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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자들’ 모아 3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한 원동중 야구부 이야기

해암도 2014. 2. 25. 10:28


⊙ 선수 대부분 다른 학교서 외면받고 산골 원동중으로 모여
⊙ 경력 없다고 시험조차 못 보게 하는 현실에 좌절하기도
⊙ ‘자신감’과 ‘근성’ 앞세워 창단 3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

  지난 2월 5일 점심시간이 끝난 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경남 양산으로 향했다. 원동중학교 교문이 가까워 오면서 담장 너머로 외마디 비명 같은 기합소리, 배트와 공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문을 들어서니 서른 명 정도의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몸을 다 푼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을 가득 실은 카트를 끌었다.
 
  투수는 9명의 선수가 차례로 타석에 들어서는 동안 쉬지 않고 공을 던졌다. 어느새 투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완성한 지 한달 정도 되었다는 실내연습장은 학교 건물보다도 높았다. 철골 구조물 위에 비닐을 덮어씌워 밖에서 보면 비닐하우스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공이 뚫고 나가지 못하도록 안쪽에 그물을 쳐 놓았다. 실내연습장에서는 선수들이 2인 1조로 배팅 연습을 시작했다. 한 번 공을 칠 때마다 선수들은 ‘악’이라며 기합을 넣었다. 10분 만에 야구공 50개 정도가 담긴 상자를 2개나 비웠다. 코치와 조를 이룬 한 선수는 코치에게 “이제 그만할 게요”란 말을 꺼냈다. 코치는 “웃기지 마라”며 쉴 새 없이 공을 던졌다. 세 번째 상자를 비우고 나서야 코치 입에서 잠깐 쉬라는 말이 나왔고, 선수들은 배트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숨돌릴 시간은 고작 3분 남짓. 선수들은 공을 다시 상자에 쓸어 담았다. 이러기를 세 번. 오후 훈련은 주위가 어둑해진 6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훈련장을 나오는 선수들의 얼굴은 땀 범벅이었다. 그날 양산의 기온은 영하 1도였다.
 
 
  야구단 창단으로 폐교 위기 넘겨
 
  경남 양산시 원동면에 위치한 원동중학교. 양산이라고 하지만 시내에서도 가기 힘든 외딴곳에 있다. 하루에 여덟 번만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기다리거나 무궁화호열차를 타고 가다 원동역에 내려야 한다. 기차역에서도 10분을 더 걸어야 한다. 외길이다. 달리 안내판이 필요없을 듯한데, 그래도 작은 안내판이 외지인을 반긴다.
 
  갑자기 초록색 그물망이 나타났다. 학교 정문이란다. 보통의 철문을 연상했다면, 이곳에서는 전혀 아니다. 이곳으로는 걸어서 통학하는 학생들만 다니고 자동차는 길을 돌아 후문으로 출입해야 한다. ‘정문’을 들어서자 바로 실내연습장이 보였다. 다른 농어촌 학교에 비해 작은 운동장이 또다시 실내 야구연습장 때문에 반쪽이 된 것이다.
 
  비닐과 그물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듯한 실내 야구연습장. 이곳이 바로 ‘B급’을 모아 전국 우승을 일궈 낸 원동중학교의 야구 캠프다.
 
  원동중학교는 원래부터 야구 명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1980년대만 해도 원동중은 학생 수 400명이 넘는 평범한 학교였다. 하지만 원동면의 주 수입원이었던 매실 농사가 시들해지면서 학생들 대부분이 양산 시내로 전학을 갔다. 2010년에는 전교생 31명의 초미니 학교가 됐다. 당시 2학년 16명이 졸업하게 되면, 원동중은 인근 초등학교 졸업생을 받아도 전교생 17명을 넘길 수 없었다. 경상남도 교육청은 전교생 수 20명 미만을 폐교한다는 방침이었다. 이에 따라 원동중은 2012년 폐교가 예고돼 있었다.
 
