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엔 살구꽃 피는 ‘목수’의 집, 아무런 사치없이 사치스럽다

‘난 요즘 집 수리(修理)에 재미를 붙였다. 집수리 하면 무언가 촌스러운 느낌이 들거나 동네에서 흔히 보던 간판을 떠올린다면 내가 말하려는 그것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하는 일 역시 여느 집수리쟁이들처럼 현장 인부들의 숫자를 헤아려 점심밥을 시키고, 삼립빵과 컵라면의 가격 차이를 따져 새참을 준비하고, 내일 사용할 벽돌을 미리 주문하고, 새벽 인력시장에 기별해 젊은 사람이 아니면 되돌려 보내겠다며 눈을 부라리는 집수리 목수인 것이다.’(‘SPACE’ 2011년 8월호)
건축가에서 수리업자로의 변신을 선언한 김재관 무회건축사무소장(54)의 선언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진지하다. 거기에는 전인적 존재로서의 건축가상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 흐름에 대한 통찰과 함께, 개인 삶의 변화에 대한 결의가 담겨있다. 좀 더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요즈음 내 명함에는 건축가 대신 목수라는 직함이 찍혀 있다. 그동안 지향했던 건축가적 삶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내 삶의 경로를 수정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내가 소유한 재능 혹은 자질이라고 불리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언어를 뼈아프게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과 “내 생각”이라고 부르던 건축에 대한 관념조차도 내 몸에서 자란 것이 아님을 알고서다.’

서울 명륜동 집의 안과 밖. 13평의 좁은 집 안에는 최소한의 물건만 놓았고, 현관 바깥에 선반을 달아 책과 음반, 스피커, 각종 연장 등을 정리했다.
이전의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교회건축의 일인자였다. 1989년 건축가 곽재환의 맥 건축에서 일을 시작해 1997년 자신의 무회건축사무소를 열자마자 제주 강정교회 설계를 맡았고, 이 작품으로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지금은 해군기지 건설로 유명해진 강정마을의 오래된 교회를 그는 과감하게 노출콘크리트로 신축했다. 교회 하면 매끈한 대리석이나 스테인드글라스, 뾰족한 첨탑을 연상하던 신자들에게 뭉툭하고 소박한 느낌의 건물을 안겼다. 노출콘크리트는 순수해서 아름답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후 교회 설계 주문이 이어졌다. 부천 성만교회, 파주 새힘교회와 풀향기교회 등 10개를 지었다. 겸허와 절제, 주변 환경과의 조화, 햇빛·바람·나무 같은 자연의 도입이 특색이다. 그러나 “맥락 없는 한국 교회 건축을 혁신함으로써 일가를 이뤄보자”는 생각을 10여년 만에 접었다. 교회 특유의 권위주의, 설계를 둘러싼 성직자나 신자들과의 의견 대립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의 계몽적 건축관에 지쳐갔다. 훌륭한 건축을 통해 사람들을 고양시키겠다는 생각은 종종 능력의 한계에 열등감으로 이어지곤 했다. “영혼이 두부처럼 박살 날까 봐” 두려웠다.
변화의 계기는 한국건축가협회가 2009년 개최한 ‘일일 건축설계사무실’ 행사에서 찾아왔다. 거리에 파라솔을 펴고 앉았는데 시민들이 정작 물어보는 내용은 ‘정화조 고칠 줄 아느냐’ ‘집을 가장 싸게 짓는 방법은 무엇이냐’ 등이었다. “사람들이 건축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때 서울 서초동에 사는 율리아나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영어교사인 그는 자신의 단독주택을 고치기 위해 수첩을 빼곡히 채워가며 몇년째 준비 중이었다. “건축가를 만난다는 생각에 잠을 못 이뤘다”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집을 고쳐주기로 했다. 처음에는 설계만 했는데 시공비가 예상보다 늘어나 고민하는 건축주를 보고 아예 시공까지 맡았다. 2011년의 일이다.
