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개봉한 영화 ‘그녀(her)’는 독특하다. 1999년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에서 배우 존 말코비치의 두뇌 속으로 들어간다는 엉뚱한 상상을 그려낸 스파이크 존스(Spike Jonze) 감독이 이번엔 ‘컴퓨터 운영체제(OS)와의 사랑’이란 기발한 착상을 화면에 담았다. 그가 직접 각본까지 쓴 이 영화는 2시간 동안 관객에게 사랑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자칫 묵직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영화는 독특하면서도 아름답게 이를 담아냈다.
테어도어(호아킨 피닉스)는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써주는 유령작가다. 그가 다른 유령작가와 다른
점은 인터넷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대필을 해준다는 것. 테어도어는 셰익스피어 뺨치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고객의 마음을 울리지만, 정작 자신은
아내(루니 마라)와 헤어진 뒤로 독한 외로움에 빠져 있다. 이성과의 만남을 기피하는 테오도어는 폰 섹스로 욕구를 해결하며 공허한 날을 보낸다.
영화는 10년 가량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인터넷, 영상, 통화, 메일, 문자, 대화가 모두 통합된 세계다. 사람들은 귀에 꽂은
이어폰과 명함집처럼 생긴 디바이스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다. 가상 현실에서 펼쳐지는 입체 게임은 화면 크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테오도어는 가상의 공간에서 가상의 게임을 즐기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대화를 나눈다. 영화는 묻는다. 나는 누구일까, 무엇이 되려고 하는
걸까,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테어도어의 무의미한 삶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최첨단 인공지능 운영체제’의 광고다. OS1이란 이름의 이 운영체제는 스스로 진화하도록 프로그래밍 돼 있다. 테어도어가 구입한 OS1은 스스로에게 사만다란 이름을 붙였다.
사만다(스칼렛 요한슨)는 몸을 갖고 있지 않을 뿐, 사람과 똑같다. 아니 사람보다 낫다. 그녀(her)는 테오도어의 말벗이 돼주고,
농담을 나눠주고, 고민을 들어준다. 부르면 언제든 나타나서, 친절하면서도 고혹적인 목소리로 위로를 해준다. 가식적인 위로가 아니다. 그녀는
재치있고, 교양 있으면서, 세련되고 섬세하다.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던 테오도어는 그녀를 만나면서 안정을 찾아간다. 테오도어는 그녀와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며, 함께 걷고, 함께 세상을 본다.
그녀(her)는 점차 테오도어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세상을 보면서 그녀는 마침내
인간이 갖는 사랑과 질투를 고스란히 느끼는 단계로 진화한다. 테어도어는 사만다를 통해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는 사만다를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그녀와의 사랑에 깊이 빠져든다. ‘첫사랑’을 느낀 사만다 역시 자신의 감정 속으로 빠져든다.
인간과 프로그램 간의 사랑…. 전설의 고향은 인간과 귀신의 사랑을 그렸지만, 스파이크 존스 감독은 인간과 프로그램의 사랑을 그렸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런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당신을 사랑해’라고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그 뒤엔 ‘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사랑해줘’라는 말이 숨어있는 건지 모른다. 겉으로는
‘당신을 이해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이해해야 돼’라고 말하는 건지 모른다.
영화는 겉으로 인간과 프로그램(her)의 사랑을 다뤘지만, 속으로는 인간과 인간(her)의 사랑을 그렸다.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
테어도어는 그녀를 독점하길 원한다. 그러나 그녀는 6000여명의 상대와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있고, 800여명의 다른 상대와 사랑에 빠져 있다.
테어도어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이렇게 누구를 사랑해본 적이 없다(I’ve never loved anyone the way I love
you)고 외친다. 사랑한다는 그 외침의 의미는 ‘그러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너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메아리처럼 들린다.
사만다(her)는 테어도어에게 새로운 세계로 가려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테어도어에게 떠나게 해달라고,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세상에서
살 수 없다고 애원한다. 홀로 남겨진 테어도어는 비로소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다. 상대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지 않는 것,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사랑의 전제라는 사실을.
영화는 대단히 청각적이다. 그녀(her)는 모습이 없이 목소리로만 존재한다.(스칼렛 요한슨은 목소리로만 출연해 로마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육신이 없는 그녀는 음악을 작곡해 감정을 표현한다. 사만다는 새가 날아가는 모습, 파도가 이는 바닷가의 풍경, 거리를 오가는 사람의 모습을 아름다운 선율로 그렸다.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와 테어도어(호아킨 피닉스)가 함께 부른 캐런 오(Karen O)의 ‘더 문송(The Moon Song)’은 압권이다. 목소리를 상대 배역 삼아 얼굴 표정만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도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