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위암 4기 판정
죽음을 준비하는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막내딸이 감독·각본·촬영·편집·내레이션
일본 건설기계 분야 대기업인 고마쓰의 안자키 사토루 전 사장이 '생전 장례식'을 치렀다는 내용인데요. 그는 지난 10월 초 암 선고를 받고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뒤, 아직 건강할 때 여러 지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며 도쿄의 한 호텔에서 '감사의 모임'이라는 생전 장례식을 열었습니다. 회사 관계자, 동창 등 그의 지인 약 1000명이 모였죠.
안자키씨는 모임의 기획부터 실행까지 모두 직접 준비했고 참석자들에게 감사 편지도 전했습니다. 전 테이블을 돌며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도 건넸죠. 그는 이후 기자회견에서 "죽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인생을 충분히 즐겨왔고 수명에도 한계가 있다. 마지막까지 몸부림치는 것은 내 취향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이런 생전 장례식은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일본에서는 이런 활동을 슈카츠(終活)라고 부릅니다. 생전 본인의 뜻대로 인생을 마무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으로 2010년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해 하나의 시장으로 자리매김했죠. 오늘 소개할 이 영화로 인해 더 활발해졌는지도 모르겠네요.
일본 민간 화학 회사에서 40년 동안 월급쟁이로 일하던 스나다 도모아키씨는 67세에 은퇴합니다. 친구들과 여행도 가고 그동안 바빠 함께하지 못한 가족들, 특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들과 노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건강검진에서 위암 4기 판정을 받게 되는데요. 수술조차 불가능한 상황. 그는 하루하루 눈물 흘리며 슬퍼하는 대신에 자신이 떠나고 남겨질 가족들을 위해 준비를 시작합니다.
암 선고 후 그가 제일 먼저 작성한 건 바로 '엔딩노트'. 쉽게 말해 유서지만, 유서보다 사적이고 법적이 효력이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리스트입니다. 다음은 스나다 도모아키씨가 쓴 엔딩노트 입니다.
1.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한번 믿어보기
2. 손녀들 머슴 노릇 실컷 해주기
3. 평생 찍어주지 않았던 야당에 투표하기
4. 꼼꼼하게 장례식 초청자 명단 작성하기
5. 소홀했던 가족과 행복한 여행하기
6. 빈틈이 없는지 장례식장 사전 답사하기
7. 손녀들과 한 번 더 힘껏 놀기
8. 나를 닮아 꼼꼼한 아들에게 인수인계하기
9. 이왕 믿은 신에게 세례받기
10. 쑥스럽지만 아내에게 사랑한다 말하기
11. 엔딩노트(사후 연락처, 채권과 채무, 유산 분배에 관한 희망, 아들·딸·아내·손녀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기타)
1번부터 10번까지는 생전에 그가 하고 싶었고 실제로 죽기 전까지 이행했던 일종의 버킷리스트라 한다면, 11번은 그가 세상과 이별한 뒤 가족들에게 전해야 할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연락해야 할 사람들, 자식들에게 남길 유산, 심지어 계좌에서 자동이체되는 항목까지. 그의 성격처럼 정말 꼼꼼하게도 '죽을' 준비를 마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눈여겨봤던 건 죽음을 준비하는 그가 아니라, 그의 가족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암에 걸려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아마 저 같으면 깊은 슬픔에 빠져 매일 눈물 속에 살겠죠.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zabeth Kubler-Ross)가 1968년 발표한 『죽음의 순간(On Death And Dying)』이란 책을 보면 죽음을 앞둔 환자의 심리를 5단계로 표현했는데요. 일단 자신이 죽음을 '부정'합니다. 그러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시련이 일어났는지 '분노'한 뒤, 제 죽음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룰 수 있도록 신이나 절대자에게 '협상'을 시도하죠. 이후 병세가 나빠지기 시작하면 나아질 희망이 없음을 알고 극도의 상실감과 '우울'감을 겪다가 비로소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의 5단계).
하지만 도모아키씨와 그의 가족들은 자신이, 남편이자 아버지, 아들이 곧 죽을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담담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인상 깊었던 한 장면을 소개하자면, 도모아키씨가 94세 노모와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늙은 자신보다 아들을 먼저 여의게 되는 어머니의 기분이란…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으면 좋을지에 대해 서슴없이 이야기하고, 도모아키씨가 농담처럼 "어머니와 같이 가는 게 좋은데'라고 한 말에, 어머니는 '그럼 좋지'라고 받아칩니다. 마치 이 상황을 미리 겪어본 사람들처럼요.
앞의 4단계를 모두 편집하고 '수용'의 단계만 보여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최대한 배제되어 있습니다(감독에게 한번 묻고 싶군요).
영화는 도모아키씨의 막내딸 스나다 마미가 감독·각본·촬영·편집에 이어 내레이션까지 직접 맡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지루하고 따분하지 않겠냐는 생각은 접어두셔도 좋습니다.
영화 속 등장하는 도모아키씨의 '아재 유머'와 막내딸이 아버지의 입장에서 쓴 내레이션에서 일상의 재미를 찾을 수 있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편집 해 젊은 시절의 나, 연애할 때의 나, 가족을 일구고 난 뒤의 나, 그리고 현재를 보여줌으로써 평범한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도모아키씨는 5월 병을 발견하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후, 그해 12월 사망하게 되는데요.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그가 그토록 하루하루 살게끔 하였던 손녀들은 그를 어떤 아들, 남편, 아빠, 할아버지로 기억할까요? 영화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자 그럼, 여러분의 엔딩노트엔 무엇을 작성하고 싶으신가요?
엔딩노트
내레이션: 스나다 마미(일본어), 한지민(한국어)
제작: 고레에다 히로카즈
음악: 하나레구미
장르: 다큐멘터리
상영시간: 90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일: 2012년 11월 29일
현예슬 멀티미디어 기자 hyeon.yeseul@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17.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