그후 5년 동안 김 교수네, 정현이네, 재훈이네, 상도동집, 유진이네, 건우네, 제주횟집, 철민이네 등 10건을 고친 집수리업자로 살았다. “건축가의 역할이란 건축주들이 꾸는 꿈, 그들의 의식 속에 있으나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는 꿈을 해독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교회건축에 비해 가정건축은 “너절하고 치열한 극사실주의”였으며, 도면 위에서 깔끔하게 이뤄지는 신축 설계와 비교해 조건과 변수가 많은 집수리는 “서슬이 퍼런 검으로 겨루는 진검 승부”임을 느꼈다.

서울시내를 향해 확 트인 조망은 이 집의 자랑이다.
그가 수리한 집 가운데는 1년 전 입주한 자신의 집도 있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8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 찾아간 그의 명륜동 집은 북악산 비탈이었다. 초행이라면 약간 현기증이 느껴지는 경사의 골목을 따라 들어선 다세대 주택들 가운데서도 맨 꼭대기였다. 외관은 서울시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붉은 벽돌 벽에다 철문을 달고 있었다. 세입자가 사는 1층, 2층을 지나 주인집인 3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달랐다. 집과 산비탈이 축대 하나를 경계로 코를 맞댔고, 바닥에는 비계가 깔렸다. 현관 앞에 작은 평상이 있으며,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야외 식탁이 나왔다. 식탁 옆 넓지 않은 땅에는 커다란 살구나무가 자란다.
현관 입구가 독특했다. 집의 외벽에 ㄱ형으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한 선반에는 책과 음반, 오디오와 스피커, 그리고 주인의 직업을 보여주는 전문가용 공구와 건축재료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날이 좋으면 평상이나 식탁에서 밥 먹고 차 마시고 고기 굽고 술 마시고 이야기하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겨울에는 식탁 옆에 매단 무쇠 화로에다 장작을 피운 뒤 작은 잉걸불을 집안 작은 화로로 옮겨간다. 도무지 집과 산,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게 이 집의 얼굴이다.
집안은 객실이 분리된 옛날 기차 안처럼 느껴진다. 직사각형 대지에 들어선 집은 가로가 18m인데 비해 세로는 1.2~2.4m이다. 한 층이 12평에 불과하다. 그래서 한식방처럼 쓰이는 넓은 평상, 식탁 겸 거실 역할을 하는 탁자와 의자, 칸막이 친 주방, 붙박이 장롱이 일렬로 들어섰고 안쪽으로 침실과 화장실, 다용도실이 붙어 있다. 이 공간들을 관통하는 긴 복도에는 남향으로 2개의 큰 창이 나있어 서울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장재는 평범한 소나무다. 주방의 칸막이 재료는 포장박스를 만드는 데 쓰는 하얀 플라스틱이다. 물건은 거의 없다. 아무런 사치도 없었으나 사치스러웠다. 그중 백미는 집 한쪽의 넓은 평상이다. 작은 한옥 사랑방을 연상시키는 그곳에는 좌탁과 그림, 화로와 목침, 그리고 이 집의 상징인 살구나무를 볼 수 있는 창이 있다. 이 동네를 산책하던 주인은 높은 축대 위에서 깃발처럼 날리는 살구나무를 보고 한눈에 반해 이 집을 샀다. 나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봄에는 꽃을, 가을에는 열매를 선물했다.
살구나무집의 원형은 김재관 소장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무회(無懷)부락 시골집이다. 충북 옥천군 청성면 장수리 무회부락. 그가 유학자였던 할아버지, 공무원이던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유학 오면서 그 집을 떠났다. 삼양동 학교 소사의 집 다락방에 혼자 하숙했는데 첫날 자다가 연탄가스를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려서 마당으로 나가 수돗물을 틀었더니 희뿌연 거품에서 소독내가 확 끼쳤다.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 간직한 이상향으로 돌아가기를 꿈꾼다면, 김 소장에게 그곳은 무회부락이다. 장난꾸러기이던 그를 감싸주고 한문을 가르쳤던 할아버지가 계시던 사랑방, 할머니가 큰 항아리에 깨끗한 물을 찰랑찰랑 채워두시던 부엌, 집 뒤가 바로 산으로 이어지던 마을. 명륜동 집은 무회부락의 재현이다. 건축사무소 이름을 무회로 지은 것도 그런 집을 짓고 싶어서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그는 평범한 30평대 아파트에 살았다. 건축가이면서도 서울에서 단독주택을 사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산비탈의 집이란. 보통 도시의 집은 산과 도로로 분리돼 있는데 이 집이 산의 경사지에 자연스럽게 들어앉은 것은 옛날 더 위쪽에 있던 무허가 집들이 철거됐기 때문이다. 이 집은 수리의 결정판이기도 하다. 살릴 수 있는 자재는 모두 살렸고 다른 집을 짓다가 남은 재료를 썼다. 그는 건축에 미감이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능에 충실하면 굳이 배율을 따지지 않아도 그냥 아름답다.