  2010년, 최윤현씨가 이 학교 체육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학생 수를 늘릴 수 있는 대안을 생각했다. 바로 야구부 창단이었다. 무모하다는 주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최 교사는 2011년 3월 야구부 창단식을 가졌다. 문제는 ‘야구 선수’를 모집하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때 야구를 좀 한다는 학생들은 모두 부산 지역의 학교로 진학하길 원했다. 시골의 신생 야구부에 자진해서 들어올 야구 선수는 없었다. 야구를 하고는 싶지만 아무런 경력이 없거나, 다른 학교에서 야구부 입단을 거절당한 학생들 13명으로 ‘선수단’을 꾸렸다. 야구 선수라는 기준에서 보면 ‘B’급이 아니라 ‘C’급에도 미칠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현재 야구부 주장을 맡고 있는 왕재웅(16) 선수도 야구를 하기 위해 스스로 원동중을 찾아온 경우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야구를 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왕군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공부를 시키고 싶어하던 부모님은 왕군이 야구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배트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같은 반에서 양산리틀야구단 활동을 하는 다른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왕군은 다시 야구 얘기를 부모님께 꺼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한다. 부모님도 끝내 왕군의 꿈을 꺾을 수는 없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공부랑 야구를 같이 잘해야 한다’는 것.
 
  이제 그에게는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진학하고, 실제 야구부원이 되는 것이 과제였다. 당시만 해도 양산 시내에는 야구부를 가진 중학교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인근의 다른 중학교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아무런 경력이 없는 학생을 ‘야구선수’로 받아 주는 학교는 없었다. 양산과 인접한 부산지역 학교들은 입단 조건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때 이미 실력이 입증된 학생들이 많았다. 부산 시내를 뒤졌지만 왕군을 받아 주겠다는 학교는 없었다.
 
  아들의 낙망(落望)을 지켜보던 아버지 왕정인(41)씨는 원동중에서 야구부를 창단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곧바로 원동중에 원서를 넣었다. 그래서 ‘야구를 해 본 적 없는 야구 선수 지망생’ 왕재웅은 원동중 야구단 창단 멤버가 됐다. 양산시청에서 근무하는 왕정인씨는 “신생 팀이지만 그래도 내가 사는 양산에 있는 학교라 보낼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방출된 투수, 에이스로 성장
 
선수들은 방학 기간 동안 매일 10시간이 넘는 훈련을 한다. 선수들이 자세 교정을 위해 목에 줄을 매달고 훈련을 하는 모습.
  현재 주전 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이채호(16)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경남 김해에서 리틀야구를 시작해 2년 동안 투수로 활동했다. 2년간의 경력을 인정받은 그는 다른 유망 선수들과 함께 야구 명문 부산 개성중학교 야구부에 입단했다. 하지만 입단 후부터 문제가 생겼다. 그는 다른 투수들에 비해 체격이 작았다. 개성중은 덩치가 큰 선수들 위주로 훈련을 실시했다. 갈수록 이군이 끼어들 여지가 줄어들었다. 등판할 기회가 없으니 실력도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는 덩치 큰 동료 선수들이 시합에 나가 선전하는 장면을 벤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을 보냈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 감독은 이군에게 원동중학교를 소개시켜 줬다. 사실상 방출 통보였다. 야구를 포기하고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군은 야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감독에게 망설임 없이 원동중학교로 전학을 가겠다고 말했다.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해 겨울, 이군은 원동중학교 야구부에서 다시 야구를 시작했다.
 
