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당신의 인생을 바꿀 영화 〈12〉 〈제로 다크 서티〉

해암도 2018. 9. 15. 20:12

가장 어두운 시간의 흔적

83학번인 필자는 ‘군부독재 타도’와 ‘반전 반핵(反戰反核)’이라는 구호 아래 대학생활을 보냈다. 석사과정 때 신림동 책방에서 문학평론가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을 읽다가 “내 나이는 1960년에 멈춰져 있다”는 구절을 접한 순간, ‘내 나이는 1983년에 멈춰져 있구나’ 깨달았던 기억이 있다.

시민의 양식과 권리, 지식인의 사명 등을 배우고 익히는 시기가 10대 후반과 20대임을 감안한다면, 필자처럼 ‘획일적인’ 대학 시절을 보낸 ‘386세대’가 ‘제정신’을 차리는 데엔 상당한 시간과 고통이 필요했다.

미국 9·11 테러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제로 다크 서티〉(Zero Dark Thirty, 감독 캐스린 비글로, 2012)에는 테러의 배후 오사마 빈 라덴을 추적하는 CIA(미 중앙정보국) 요원 ‘마야’(제시카 채스테인)와 ‘넘버 1’인 CIA 국장(제임스 갠돌피니)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빈 라덴의 파키스탄 내 은신처를 찾아냈다고 확신하는 마야의 정보에 대해 미국 정보국 수뇌부들이 전반적으로 회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야가 혼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고, 중간 간부를 배석하지 않은 CIA 국장이 직접 그녀를 찾는다.


CIA 국장 : 앉아도 될까? (앉는다) 식당 메뉴는 어때요?
마야 : 아, 괜찮습니다.
CIA 국장 : CIA에서 얼마나 일했지요?
마야 : 12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들어왔습니다.
CIA 국장 : 우리가 자네를 왜 뽑았는지 아나?
마야 : 제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인 듯합니다. 국장님. 제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닌.
CIA 국장 : 좋아. CIA에서 다른 일은 뭘 했나요. 빈 라덴 빼고?
마야 : 없습니다. 다른 일은 맡은 적이 없습니다.
CIA 국장 : 음, 그렇다면 빈 라덴에 관한 한 자네가 제일 잘 알겠군.


386 운동권들이 고교 졸업 후 상당 기간 세속적 야망 대신 군부독재 타도에 매달렸듯이 〈제로 다크 서티〉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마야는 10대 후반서부터 20대 내내 결혼은커녕 연애도 하지 않고 ‘빈 라덴은 어디에 숨어 있는가’에만 매달렸다.

실화를 바탕으로 관련자 수십 명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제작된 영화의 이 장면을 보며 미국은 우리나라가 따라갈 수 없는 여러 특징과 자질이 있다고 절감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국정원장이 일개 평직원을 직접 찾아가 독대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을 법한 일일까?


이 신이 갖는 신선함(?)을 충분히 즐기려면 그 전에 나온 다음 장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마야가 소속 본부장에게 빈 라덴 은신처를 보고 한 뒤, 본부장이 CIA 국장을 비롯한 수뇌부에게 처음으로 브리핑을 하는 자리다. 본부장과 배석한 마야는 회의실 뒤편에 서 있다. 회의실 가운데에는 은신처 주변 지형을 축소한 모형이 설치돼 있다.

CIA 국장 : 이건 뭐요? 이 아래쪽 건물들은?
본부장 : PMA, 파키스탄 군사학교입니다.
CIA 국장 :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본부장을 바라본다)
본부장 : 파키스탄의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입니다.
CIA 국장 : 은신처로부터는 얼마나 떨어져 있소?
본부장 : 1마일 정도입니다.
마야 : 4221피트입니다. 1마일의 10분의 8가량입니다.
CIA 국장 : 자네는 누군가?
마야 : 저는 이 장소를 찾아낸 그 X년(mother-fucker)입니다, 국장님.