설계와 시공의 분리는 건축가의 숙명이다. 일정 규모 이상 건축물의 경우 설계하면 사후에 감리할 뿐 시공에는 관여할 수 없다. 그러니 집을 어떻게 짓는지 모른 채 지을 수도 있다. 김 소장이 수리를 시작한 건 집을 샅샅이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원리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였다. 처음 고친 율리아나네 집은 목재 패널로 담을 높이 쳐 사생활을 보호하는 대신, 창을 넓히고 물에 빛을 반사시키는 방식으로 어둡다는 단점을 보완했다.
그가 좋아하는 유진이네 집은 가장 흔한 자재인 시멘트 벽돌을 내장재로 사용했다. 접착용 시멘트를 쓰지 않고 맨 벽돌만 쌓는데 기술이 필요해 직접 시공했다. 그는 “재료가 아닌 해석에 의해 집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비싸거나 특이한 재료를 선호하지 않는다. 흔히 쓰는 재료가 좋은 재료이며 헌 집에서 나온 자재도 쓸 만하다면 좋은 자재다. 주어진 비용과 조건 아래서 좋은 집을 짓는 일은 “알파벳 몇개로 좋은 문장이 나오는 것”과 같은 원리다.
수리업자로 명성이 나면서 그에게 집을 고쳐달라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제 현장에서 수리를 지휘하거나 중간에 설계를 고치지 않는다. 집의 원리를 충분히 알았기 때문에 설계가 더욱 단단해졌고, “제가 현장에 가나 안 가나 마찬가지예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수리는 한자로 풀어보면 이치(理)를 닦는(修) 것이다. 결코 촌스럽거나 궁기가 흐르는 단어가 아니다. 새로 짓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이면서 어려운 일이다.
그는 수리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 1970~80년대 우후죽순처럼 지어진 단독주택, 다가구·다세대 주택은 수명이 다 됐지만,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과거처럼 완전히 밀어버리고 새로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은 쉽지 않다. 고쳐서 살 수밖에 없다. 집은 당대의 경제·문화적 조건, 가족의 상황 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시대가 달라지면 그릇 역시 바뀌어야 한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 비슷한 설계·공법·시공의 집들이 각자 개성을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새로 쓰기가 아니라 그동안의 역사와 경험을 토대로 한 이어 쓰기, 다시 쓰기가 집수리다.
예의 선언에서 그는 ‘자신의 영토라고 믿었던 곳으로부터 소출을 얻지 못한 자의 쓰디쓴 절망’과 함께 ‘그것에 상응하는 자유’를 얻었다고 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각 영역을 조율하고 통합하던 근대적 의미의 건축가 시대는 조금씩 저물고 있다. 그들이 도시를 캔버스로, 설계를 예술작품으로 여기는 사이에 사람들의 감각은 달라졌다. 거대하고 기묘한 초국적 건물 대신, 시간이 축적된 작은 공간에서 안정과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김 소장은 이런 시대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한 건축가다. 도시의 재개발이 아니라 재생이 화두인 지금, 낡은 집을 본격적인 설계 대상으로 삼은 건축가는 그가 처음이다. 오래된 집을 진지하게 재설계함으로써 집수리란 단어의 맥락을 바꿔놓았다. 그렇다면 다음 건축적 목표는? “그런 건 없다.” 그는 자유인이다.