  2루수인 김지훈(16)군처럼 일반 중학교에서 공부만 하다 야구를 하기 위해 전학을 온 학생도 있다. 김군은 어려서부터 부산에 살며 프로야구 경기를 자주 봤다. 자꾸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야구에 흥미가 생겼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께 리틀야구단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리틀야구는 하지 못했다. 결국 다른 또래들처럼 일반 중학교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없었다. 이미 입학해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전학을 가서라도 야구를 하고 싶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김군의 설득에 부모님도 허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군은 그동안 공 한 번 제대로 던져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알아본 학교에서도 이미 모집이 마감됐다는 답변만 들었다. 뒤늦게 얻은 기회를 포기할 순 없었다. 부모님도 인근 지역 중학교를 샅샅이 수소문했다. 다행히 원동중은 김군의 ‘야구부’ 입단을 수락했다. 김군은 “원동중학교가 아니었으면 야구를 시작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며 “처음에는 사인도 몰라서 헤맸었다. 요즘 들어오는 친구들도 처음 야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예전 나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정이 간다”고 말했다.
 
  전학을 온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야구부 막내 김재민(14)군도 일반 중학교에서 전학을 왔다. 중학교 1학년 과정을 거의 끝낸 작년 10월이 돼서야 중학교 야구단을 알아봤다. 야구를 하기 위해 용기를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프로야구 경기를 보면서 항상 야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초등학교 때 한 번 야구를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크게 반대를 하셨어요. 아마 내가 외동아들이라 다른 친구들처럼 공부를 안 하고 야구를 하는 것을 반대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부모님께 얘기하기까지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야구를 하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의외로 쉽게 승낙해 주셨어요. 같은 반 친구들도 내가 야구를 하러 전학을 간다고 하니까 깜짝 놀랐었죠.”
 
  경력도 없이 2학년을 앞둔 그를 ‘야구 선수’로 받아 주는 학교는 없었다. 입단을 허락한 학교에서도 유급(留級)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마지막으로 알아본 원동중만 유급을 하지 않고도 야구부에 입단할 수 있다는 대답을 했다. 결국 부모님과 상의 끝에 김군은 유급을 하지 않아도 야구부에 입단할 수 있는 원동중학교로 전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원동중학교 야구부에 입단했다.
 
 
  테스트 기회조차 받지 못해
 
현재 원동중학교 야구부 내야수로 활동하고 있는 윤진혁(16)군.
  지금은 내야수로 활동하고 있는 윤진혁(16) 선수. 윤군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리틀야구를 시작했다. 경상남도 밀양 유일의 리틀야구팀인 ‘밀양리틀야구단’ 소속이었다. 윤군이 입단할 당시에는 126명의 선수를 보유한 강팀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호기심으로 입단했던 선수들이 하나둘 나가기 시작했다. 신입부원은 석 달을 버티지 못했다. 처음 126명이던 단원은 1년9개월 만에 3명으로 줄었다. 윤군의 말이다.
 
  “밀양이 워낙 촌 동네고 야구가 그렇게 인기 있는 도시가 아니에요. 마지막 해체 한 달 전에는 3명만 남아서 훈련을 했을 정도였어요. 나를 포함한 마지막 3명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밀양리틀야구단은 해체됐어요. 코치도 해체만은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어요. 2년 동안 다섯 경기밖에 못해 봤어요. 사실 그 다섯 경기도 제대로 치른 것이라 말하기 민망하죠.”
 
  결국 밀양리틀야구단을 끝까지 지켰던 3명 중 윤군만 야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나머지 3명은 밀양의 일반 중학교로 진학했다. 윤군은 리틀야구에서 2년간 활동한 경력을 토대로 갈 수 있다면 명문 중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하고 싶었다. 제일 먼저 지원한 곳이 울산의 야구 명문, 울산제일중학교였다. 하지만 울산제일중 감독은 단칼에 입단을 거부했다. 경력이 신통치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큰 경기에서 입상한 경력이 없으면 입단 테스트조차 받을 자격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시험조차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단원이 3명밖에 없으니까 당연히 경기를 할 수도, 시합에 나갈 수도 없었죠. 그렇다고 훈련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에요. 1번 타자와 투수를 겸하며 실력을 많이 쌓았다고 자부해요. 시험을 보면 당당히 붙을 자신이 있었죠. 그런데 지원조차 할 수 없었어요. 하루는 어머니가 감독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어요. 사정을 설명하고 입단 테스트만이라도 볼 수 없냐고 사정하셨죠. 그런데 전화를 받은 감독은 경력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하곤 끊어 버렸어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죠. 당시에는 ‘굳이 이렇게 야구를 계속해야 할까’란 생각도 들었어요.”
 