때는 2011년 오바마 1기 행정부 시기이다. 조지 W 부시 전 행정부 시절 이라크 침공 결과 개전의 명분이었던 불법적 대량살상무기가 이라크 내에서 발견되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입지가 상당히 위축된 상황이었다. CIA로선 빈 라덴임을 100% 확신할 수 없는 군사작전을 벌였다가 또다시 국제적 망신을 사고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군부가 지배하는 파키스탄은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고 있긴 하나 엄연한 이슬람 국가이고, 국민들 사이에 반미 정서가 팽배한 곳이다. 빈 라덴 은신 추정지가 파키스탄 군부 엘리트의 산실인 육사(陸士)와 12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니 군사작전을 내키는 대로 펼 수가 없는 상황인 까닭에 마야는 그런 ‘골치 아픈’ 정보를 찾아낸 자신을 스스로 ‘X년’이라 부르고 있는 장면이다.

전 세계의 기밀을 다루는 최대 정보조직의 말단 요원이 미국 대통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CIA 수장(首長)과 ‘맞짱을 뜨는’ 이런 면모야말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간단치 않은 나라임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할 것이다.

〈제로 다크 서티〉는 암전(暗轉) 중의 음성만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9·11 테러 때 실제 녹음된 구조 요청 음성들이다.

“너무 뜨겁다, 나는 죽을 것이다.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전해달라, 건물이 곧 무너질 것 같다, 다리가 부러졌다, 살려달라….”


2001년 9월 11일에 미국에서 발생했던 항공기 납치 동시다발 자살 테러로 인해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붕괴되고,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미 국방부 펜타곤이 공격받아 일부 파괴되었다. 2996명이 사망하고 6000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343명은 인명을 구하려 불타는 건물에 뛰어든 뉴욕소방국(FDNY) 소속 소방관이었다.

가령 이런 상상을 해보자. 한국의 대(對)아프리카 정책에 불만을 품은 아프리카 테러단체가 대한항공 여객기를 납치해 여의도 63빌딩에 처박았다. 건물이 붕괴되며 500명(우리나라 인구가 미국의 6분의 1 규모임을 감안했다)이 죽고, 1000여 명이 크게 다쳤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의 딸이 그 테러로 비명횡사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과연 그런 일이 벌어진 뒤에 어느 흑인이 서울 종로 거리를 멀쩡히 활보할 수 있겠는가.


각종 상 휩쓸어

그런 상상을 한 번쯤 진지하게 해보고 이 영화를 보면 매 장면이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제목 ‘Zero Dark Thirty’란 자정에서 30분이 지난 시각(군대식 시간 표기로는 00시 30분)을 지칭하는 군사용어다.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이며 미 특수부대가 야간 작전을 주로 시행하는 시간이다.

9·11 테러 2년 뒤인 2003년, CIA 요원 마야는 파키스탄 주재 미 대사관에 배정되어 상관인 댄(제이슨 클라크)과 함께 알카에다의 테러 행위를 미리 알아내 대비하기 위해 중동 모처 CIA 극비 지역에서 사우디 테러집단의 정보원을 신문한다. 말이 신문이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대라 CIA는 고문으로 다그친다. 밧줄에 매달아 굶기고 때리고 물고문하며 벌거벗긴 채 목줄을 걸어 개처럼 기어 다니게 만든다.

그 덕분(?)에 정보원으로부터 빈 라덴의 측근에 ‘아부 아흐메드’라는 인물이 있으며 그와 가족 대부분이 테러에 관련돼 있다는 자백을 받는다.

이후 5년 동안 마야는 아흐메드의 단서를 쫓지만 별 성과가 없다. 언니처럼 따르던 동료 요원은 2009년 알카에다 내부의 변절자를 만나려다 테러로 폭사한다. 이후 가까스로 아흐메드의 존재를 확인한 마야는 파키스탄 정보부의 도움으로 전화 발신을 추적해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 있는 거대 주택에 그가 드나드는 것을 알아낸다. CIA의 다른 요원들은 그 가옥에 빈 라덴이 있을 확률을 60%로 여기지만 마야는 100%라 확신하며 상부를 끈질기게 설득한다.