1962년 충북 옥천 생으로 전직 건축가다. 지금은 낡은 집과 허름한 집, 한물 간 집, 오래된 집을 골라 그것을 뜯고, 째고, 뚫고, 파고, 덧대어 수리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며, 녹슨 철근, 구부러진 쇳조각, 심드렁한 돌덩이, 나무와 바람, 빛과 물을 좋아하는 집수리 전문 목수로 산다. 특히 ‘이건 정말 신축밖에는 도무지
방법이 없군’이라는 집의 수리에 자신을 가지고 있으며, 용접과 조적에도 능하다. 율리아네 집, 정현이네 아파트, 재훈이네 집 등 열채를 수리했다.
ⓒ 경향신문 글 한윤정 선임기자 사진 박기호 사진가 입력 : 2016.02.19
세상 모든 일이 궁금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집수리 현장을 누비는 사람. 마흔이 넘은 나이에 소년 같은 영롱함을 잃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스스로 ‘김목수’라 칭하고, 세상은 ‘집수리 전문가’라고 부르는 건축가 김재관 소장이다.
집 고치는 건축가, 그 출발은 어디서부터인가요
이런 고민을 늘 했어요. 건축가들이 늘 하던 아키텍처(Architecture)라는 것, 이게 이 일의 전부는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요. 기존 건축가들이 작업하는 방식으로는 사회에 건축가가 관여할 수 있는 폭이 좁다는 사실에 한계를 느꼈어요.
기존 건축가들이 작업하는 방식이라 함은?
소위 대가(大家)의 시대에는 건축가가 권위 있는 직업이었어요. 근데 그 시대에는 건축이 권위 있을 만 했어요. 그만큼 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었거든요. 두 번의 전쟁 이후도 마찬가지였고요. 건축물에 대한 수요는 많은데 그만한 기술이나 능력을 갖춘 사람은 소수였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우리나라 건축계는 여전히 그 시대를 연모하고 있어요. 교육도 그대로고요.
바뀐 시대는 어떤 모습인가요
전문가들이 생긴 거죠. 건축가는 여전히 모든 걸 통합하는 지휘자(Conductor)로 욕심을 부리고 있어요. 다른 이들은 욕심부리지 않고 가구만, 조명만 파고들어서 제 영역을 이룬 거예요.
건축하는 사람들은 조금씩 모든 영역을 다 알고는 있는데, 제대로 아는 건 사실 별로 없어요. 영토 상실의 시대가 열린 거죠. 그 시대에 제가 있었어요.
건축은 계속 진일보하는 것 아니던가요
제가 건축을 하던 시대에는 인테리어, 가구, 빌더들한테 밀려 건축가의 영역이 쇠퇴해갔어요. 욕은 하는데 시장은 뺏기는 거죠. 왜 그럴까 보니 건축가를 원하는 사람이 점점 없어지는 거예요. 다른 전문가들이 우리보다 더 뛰어난 부분이 있거든요. 게다가 건축가는 현장에서 괜히 폼만 잡는 것 같으니 소위 ‘재수 없는’거죠. 불우한 시대를 맞았죠.
그럼 건축가가 필요한 영역은 어딘가요
마치 돈 많은 메디치 가문이 미켈란젤로를 후원했던 것처럼, 돈 많은 사람들이 건축가를 찾는 거죠. 일반 집장사 집은 눈에 안 차는 사람들이 건축가를 부르는 거예요. 한마디로 건축가란 불러줄 사람이 없으면 시장을 독자적으로 형성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거죠.
소장님이 그 상황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느껴집니다
사실 나는 뛰어난 건축가가 정말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면면히 느껴왔어요. 저는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늘 최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진지하게 임했고요. 너무 뼈아픈 고백인데, 나는 내가 모자라진 않지만 스스로 원하는 만큼 뛰어나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굉장한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엄청나게 똑똑하지도 않고요.

