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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생활고로 잠시 고아원에서 생활했던 소년. 한때 날리던 싸움패로 조직세계에 몸담기도 했던 청년. 그가 마흔이 되던 해인 1996년 미국 유학을 결심, 미술을 공부해 2008년 뉴저지 주립대(Stokton College) 미술대학 교수(비주얼 아트)가 됐다. 드로잉 아티스트로서, 필라델피아 시청 전속 벽화가를 맡고 있기도 한 그는 도미(渡美) 17년 만인 2014년, 충남 한서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로 돌아왔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렵다’는 시대. 한때의 주먹 청년은 강한 대구 사투리로 항간의 말을 부인했다. “개천 그렁기 어디 있습니까? 부딛쳐서 하면 되는거지, 뭐~. 열심히 하모, 마, 안되능기 없능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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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에 한국 교수들 몇 분이 미국에 오셨어요. 그런데 흑인 하나가 가방을 빼앗아 달아나는 거예요. 마침 그걸 제가 잡아서 탁 자빠뜨렸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선, 골목 안에 숨어있던 흑인 3명이 나오는 겁니다. (두 손을 어깨 위로 들어올리면서) 이런 떡대 셋이 나오는데, 와~ 이거 안되겠더라고. 그래서 잽싸게 도망쳤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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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는 “아무리 바빠도 매일 2시간씩 거르지 않고 운동을 한다”고 했다. 자신을 위한 투자라는 것이다. 57년간 꾸준히 갈고 닦은 체력과 필력(筆力)으로 그는 눈에 띄는 곳곳을 그린다. 스케치북과 펜을 꺼내 즉석에서 그리는 소묘(素描, drawing)다.
이 교수가 특히 관심갖는 분야는 미국 빈민가의 흑인들. 대마초를 피우는 걸인, 주렁주렁 피어싱을 청년, 야구모자를 쓴 행인, 문신을 한 젊은이들, 스쿨 버스를 타는 학생들 모습이 정밀하면서도 풍자적으로 묘사된다. 이 교수는 “이런 그림 한 장을 그리는데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 교수의 드로잉에선 고층빌딩이 넥타이처럼 또아리를 틀고 늘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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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재밌잖아요.” 이 교수가 말했다. “예술은 공감입니다. 공감을 이루려면 같이 어울려야 돼요.” 그의 말처럼, 이 교수는 미국 대도시 흑인들을 그리기 위해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 “그림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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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같이 빵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렇게 되죠. 하나 그려서 주기도 하고요. 그러면 자기 얼굴이라면서 무척들 좋아해요. 어쩌다 인상쓰는 놈 있으면, 쌍절곤 시범 한번 좍~ 보여주고. 그러면 얘들이 ‘와~’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마스터(사부)’라고 불러요. 그러다 보면 친구가 되는 거죠.”
이 교수는 “중학교 때 이소룡 영화를 보고 푹 빠져서, 지금까지 계속 쌍절곤 돌리는 연습을 해왔다”며 웃었다.
“사실 미국 흑인들하고 우리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그물쳐놓고, 고기 잡듯 그 사람들 잡아다 노예로 부렸잖아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우리도 비슷했습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가서 죽도록 일했잖아요.
사실상 노예생활과 다를게 없었죠. 그래서 그런지 흑인들하고 얘기를 해보면, 이 사람들이 우리랑 감성이 비슷한 거예요. 그러는 모습이 우리 자화상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리기 시작한 게, 이렇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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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을 강조하는 이 교수의 시각은 수업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공감을 얻으려면 권위를 버려야 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귀국해서 보니까 학생들이 전부다 배꼽 인사를 하는 거예요. 요즘엔 그렇게 배우나보죠? 그래서 제가 그러지 말라고 ‘나 한테는 하이파이브를 해라’ 이렇게 말하고, 학생들하고 하이파이브를 했어요. 공감이 이뤄지면 의사소통이 자유로와 집니다. 선생이 무엇을 가르치는 수업이 아니라, 학생들하고 무엇을 같이 하는 수업이 되죠.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이게 커피를 흘린 자국이예요. 학생들하고 커피를 마시다가 일부러 흘린 거죠. 그리고 펜을 돌려가면서, 각자가 그 자국을 응용해서 한번씩 그린 겁니다. 가수들이 돌아가며 한 소절씩 불러서, 곡 하나를 완성하는 것처럼이요. 필라델피아 시청 벽에 있는 수십미터 크기의 대형 벽화도 이런 식으로 그린 겁니다. 같이 하는 겁니다. 누가 앞서고 누가 따라가고 하는 게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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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는 “지금까지 그린 소묘가 스케치북으로 300권이 넘는다”고 했다. 그는 “여행을 가든, 출장을 가든, 누구를 기다리든, 박물관에 가든, 항상 스케치북과 펜을 들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가 뉴욕 스튜디오 스쿨에서 미술공부를 하던 1999년의 에피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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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한번 어떤 모습을 보면, 고스란히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면서 “내만 대단한 게 아니라,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부분 그렇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좋아하기만 했지 뭐, 집이 어려워서 미술 공부는 생각도 못했어요.” 이 교수는 초등학교 입학 전, 유년기 2년을 대구희망원에서 보냈다고 했다. “꽁꽁 언 밥을 깨서 먹고, 나머지는 다음날 먹으려고 아껴뒀는데, 누군가가 그걸 훔쳐간 겁니다. 그런 고통은 안겪어 보면 몰라요. 드세고 폭력적인 아이들
틈에서 다섯 살짜리 아이가 생존한
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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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에서 생활하던 이 교수는 친척 형님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돼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고 한다. 유년기 그가 겪었던 치열했던 경험은 소년 이정한을 싸움꾼으로 만들었다. “동네 대장들끼리 모여서 ‘왕중왕’을 가렸어요. 친구들이 주욱 모여 있고 고등학생 형들이 그 가운데에 싸움판을 펴놓는 거죠. 그땐 먼저 코피가 나는 사람이 지는 거였는데, 요즘말로 제가 ‘짱’이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엔 이동네 저동네로 원정경기를 하러 다니곤 했는데, 그 시절 저랑 맞짱을 뜨던 친구가 정기영이예요. IBF 세계 챔피언 정기영이요.”
