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맛·매운맛 다 본 인류… 미각도 진화의 촉매였다

해암도 2017. 2. 4. 06:49

美 언론인, 미각의 진화 추적… 쓴맛에 둔감한 味盲 돌연변이가 새로운 먹거리 더 많이 발견
매운맛은 힘든 시련 견뎌내고 살아남았다는 데서 쾌감 느끼게 해

'미각의 비밀'
미각의 비밀ㅣ존 매퀘이드 지음ㅣ이충호 옮김ㅣ문학동네ㅣ380쪽ㅣ1만6000원

"지구 상에 있는 동물 중 인간만이 쓴맛과 매운맛을 즐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묻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답이 나왔다. 몇 년째 '먹방' '쿡방' TV 프로그램이 줄지어 나오고 '맛스타그램(사진 공유 SNS 인스타그램에 음식 사진을 올리는 것)' 인기도 계속되고 있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은 넘쳐나지만 왜 맛있게 느끼는지에 대한 정보와 분석은 부족했던 것이 현실. 맛은 문화나 지리적 차이,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도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2006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현장 취재로 퓰리처상을 받았던 미국 언론인 존 매퀘이드는 21세기 과학기술을 동원해 미각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추적한다.

"맛은 수억 년에 걸친 진화 과정의 단계마다 더 깊이 그리고 더 복잡하게 성장했다. 맛은 진화를 위한 추진력을, 인간 문화와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추진력을 제공했다." 저자는 인류의 후각과 시각이 발달하고 불을 써서 조리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던 고생대의 삼엽충과는 달리, 인류는 짠맛, 단맛, 쓴맛 등을 느끼게 됐고, 이런 미각 진화의 과정을 거쳐 현생 인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험 결과를 통해 인간은 독특하게 쓴맛과 (맛은 아니지만) 매운맛을 즐긴다는 발견에 이른다.

먼저 한국인이 좋아하는 매운맛부터. 맛은 단맛, 짠맛, 쓴맛, 신맛, 그리고 2000년대 공인된 감칠맛까지 5개뿐. 매운맛이 맛이 아니라 통증이라는 사실은 유명하지만 매콤함이란 자극을 즐기는 사람은 늘어만 간다. 음식에 고추 개수로 매운맛을 표시하고, 매운 돈가스 한 판을 다 먹고 활짝 웃으면서 사진을 찍는다. 매퀘이드는 "극도의 매운맛을 즐기는 사람은 위험과 통증을 실질적인 큰 위험 없이 즐기고 통증이 끝났을 때 안도감을 느낀다"며 "가벼운 피학적 활동은 인간의 독특한 속성인 것처럼 보인다"고 썼다. 그는 '고추 문화'란 버틸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버티는 문화라고 했다. 힘든 시련을 견뎌내고 살아남았다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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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0만년 전 인류의 먼 조상은 처음으로 불을 써서 음식을 조리했다. 저자는 인류가 도구와 지식을 사용해 미각을 만족시킬 향미(香味·flavor)를 만들어낸 일이‘최초로 타오른 문화의 불꽃’이라고 썼다. /Getty Images 이매진스
씁쓸한 맛이 기본인 커피와 초콜릿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인류를 제외한 다른 동물은 쓴맛을 피한다. 그는 '성공을 거둔 종은 어떤 환경에든 잘 적응한다'고 지적한다. "쓴맛에 민감한 사람들은 독소를 탐지함으로써 집단이 살아남는 데 도움을 주었을 수 있다. 반면에 쓴맛에 둔감한 사람들은 새로운 먹거리를 더 많이 맛봄으로써 잠재력이 있는 먹거리를 발견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쓴맛은 몸에 독소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생물학적 경보 시스템이었지만, 쓴맛을 느끼지 못하는 미맹(味盲)이라는 돌연변이 덕에 인류가 더 번성하기도 했다는 뜻이다. 인간의 입맛이 변화하는 것도 쓴맛을 즐기는 이유. "나이를 먹으면서 쓴맛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180도 반대로 아주 기분 좋은 맛으로 변한다. 모순을 수용하는 이 능력, 즉 혐오스러운 것도 받아들이는 기묘한 열망은 요리에 생명의 숨길을 불어넣는 원천이다."

12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설탕은 소화를 돕기 위한 의약품이기 때문에 설탕을 먹는 것은 종교적 금식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는 일화나, '단것을 즐기는 것은 믿음의 징후이다'라는 코란의 문구, 화가 고흐가 즐겨 마셨다는 술 압생트가 정말 유해한지 등 풍성한 역사·문화적 지식이 곳곳에서 감초 역할을 한다. "미국 조지 H W 부시 대통령도 브로콜리는 안 먹었다"라며 브로콜리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핑곗거리도 제공한다.

단맛을 좋아한다고 '아기 입맛'이 아니고, 합성 감미료인 글루탐산나트륨(MSG)을 좋아한다고 해서 맛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단맛을 찾아다니도록 진화했고, MSG가 대표하는 '감칠맛'은 실제로 여러 향미를 조합해 폭발적인 맛을 낸다. 책을 덮고 나면 소위 '미식가'의 주장이 과학적 사실과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너와 나의 입맛이 다르기에 인간이 이렇게 번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캡사이신이 잔뜩 들어간 매운 짬뽕만 찾아다니는 사람도 '평양냉면 맛 좀 안다'는 사람에게 "차이가 있을 뿐 우월은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원제는 '맛있는(Tasty)'. '미각의 비밀'은 결국 '맛있는' 것을 찾아온 인류의 진화사다.


 조선일보   양지호 기자    입력 : 2017.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