BEFORE
제주 강정교회로 건축문화대상을 받고, 여러 성과도 거뒀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나요
재능이라고 하는 건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디자인 재능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인문학적 지식에 대한 희구(希求)가 있어야 해요. 앎에 대한 본능적인 갈구와 품성, 욕망이 있어야 하고 그걸 해결할 만한 지적능력이 있어야 해요.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조리기구가 나쁘면 꽝이잖아요. 거기다가 독창적인 사고, 배움을 통합해 해결하는 폭넓은 사고, 앎을 통해 배양된 자기 캐릭터 그리고 미적 감각도 있어야 하고요. 한마디로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재가 바로 ‘재능 있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나는 그만큼은 아니었던 거죠.
스스로 그걸 인정하는 건 힘든 일인데
미칠 것 같았어요. 내가 잘한 것보다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해 끝없는 열등감이 있었죠. 늘 불만스러웠고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질투가 생겼어요. 마흔 초반까지 그랬던 것 같아요.
그 시절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어느 날 문득 ‘네가 그런 재능이 있다 치자. 그럼 넌 그 생활을 만족했을까’생각해봤어요. 내가 그렇게 존중해 마지않는 일부 건축가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좋은 것만 있지는 않더라고요. 화려함 뒤에 쓸쓸함과 공허함이 있고, 미켈란젤로처럼 누군가 불러주지 않으면 독자적인 생산을 하지 못하는 게 있더라고요. 내가 도달하고 싶었던 그 세계의 내면까지 전체를 다시금 보니 내가 원하는 건 상황(State)일 뿐, 그게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었어요. ‘부자가 없으면 안 되는 미켈란젤로, 넌 그게 좋은 거냐?’ 자문했을 때,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는 거예요.
어떤 건축가가 되고 싶었는데요
나는 독자적인 인간이 되고 싶지, 스스로 무엇도 잉태하지 못하는 그런 절름발이 같은 부류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냉정히 돌아보니 심지어 그럴 능력도 별로 없더라 이거죠. 게다가 시장과 혈통, 건축가들의 역사를 돌아보며 앞으로 흘러갈 방향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꿈꿔왔던 대가의 시대는 절대 열리지 않을 거라는 분명한 사실에 직면했죠. 그때 결론은 딱 하나예요. ‘이렇게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
사람이 더는 할 수 없는 순간에 맞닥뜨릴 때가 있어요. 그때부터 일을 안 했어요. 재미도 없고 지겹더라고요. 살다 보면 그런 때가 있잖아요. ‘내가 너랑은 죽어도 못 살겠다’이런 순간이요. 그러다가 2009년 우연히 서울 문화의 밤 ‘일일건축설계사무실’ 행사에 나가게 됐어요.
무슨 생각으로 자원했나요
길에서 사람들 만나는 게 재미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곳에 건축가란 사람 다섯 명이 앉아있는데 사람들이 와서는 묻는다는 게 “정화조도 고칠 줄 아십니까?”인 거예요. “집을 가장 싸게 짓는 방법은 뭔가요?”도 있었고요. 서로 ‘저 질문을 나한테 안 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하며 안도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제게 와서는, 하수도를 물어보는 거예요, 하하.
근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들이 건축가에게 궁금한 건 우리가 생각하는 ‘구축’이란 의미의 건축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의 일상과 매우 가깝고, 그들을 괴롭게 하는 ‘집’에 관한 것들인 거예요.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거였죠.
거기서부터 소장님의 집수리 이력이 시작된 거군요.
그곳에 찾아온 상담자 한 분과 연이 닿아 수리한 집이 서초동 주택이에요. 단순히 재미있을 거로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진짜로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설계만 했기 때문에 건물에 문제가 생겨도 ‘아, 그거 시공팀이 잘못해서…’처럼 모면할 거리가 많았어요. 근데 서초동 집수리 작업은 서슬이 퍼런 검으로 승부를 겨루는 거더라고요. 자칫하면 내가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인 거죠. 근데 저는 오랫동안 건축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온 사람이잖아요. 건축가라는 영토도 내팽개쳤고요. 그래서 각오를 하고 작업을 시작했죠. 집 상태를 보고는 바로 후회했지만요, 하하.