  사정은 다른 학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학교가 경력을 요구했다. 윤군은 야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중학교를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밀양과 가까운 양산에 원동중학교가 야구부를 창단했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신종세 감독은 흔쾌히 테스트를 보러 오라고 답했다. 윤군은 당당히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고 2012년 1월, 원동중학교 야구부의 일원으로 배트를 다시 쥐었다.
 
 
  독기로 버텨 낸 1년6개월
 
선수들은 훈련 시간 중 절반 정도를 체력훈련에 할애한다.
  사연 많은 13명의 ‘낙오자들’로 시작한 원동중학교 야구부는 창단 후 1년6개월 동안 각종 대회에서 승리를 해 본 적이 없다. 다른 학교에서 받아 주지 않거나 야구를 하고 싶다는 의욕만 넘쳤던 학생들이니 오죽했으랴. 연이은 패배는 예견된 일이었다. 첫 승까지 걸린 1년6개월이라는 시간은 선수들에게 생각보다 길었다.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한 야구 선수’로 졸업한 1기 졸업생들은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꼴찌 학교’로 낙인 찍혀 선수들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왕재웅군도 창단 후 어려운 시기를 힘들게 버텼다. 왕군의 얘기다.
 
  “지는 것도 계속되면 습관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분하고 오기가 생깁니다. 그러다 계속 지게 되면 패배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렇게 무기력해지는 것이 제일 무섭죠. 창단을 하고 무려 1년6개월 동안 한 번도 이기지 못했어요. 연습게임에서는 몇 번 이긴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대회에만 나가면 무조건 졌어요. 져도 항상 콜드게임으로 지기 때문에 정규이닝을 채우지 못했죠. 정규이닝이라도 채우고 지는 것을 목표로 경기에 나간 적도 많았어요.”
 
  선수들은 첫 승을 위해 다른 학교의 2배가 넘는 훈련 양을 소화했다. 원동중학교 선수들은 운동장 귀퉁이의 컨테이너 가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숙소 문을 열면 바로 훈련장이다. 등하교 시간이 없는 만큼 그 시간을 체력훈련에 쏟아 부었다. 매일 아침 빠지지 않고 하는 달리기로 시작해 밤늦게까지 체력훈련을 하고 나서야 숙소에 들어갔다. 이 방침은 체육과 출신의 이규용 교장이 만든 것이다. 이 교장의 설명이다.
 
  “일본 규슈에 사가키타(佐賀北) 고등학교라는 학교가 있습니다. 2007년에 고등학교 야구부 주장 경력이 전부인 국어 교사 감독과 특기생 한 명 없는 선수진으로 우승을 한 곳이죠. 그곳 감독은 야구훈련은 하지 않고 체력훈련만 시켜서 우승을 했습니다. 한 번 우승은 운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두 번씩 우승을 시키는 그 학교의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어요. 그걸 본받아 우리 학교 학생들한테 기초체력 위주의 훈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는 운동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산속에 위치해 있습니다. 운동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여유시간이 생기면 모두 체력훈련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방학 때는 하루에 10시간이 넘는 훈련을 소화했다. 부상을 입는 선수들도 있었다. 1루수를 맡고 있는 윤성주(16)군은 작년 3월, 훈련 중 무릎 인대를 다쳐 5개월이나 재활훈련에 매달려야 했다. 부상이 심하지 않아 다시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4개월 동안 공도 잡아 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대통령기 대회 우승을 벤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부상으로 야구를 포기할 생각도 했었다. 윤진혁군도 훈련 중 팔꿈치 부상으로 3개월을 쉬었다. 윤군의 말이다.
 
