 알레브리헤처럼 위풍당당하고 권위 있는 모습은 아니다. 날개도 짝짝이에, 크기가 작다. 나는 알레브리헤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짝짝이 날개가 돋아나는, 변신하고 있는 순간의 단테를 보면서 깊은 애정과 감동을 느꼈다.
어딘지 모자란 단테는 또 어딘지 모자란 저세상으로 떨어진 이들의 수호 성령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거다. 가진 자의 수호성인보다 창녀의 수호성인이나 거지의 수호성인이 그런 것처럼 거칠고 더러운 일을 겪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부족해서, 완벽과는 거리가 멀어서, 마음을 건드리고, 두드리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를테면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해 온 국민의 혼을 빼놓은 인면조라든가. 인형 뽑기 가게의 유리 안에 잔뜩 들어 있는, 비례가 맞지 않아 어딘지 이상하고 그래서 자꾸 돌아보게 만드는 인형이라든가.
그리고 또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나의 알레브리헤는 누가 될 것인가? 내 주위를 스쳐가는 가장 남루하고 비루한 것들이 알레브리헤라면 그들을 놓쳐버린 나는 그동안 얼마나 바보짓을 저지른 건가? 또 기회는 있을까?(아마도…있겠지?) 그런 자기 보신적인 생각을 하다 '알레브리헤'를 검색했다.
나는 이게 멕시코 문화권에서 실제로 수호 정령을 부르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아니었다. 한 백과사전에 따르면 알레브리헤는 예술의 한 장르다. 화려한 색으로 환상적인 생물을 표현하는 멕
시코의 민속 조각 예술이라고. 카니발 마스크를 만들던 한 남자가 꿈을 꾸었는데, 나비의 날개를 가진 당나귀라든가 독수리 머리에 사자의 몸을 한 동물들이 나타났던 것이고, 이것들을 조각으로 만든 게 알레브리헤의 기원이라고 한다.
이처럼 괴이해서 더 아름다운 수호 정령 알레브리헤가 이 순간 당신 곁을 누추한 모습으로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니 방심하지 말 일이다.
이처럼 괴이해서 더 아름다운 수호 정령 알레브리헤가 이 순간 당신 곁을 누추한 모습으로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니 방심하지 말 일이다.
조선일보 한은형 소설가 입력 : 2018.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