20년된 양옥을 고친 서초동 주택(ⓒ박영채)
설계에서 현장의 집수리로 넘어가니 무엇이 달라지던가요
너무나 재미있었죠. 뭐, 아주 살맛이 나더라고요. 건축가는 설계 변경하려면 얼마나 복잡한지 몰라요. 그리고 설계하고 나면 할 일이 끝나서 건물이 지어지는 맨 마지막까지 관여하지도 못해요. 낳은 애를 키울 수는 없는 거죠. 근데 집수리는 달랐어요. 나는 집이 끝날 때까지 설계할 수 있어요. 현장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어? 이거 바꿔야겠는데, 바꾸자!” 하면 그냥 바꾸면 돼요.
무회건축의 시공팀이 따로 있어요?
지금 우리 직원들이 벽돌 쌓고 용접도 해요. 건축과 나온 애들도 다 현장에서 벽돌 나르고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구조나 재료로는 설계 안 해요. 해봤자 못 만드니까요. 벽돌을 쌓는 사람이 회사를 그만둔다, 그러면 설계를 바꿔요. 솜씨 좋은 목수 한 분이 팀에 들어오면, ‘자, 나무 쓰자!’ 하는 거예요.
건축주는 그런 재료나 구조 변경에 쉽게 동의하나요
저는 의외로 고집이 없어요. 가령, 배가 고파서 스파게티를 만들어야 하는데 마늘이 없다면 저는 메뉴를 바꿔요. 왜냐면 배고픈 것만 해결하면 되니까. 설계할 때 그게 어떤 재료든 어떤 디자인이든 건축주가 꾸는 꿈, 그 욕망을 해결해주면 되는 거예요. 건축주는 저에게 ‘그곳으로 저를 좀 데려다 주세요’하고 맡기는 거거든요. 근데 마늘이 없다? 그러면 딴 길로 가면 돼요.
큰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처럼 보여요
무엇보다 건축주를 좋아해야 해요. 좋은 와인을 먹을 때, ‘이 와인 내 친구가 참 좋아하는데, 같이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이런 경험 다들 있잖아요. 그리고 내가 그걸 챙겨갔을 때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죠. 그게 행복이니까. 집도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해야지 좋은 집을 만들어주고 싶은 거고, 그걸 만들어줬을 때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저는 건축주와 늘 연애하듯 만나요. 그러면 서로 행복해지죠.
특별히 그런 관계를 쌓는 비결이 있나요
서로 열심히 자기주장을 해요. 애써서 맞추고 배려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충분하게 하고 그 정서적 흐름을 이해하는 거죠. 건축주에게 난 충분히 내 의사를 말하고 이야기해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요. 그래도 메뉴는 많으니까 짬뽕 없으면 짜장면 먹으면 되는 거잖아요. 꼭 벽돌이 아니어도 되고, 나무가 아니어도 되는 거죠. 그거 아니더라도 건축주가 원하는 걸 할 수 있으니까, 재료 하나 바꿨다고 결핍되는 건 아닌 거죠.
그렇게 열심히 자기주장을 하다 보면 속내를 다 알게 되겠어요
깊은 얘기를 많이 알게 되죠. 가족 관계와 가족사도 자연스레 알게 되고요. 그런 게 공간에 묻어 나오는 건 당연해요. 내가 바라는 집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집을 만드는 거니까요.

그들의 욕구는 어떻게 파악하나요
가령 어떤 사람이 ‘안방 창을 크게 내주세요’ 라고 말했다면, 건축가는 ‘이 사람은 왜 이런 걸 원할까’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어요.
평생 햇볕이 안 드는 지하실에서만 살았을 수도 있고, 과거의 상처나 우울한 기억이 있어 빛이라는 밝은 것으로 그걸 만회하려 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햇볕이 너무 많이 들면 그토록 아끼는 가구가 다 바래고 망가져 버리는 걸 몰라요. 자신의 결핍을 만회하려는 생각만 있지 그 결과로 일어나는 새로운 상실은 모르는 거예요.
건축가는 창이 크지 않아도 그 결핍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주는 게 맞지, 무조건 창을 크게 해주는 건 아닌 거예요. 밤새 치통을 앓은 환자가 ‘이거 빼주세요!’했다고 그걸 빼버리는 치과의사가 어디 있나요.
