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큰스승 아잔차 스님께 한 서양인 제자가 불평 섞인 말투로 말했습니다. “왜 스님은 매일 마을에 내려와 신도들 머리에 물 뿌려 주며 축복하는 일에만 시간을 보내시는 겁니까? 깨달음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이런 일에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면 전혀 깨달은 분의 행동 같지 않아 보입니다. 너무도 실망스러워 저는 이 사원을 떠나겠습니다.”
스님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하셨다는군요.
“네가 나를 깨달은 사람으로 보지 않은 것은 큰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너는 깨달은 사람한테 매달려 지내느라 평생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 … 깨달음은 어디에
많은 이가 깨달은 스승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고 또 떠납니다. 그러다 삶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가 나 한 사람을 깨닫게 하기 위해 원래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행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이 특별한 상황, 특별한 조건이 주어질 때 찾아오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나머지 사람들은 이건 이래서, 그리고 저건 저래서 행복하지 못하다며 불만족의 구실을 찾아내려 애씁니다. 그렇게 행복이니 불행이니를 구별하며 살 듯 날마다 오는 날, 해마다 오는 해에도 사람들은 새해니 묵은해니 이름을 붙여놓고 삽니다. 새해를 노래한 선시(禪詩)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꿈속에 사는 동안 우린 또 새해를 맞았습니다. 새해라며 문안을 드리는 제자들에게 제 은사 스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스님, 오늘이 새해 첫날입니다. 건강하게 우리 곁에 계셔주셔서 고맙습니다.”
“오, 새해가 왔어? 난 전혀 몰랐네.”
올 해 아흔이 되신 노스님은 그렇게 묵은해인지 새해인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십니다. 아흔의 연세에 더 이상 시간에 대한 분별이란 무의미한 일이라 그러셨던 건지…. 새벽 두시 무렵, 홀로 방석 위에 앉아 계시는 노스님께 “안 주무시고 뭘 하세요?” 하고 여쭈면, 스님은 “내가 할 게 하나 밖에 더 있니, 내가 갈 꽃밭 내가 가꿔야지”라고 답하십니다. “정목아 내가 요즘 바보가 된 것 같구나. 아무 것도 모르겠어. 정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밖에 모르겠구나.” 그렇게 모든 걸 다 알고 계실 듯하던 스님은 이제 당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밖에 모르겠다는 고백까지 하십니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그 사실을 알기까지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는가 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낯선 분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사는 게 하도 힘들어 제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네요. 그럼 힘든 마음이 위로가 될 것 같다고 합니다. 전화를 넘겨받자 여인은 스님 목소릴 들으니 눈물이 난다며 울먹이다가 그만 목 놓아 울고 맙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분은 그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하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은사 스님의 말씀처럼 저 또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제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된다는 사람들과, 손을 잡기만 해도 용기가 생긴다는 분들 사이에서 대중의 아픈 삶을 실시간으로 느낍니다. 그걸 통해 저는 산중이 아니라 도시 한복판인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 있어야 하는지를 깨닫곤 합니다.
아흔살 스님의 고백 “아무 것도 모르겠어”
라디오에서 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를 치료하는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환자 한 분이 나를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가족이 아무도 없고 혈혈단신인 그 분은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병원 측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자 정목 스님과 통화 한번 하고 싶다고 했다는 겁니다. 통화가 됐는데 그는 몇 번씩이나 제게 방송하는 정목 스님이 진짜 맞느냐고 묻고 또 물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며 감격에 겨워 말을 멈추곤 했습니다. 그 분의 그런 순수함 앞에 저 또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미약한 힘이지만 잠시 벗이 되어 그 분 사연을 들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절망한 뒤 매일 술로 지내는 바람에 간이 다 녹아버렸고, 병원에선 아마 내일쯤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마지막 선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남의 말 하듯이 태연한 목소리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저는 그 분이 세파에 시달리는 동안 한 경지를 터득했고, 죽음에도 초연해진 사람같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죽기 전에 뭘 하고 싶냐는 병원 측의 호의에 종교는 없지만 스님과 통화나 한 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날 줄 몰랐다며 전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자기는 태어나 한 번도 남에게 뭘 베풀어 본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선물을 꼭 한 번 하고 죽고 싶다며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코앞에 둔 이가 가장 절실하게 하고 싶은 일이 남에게 뭔가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며칠 뒤 상주곶감 한 상자가 제게 배달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뭔가를 나누고 싶다며 보내 온 그 분의 선물을 불단에 올리고 저는 “고통이 하루빨리 끝나고 평안하시기를”하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곶감을 신자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눈을 감고 삶과 죽음, 그리고 베풂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창호지 바른 암자의 창 위로 햇살이 따뜻하게 배어들던 어느 날 오후의 일이었습니다.
어둠 깊을수록 한 줄기 밝음 간절해져
행자 시절부터 보아 온 은사 스님 방에는 추사 선생의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밝으니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하네.’
이 글을 쓸 때 추사는 참으로 쓸쓸하고 어두운 세월 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환한 밝음 속에서는 의식하지 못하던 한 줄기 빛은 깊은 어둠과 절망 속에서 더 간절해집니다. 날씨는 아직 차갑지만, 제가 사는 작은 암자의 매화나무 가지에 어느새 물기가 오르고, 지인들은 만발한 제주의 동백 사진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새해라고 노래해도 어떻게 보면 세상은 여전히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깊을수록 한 줄기 빛의 밝음은 더욱 우리에게 간절하게 다가옵니다.
문풍지를 통과해 들어오는 저 햇살처럼 새해엔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삶 위로 따뜻하고 밝은 빛이 비추기 바랍니다. 차가운 날씨 속에 동백이 피듯 어려움 속에서도 밝은 꽃 한 송이 피우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마음 속 화가 솟구칠 때 … 정목 스님의 마음조절법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르면 숨도 덩달아 거칠어집니다. 이럴 땐 쿰바카 호흡을 해보세요. 인도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호흡법인데, 화가 나고 불쾌한 감정으로 열 받을 때는 태양 에너지와 연결된 오른쪽 코를 손가락으로 살짝 막고 왼쪽 코로만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보세요. 3회에서 길게는 10차례 정도 숨을 쉬면 평온한 호흡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응용할 수도 있어요. 몸살감기로 한기가 들고 몸이 차가워졌을 땐 달의 에너지와 연결된 왼쪽 코를 막고 오른쪽 코로만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보세요. 찬 기운과 더운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몸이 따뜻해집니다.
호흡이 편해지고 마음이 평온해지면 지금 이 순간 돕고 싶은 한 사람을 떠올려 마음속으로 이렇게 속삭여 보세요. “당신에게 빛과 사랑을 보냅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가길 바랍니다.” 새해에는 그렇게 매일 아침 동이 트는 방향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짧은 기도로 하루를 열어보세요. 당신의 작은 마음 하나가 세상의 고통과 상처를 줄일 수 있습니다.
◆정목(正牧) 스님=1960년생. 광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불교방송·유나방송 등을 통해 마음의 이치를 전하고 있다. 처음으로 방송에 명상을 접목했으며, 17년째 서울대·동국대 병원과 함께 아픈 어린이 돕기 ‘작은 사랑’ 운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 『비울수록 가득하네』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 『산빛 이야기』 등.
중앙 2014.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