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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情이 뭐냐' 질문 받은 핀란드女가 스스럼없이 꼽은 건

해암도 2016. 9. 30. 04:53

한국의 情, 할머니 

따루 살미넨·작가 겸 방송인
방송에 출연하면서 한국 구석구석을 많이 돌아다녔다. 깊은 산골짜기, 외딴섬, 안 가본 곳이 없지만 아름다운 경치보다도 그곳에서 만난 시골 할머니들부터 떠오른다.

할머니들의 인생사를 듣다 보면 온갖 힘든 일을 겪었어도 긍정적인 사고를 잃지 않고 버텨내셨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산골짜기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어릴 때 바닷가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술 마시다가 만난 친구에게 고작 16살이던 할머니를 시집보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기 싫었지만 결국 가족의 뜻에 따라 깊은 산속으로 왔다. 막상 도착해보니 남편은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었고,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탈출도 시도했다. 그렇지만 어두운 산길을 잘 몰라 다시 잡혀왔다.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할머니는 이제 혼자 깊은 산속에 살고 계신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눈시울을 붉히시면서도 "이제는 괜찮다, 괜찮다"고 하셨다.

비슷한 형편이었던 할머니들을 많이 뵈었다. 밤낮으로 일하고, 술 취한 남편에게 맞기도 하고,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음에도 남은 인생을 밝게 살아가는 모습이 대단하다.
시골 할머니들이 차려주시는 밥상도 빼놓을 수 없다. 집에서 담근 고추장, 된장에 텃밭에서 키운 고추를 찍어먹고 산에서 손수 캐오신 나물 반찬을 먹다 보면 왜 장수하시는지 알 것 같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시골 밥상의 나물 내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의 정(情)이 뭐냐고 내게 물어오면 스스럼없이 '할머니'라고 대답한다. 할머니들은 남을 먼저 생각해주고,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도 딸처럼 대해주신다. 지혜와 정이 넘치는 분들이다.

나이가 들면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할머니들처럼 힘들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어려움에 처해도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향하는 생활 철학을 본받고 싶다.

그분들을 보면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태연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행복한 삶의 열쇠라는 생각이 든다.


따루 살미넨·작가 겸 방송인    입력 : 2016.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