그들 말 속에 숨은 뜻을 파악하는 게 쉽지만은 않겠어요
많은 건축주가 꿈이 있지만 꿈을 잘 말할 줄 몰라요. 그저 ‘심플하게’, ‘모던하게’같이 언어적 정의가 사람마다 다른 말을 하기도 해요. 그들의 의식 속에 있는,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는 꿈을 해독하는 게 건축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거죠? 당신이 말하는 큰 창은?’ 이렇게 결과로 내어놓는 것, 그가 가장 가려워했던 부분을 찾아내는 게 건축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에요.
결국 사람을 사랑하고 제대로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로 들려요
2009년 집수리를 시작한 이래로 제 관심은 오로지 집과 사람이에요. 아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누가 누구랑 만나게 하고 누구와 마주치지 않게 할 것인가,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만나기만 하면 다투는데 어떻게 모으고 흩을 건가, 재료는 어떻게 만질 것인가 하는 데 있어요.
지금 이야기하는 장소인 이 집만 해도 1년을 설계했어요. 오래 하면 저만 손해인데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왜냐면 그들이 좋아하는 걸 보고 싶으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연애하듯이 여러 제안을 던져요. ‘이거 어때? 저거 어때’하면서요.
무회 건축사사무소
02-323-6651 www.mooh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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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적인 분위기의 모던한 주택
면과 면이 만나고, 직선이 교차하면서 완성한 공간은 해가 움직일 때마다 시시각각 다른 풍경을 담아낸다. 창 너머로 짙은 녹음이 언뜻 고개를 내미는 집. 그 안에서 즐거운 신혼 생활을 시작한 파인피커스의 김건우 대표와 피브레노 임성민 대표를 만났다.
신혼집이 된 성북동의 오래된 주택

한스 베그네르의 윙 체어와 FK6720-3 소파, 유리 상판의 FK91 테이블, 폴 키에르홀름의 PK22 체어를 매치해 모던하게 꾸민 거실. 공간을 부드럽게 채워주는 페르시안 카펫은 건우 씨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공간이 흡사 지금과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과 선이 교차하며 단정한 아름다움을 담은 이 집은 파인피커스 김건우 대표와 피브레노 임성민 대표의 신혼 공간이다. 집은 성북동 언덕에 있는 40년 이상 된 오래된 주택을 기본 골조만 남기고 리모델링한 것으로, 해외에 계신 건우 씨의 부모님이 귀국하면 살기 위한 집이었지만 귀국이 늦춰지는 바람에 건우 씨가 지낼 목적으로 공사를 마무리했다. 원래 결혼 생각이 없었던 건우 씨는 자신의 취향에 맞춰 공간을 계획했지만, 지난겨울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위해 만났던 성민 씨와 결실을 맺으면서 집은 두 사람의 첫 보금자리가 되었다. 집은 반복되는 직선과 무채색으로 가득해 조금은 차갑지만, 개성 있는 신혼집으로 완성되었다.
![]() 캐비닛 위에 두 사람의 취향과 작업을 엿볼 수 있는 책과 성민 씨의 가죽 제품을 나란히 놓았다. | ![]() 옷감을 사용해 화려한 패턴이 인상적인 모닝턴의 쿠션이 FK 가죽 소파와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
남성적인 분위기와 모던한 취향의 매치

침대는 박소현 실장이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철재로 프레임을 제작한 뒤 덴마크 크바드라트 원단으로 커버링했다.
건우 씨는 남성복 편집 매장 파인피커스를 운영하다 최근 남성을 위한 리빙 인테리어 숍인 모닝턴을 오픈했다. 평소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그는 이번 공사를 주택 리모델링을 고집하는 무회건축연구소의 김재관 대표에게 의뢰하고, 인테리어는 가구&패브릭 컨설팅을 제안하는 이에프(2F)의 박소현 실장과 함께 직접 꾸몄다. 건우 씨는 건축가의 취향이 잘 드러나길 바라는 마음에 김재관 대표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했는데, 그 결과 마음에 쏙 드는 근사한 집이 탄생했다.