이 교수의 주먹이 절정을 치닫던 시기는 제대 후 입시준비를 하던 1981년 즈음이었다. “명동에서 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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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를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청년이 저한테 꺼지라고 했나 봐요. 제가 그 말을 못알아듣고 그냥 서있었는데, 아 그 청년이 저한테 오더니 다짜고짜 따귀를 때리는 겁니다. 그때가 갓 제대했을 때였어요. 그러니 제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순식간에 발차기를 날려 뻗게 만들었죠. 그런데 옆에 있던 다른 녀석들이 달려드는 겁니다. 졸지에 1:4 구도가 됐지요. 혼자서 여러명과 싸울 때는 반드시 벽을 등에 지고 싸워야 돼요. 그래야 뒤쪽을 신경쓰지 않게 되거든요. 그런데 명동 거리엔 벽이 없잖습니까. 그래서 전봇대 하나를 찾아, 그걸 벽삼아 싸웠어요. 제가 그땐 좀 많이 날렵했어요. 저는 한 대도 안 맞고 이 녀석들을 흠신 두들겨 패줬죠. 아 그런데 보니까 조직폭력배 같은 애들이 우르르 몰려오지 뭡니까. 걔들한테 잡히면 끝장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골목길로 줄행랑을 치다가, 명동역으로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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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의 이야기는 ‘야인시대’의 한 토막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고개를 돌려보니까 60대 노신사가 흰 양복을 입고 미소를 짓고 있는 겁니다. 그 신사가 다가와서는 ‘아주 싸움을 잘하는구먼’ 하더니 명함을 한 장 내밀었습니다. 꼭 한번 찾아오라면서 말이죠.”
두어달 뒤, 청년 이정한은 노신사에게 연락을 했다.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알고 봤더니, 그 사람은 폭력조직의 거물이었습니다. 자유당 시절 날리던 사람이었죠. 그 사람이 자기 일을 좀 도와달라고 하는데, 분위기 때문인지 그걸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졸지에 보스를 수행하게 됐지요. 그 사람을 따라 일본에 간 적도 있는데, 진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다다미방에 조직원들이 좍 도열해 있는 모습을 그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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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는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서 자꾸만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젊음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그런데 조직에서 나간다는 건 배신을 의미하던 시절이었어요. 당연히 응징이 뒤따랐죠. 고민이 돼서 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밤새 고민하던 이 교수는 조직에 있던 친구의 도움을 청해, 간신히 조직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아마 그때 나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아직도 그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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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 희비와 성패가 엇갈리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순천향대 독문과) 졸업 후 사업을 했던 이 교수는 마흔의 나이에 유학을 결심, 1996년 뉴저지의 시튼홀 대학(Seton Hall University)으로 학사 편입을 했다. 전 재산을 털어 그림공부에 매진한 그는 1998년 미술로 유명한 뉴욕 스튜디오 스쿨을 수료하고, 2001년 펜실베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 예술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2008년 콜럼비아 대학교 사범대학원에서 예술교육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 교수는 그 해부터 뉴저지 주립대(Stokton College)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6년 뒤인 2014년 충남 한서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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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노력하면 이룰 수 없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술학원 근처에도 못갔던 제가 미대 교수가 될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누구나 희망을 갖고 열심히 하면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저는 영어 실력이 달렸어요. 처음 토플 시험을 봤을 때엔 (당시 기준으로) 400점이 안나왔어요. 말이 됩니까. 그래서 죽어라고 공부했죠. 제가 토플 시험만 28번을 치렀습니다. 그랬던 제가 미국 대학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노력하니까 되더라고요. 결국 대학원에 입학할 때는 토플점수 600을 넘겼습니다.”
이 교수는 “사람들은 50대 후반이되면 대부분 은퇴를 준비하고 노후를 걱정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한창 일할 나이에 집에서 쉬어야 하는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얼마나 큰 낭비냐”면서 “사람들이 용기를 갖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돈키호테 희망을 쏘다’를 지난 2월 20일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