  “내가 아파서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인데 동료들은 계속 지고 있으니까 답답했죠. 그래서 재활치료를 더 열심히 했어요. 빨리 돌아가서 팀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올해 3학년으로 진학하는 선수 8명 중 7명은 유급을 한 전력이 있다. 윤진혁 선수나 윤성주 선수의 경우, 부상으로 인한 결석일수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반면 나머지 5명은 야구를 못해서 유급을 결정했다. 당시 신종세 감독은 선수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1년 더 기초를 쌓을 수 있도록 유급을 하길 권했다. 학생들도 이에 동의해 유급을 택했다. 선수 대부분이 야구를 처음 시작했기 때문에 유급을 하지 않고서는 대회에 나가서 성과를 올릴 수도, 야구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9시까지 이어진 야간훈련을 마친 후에도 선수들은 자발적으로 운동장에 나와 개인연습을 했다. 독기를 품고 연습을 했지만 소위 ‘동네북’ 신세를 면하진 못했다. 연습경기를 나가면 상대편 선수들이 “원동중학교만 만나면 무조건 이긴다”고 조롱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예 면전에서 무시하는 말을 하는 상대편 코치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선수들은 좌절하는 대신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연습경기 때는 좋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가끔 이기는 경기도 있었다. 하지만 시합에만 나가면 연전연패였다. 매년 5~6개의 대회에 출전했다. 그중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자 야구를 포기하는 선수가 생기기도 했다.
 
  2013년 1월 경 첫 대회가 경주시장배 중학야구대회였다. 원동중은 이 경기에서도 졌다. 하지만 처음으로 콜드게임을 면했다. 그날 밤, 주장을 필두로 선수 전원이 자진해서 삭발을 했다.
 
 
  반전의 비결은 ‘자신감’
 
지난 1월 1일부터 원동중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은 이상훈 감독.(제공: 원동중학교)
  삭발의 효과였을까. 야구부는 이후 모든 경기를 전승으로 마무리하며 경주시장배 중학야구대회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창단 이후 공식 대회에서 거둔 첫 우승이었다. “대회만 나가면 진다”며 의기소침해 있던 ‘무명의 선수들’의 응어리를 푸는 데 1년6개월이 걸린 셈이다.
 
  야구부 창단을 주도했던 최윤현 체육교사가 창단 이후 가장 힘들어했던 일도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찾아 주는 것이었다. 그의 설명이다.
 
  “처음 야구부를 창단했을 때 부원들의 실력이 정말 좋지 않았죠. 야구를 처음 하는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야구를 어느 정도 하고 왔다는 친구들조차 기본이 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어요. 개인면담을 해 보니 선수들 스스로가 다른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서 이곳으로 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선수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했어요. 시합만 하면 콜드게임으로 지기 때문에 선수들이 실망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계속 강팀과의 경기를 주선했죠. 연습경기 기록을 모아 놓고 보니 점수 차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그걸 보고 자신들이 성장하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겨울에는 학부모님들이 직접 운동장의 눈을 쓸어 줬습니다. 감독님이 학부모님들께 직접 전화를 걸었습니다. 선수들이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학부모님들이 눈을 치워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두 말 없이 다들 오셨습니다. 부모님들이 한겨울에 운동장에 쌓인 눈을 치우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자신들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들에 대한 보답을 실력으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죠. 백 마디 말보다 부모님의 믿음을 한 번 확인한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국 1년 반을 노력하고 나서야 성과가 나왔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패배감을 견디지 못하는 선수들이 여럿 야구를 포기하고 전학을 신청하는 경우가 있었죠. 그런 선수들을 볼 때, 가장 가슴이 아팠습니다.”
 
2013년 대통령기 전국중학야구대회 우승을 확정 짓고 선수들이 코치진을 헹가래 치고 있다. (제공: 원동중학교)
  부산에서 고등학교 야구 코치로 재직하다 처음 이 학교 감독직을 맡게 된 이상훈 감독이 제일 먼저 한 일도 선수들의 승부욕을 기르는 것이었다.
 