결국 2011년 5월 1일 승인이 떨어지고 스텔스 헬리콥터 2대에 분승한 미 해군 특수전 대원들이 은신처를 급습해 빈 라덴을 사살한다. 복귀한 특수전 대원들이 수습해 온 시신이 빈 라덴임을 확인한 마야는 작전 종료 후 귀국 수송기 C-130에 혼자 탑승한 채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이 영화는 뉴욕비평가협회로부터 2012년 작품상과 감독상, 촬영상을 받았다. 이듬해엔 제70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제85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각본상, 편집상 등의 후보로 올랐으나 음향효과상만 받았다.

아카데미 시상식 직전에 미국 정부의 고위관료가 이 영화에서 묘사된 알카에다 대원 고문 장면과 관련해 실제로 고문이 있었음을 시인한 것 때문에 정치적인 파장을 우려한 아카데미 측이 주요 부문상을 주지 않았다는 뒷얘기가 있다.

이 영화가 놀라운 점은 10년 동안 테러조직의 배후를 쫓는 한 여성의 처절한 사투와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이 거둔 성과를 극적으로 다루면서도, 다른 한편 전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불법 작전과 고문, 타국 주권 무시 등 미국과 친미 성향 아랍 국가들의 치부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훌륭한 반미영화인 것이다.

그런 영화를 할리우드 거대 자본으로 만들어 내고, 또 그런 영화에 주요 영화상을 주는 나라 미국. 알면 알수록 무서운 국가 아닌가.



Scene in English
명대사 한 장면

빈 라덴 은신 추정 지역에 특수부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CIA와 달리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은 해당 거처에 있는 인물이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증거가 100% 확보되지 않는 한 군사작전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가안보 보좌관(National Security Advisor, NSA)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백악관 비서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총괄 운영한다. 전통적으로 미국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은 컨트롤타워인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 외교 사령탑인 국무장관, 안보 사령탑인 국방장관이 이끈다. 천신만고 끝에 은신처를 알아냈는데도 아무런 진전 없이 수개월이 흐르자 마야는 소속 본부장을 찾아가 협박성 최후통첩을 한다. 그 확고함에 자극받은 CIA 본부장은 백악관 복도에서 국가안보 보좌관을 만나 군사작전을 허락해 달라고 강하게 요청한다. 안보 보좌관이 계속 거부하자 본부장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냐?”고 따져 묻는다.


국가안보 보좌관 : 만약 이 문제가 정치적인 거라면, 우리는 이런 대화를 선거가 있는 10월에 하는 게 맞을 거요. 이는 연역적 추리와 추정, 가설을 바탕으로 한 리스크 그 자체일 뿐이오. 당신이 제시하는 유일한 근거는 감금 중인 억류자를 신문해 6년 전에 들은 말이 전부잖소. 이곳의 정치적 분위기는 당신에게 ‘엿먹으라고’ 말하고 있는 거요. 당신들의 전임 보스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자료를 내던진 방에서 내가 일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군요. 최소한 그들은 증거 사진이라도 들고 왔었소.
If this was political, we'd be having this conversation in October when there's an election bump. This is pure risk, based on deductive reasoning, inference, supposition, and the only human reporting you have is six years old, from detainees who were questioned under duress. The political move here is to tell you to go fuck yourself and remind you that I was in the room when your old boss pitched WMD Iraq. At least there you guys brought photographs.

CIA 본부장 : 그래요, 당신이 옳소. 당신이 방금 말한 전부에 나도 동의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뭔가를 ‘하지 않는’ 데서 오는 리스크는 어떻게 알아내느냐는 거요? 응? 빈 라덴이 당신 손가락 사이로 슬며시 빠져나가게 내버려둘 가능성의 리스크 말이오. 이거야말로 끝내주는 질문이지요.
You know, you're right. I agree with everything you just said. What I meant was, a man in your position, how do you evaluate the risk of *not* doing something? Hmm? The risk of potentially letting bin Laden slip through your finger. That is a fascinating question.


이 대화 직후 미 국가안보 보좌관은 “군사작전에 동의함을 뜻하지는 않는다”면서도 “구체적인 작전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말한다.



월간조선   2018년 09월호    글 :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