주택 외관은 회벽돌과 알루미늄을 사용해 남성적인 분위기를 더하고, 내부는 블랙&화이트 마감에 각재와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해 직선적인 요소를 배치했다. 가벽과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해 공간을 분리했지만 바닥 레벨을 맞춤으로써 전혀 좁거나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2층 천장은 불안정한 박공지붕을 가리기 위해 가벽을 만들고, 펀칭 기법을 사용해 보이드 공간으로 꾸몄더니 선과 선이 반복된 아름다운 공간이 완성되었다. 천장 단을 내린 아늑한 침실도 2층에 마련했다.

침실 옆에 딸린 세면대. 맞은편에는 욕실과 드레스 룸이 있다.
그다음은 인테리어 차례. 건우 씨는 부모님의 집을 인테리어했던 박소현 실장과 함께 자신의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무채색의 집은 백지와도 같아 어떤 가구, 콘셉트이든 자연스럽게 소화하므로 그는 꼭 갖고 싶었던 윙 체어를 시작으로 심플한 디자인과 소재감이 있는 가구를 배치했다. 가구 디자인과 컬러 선택은 박소현 실장의 조언을 바탕으로 한 것. 가구는 주로 해외의 모던한 디자인 가구와 국내 브랜드인 알루퍼스 제품을 사용하고, 침대는 박 실장이 직접 제작해 전체적인 무드를 통일하면서 비용도 절감했다. 이렇게 완성된 공간은 디자인과 색감이 균형을 이루는 아름다운 집이 되었다.
![]() 알루퍼스의 느와 라운지 체어로 꾸민 1층 거실. 2층 거실의 가구처럼 직선형의 프레임이 매력적이다. | ![]() 계단 위 천장에 PH 조명을 걸어놓았다. 2층 복도를 지나다 보면 액자 안에 조명이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들의 취향으로 채울 캔버스 같은 공간

1층 다이닝 룸의 전경. 로돌포 도르도니가 디자인한 몰테니&C의 웨어 테이블 위로 각재를 덧댄 노출 천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장의 거친 질감을 살리면서 집 안에 따스한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나무 소재를 선택한 것이다. 각재 사이로 천장 조명 빛이 아름답게 퍼진다.
건우 씨와 성민 씨는 앞으로 이 집을 어떻게 채워나갈지 고민이다. “처음에는 혼자 살 목적으로 남성적인 인테리어를 추구했는데, 막상 집이 완성되고 아내와 결혼하니 미안한 마음부터 들었어요. 따스한 컬러를 좋아하는 아내에게 집이 차갑게 느껴질 것 같아서 고민이 되었어요”라고 건우 씨는 말했다. 하지만 고민은 금세 해결될 것 같다. 서로 취향은 다르지만 둘 다 공통적으로 리빙,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기 때문.

다이닝 룸에 난 작은 창 너머로 주방이 들여다보인다. 건우 씨는 창을 통해 주방에서 아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한 마음이 든다고.
집 안 곳곳에 건우 씨가 남성복 옷감을 이용해 만든 독특한 디자인의 쿠션이 놓이고, 성민 씨가 만든 피브레노의 우아한 가죽 스테이셔너리가 조화를 이루면서 공간에 여성스럽고 우아한 무드가 더해지기 시작한 것. 공통의 관심사가 리빙인 만큼 각자의 브랜드에서도 리빙 소품 컬렉션을 선보인 두 사람은 이 공간도 자신들의 취향으로 아름답게 채워나갈 것이다.
가구&패브릭 컨설팅 이에프(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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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방 가구의 직선 장식은 철재를 잘라서 하나씩 덧붙인 것으로 건우 씨의 취향에 맞춰 제작했다. 2 주택의 외관. 데크에 벤치를 놓아 이웃 주민도 언제든지 앉아서 쉴 수 있도록 했다. 화단은 초록 식물을 심어서 서머 가든으로 꾸몄다. |
에디터 이새미(프리랜서) 포토그래퍼 문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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