  “요즘 학생들은 야구를 야무지게 하는 맛이 없습니다. 근성이 부족한 것이에요. 삼진을 당하더라도 자기가 열심히 했다면 아무 소리도 안 합니다. 하루는 타자 한 명이 생각 없이 방망이만 휘둘렀어요. 그날 안타도 여럿 만들어 낸 선수였지만 경기가 끝나고 정신 차리라고 혼을 냈습니다. 지금은 선수들 자세가 많이 나아졌어요. 앞으로도 자신감이 부족한 선수들에게 근성이 있는 야구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고,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지도할 계획입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일까. 원동중학교는 2013년 1월부터 1년여간 ▲경주시장배 중학야구대회 우승 ▲대통령기 전국중학야구대회 우승 ▲KBO총재기 전국중학야구대회 4강 진출 ▲울산시야구협회장기 전국중학초청야구대회 우승 등 굵직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학교 한편에는 야구부가 받은 트로피를 모아 놓은 전시대도 생겼다. 전국 대회 우승으로 알아보는 사람도 많이 생겼다. 선수들의 눈에도 지금은 자신감이 가득하다.
 
  지난 1월 15일, 울산시야구협회장기 대회 3차전에서 원동중은 울산제일중과 맞붙었다. 울산제일중에서 입단테스트조차 거절당했던 윤진혁군이 선발투수로 출전했다. 비록 승리투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원동중학교는 7:5로 승리했다.
 
  원동중의 우승 소식이 들리고 나서 밀양에서는 리틀야구단이 부활했다. 11명의 선수진으로 다시 출발한 야구단에는 해체를 막기 위해 애썼던 예전 코치진도 다시 돌아왔다.
 
 
  3학년 6명 중 5명 전학
 
선수당 매일 수백 개의 공을 친다. 가죽이 찢어진 공을 청테이프로 감아 놓은 모습.
  원동중학교에는 아직 큰 걱정거리가 남아 있다. 졸업을 앞둔 3학년은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전학을 갔다. 야구 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6개월 이상 해당 연고지에서 거주해야 한다. 2014년 2월 현재, 경남 양산에는 야구부를 운영하는 고등학교가 없다. 원동중을 졸업한 선수들은 특기생 자격으로 지원할 수 있는 학교가 없는 것이다. 특기생이 아니면 입단하기 힘든 고등학교 야구부 특성상 선수들은 전학을 가는 수밖에 없다. 결국 올해 졸업생 중 김성윤(17) 선수만 원동중에서 졸업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나마 진학이 확정된 포항제철고등학교에서 위탁교육 형식으로 받아 줬기 때문이다. 나머지 5명은 전국 각지로 전학을 갔다. 결국 원동중을 졸업한 야구부원은 김군이 유일하다. 현재 양산의 한 고등학교가 올 3월에 야구부를 창단할 예정이다. 예정대로 창단이 된다면 야구부원들이 원동중학교에서 졸업할 수 있다.
 
  원동중학교 야구부는 현재 3월에 열릴 전국소년체전 경상남도지역 예선대회를 대비해 동계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하루에 선수들이 한 명당 300개가 넘는 공을 친다. 야구공 실밥이 터지고 가죽이 찢어졌다. 그런 공을 선수들이 청테이프로 감아 다시 쓴다. 타격훈련이 끝난 운동장에는 멀쩡한 공보다 청테이프가 감긴 공이 더 많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 찬바람이 불어도 선수들 누구 하나 춥다고 움츠리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취침 시간인 11시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 선수들의 훈련은 끝이 나지 않는다. 원동중의 이런 모습을 기적으로만 표현하는 것은 오히려 예의가 아닌 듯하다. 뭐라 표현해야 좋을까. 그건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것도 믿기 어려운 드라마.⊙
  글 : 劉旿相 月刊朝鮮 인턴기자  취재지도 : 崔秉默 月刊朝鮮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