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은 경계 밖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추방해야 하는 자이다(…). 그는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인 특권 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며(…)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권력과 지성인』 중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써서 서양이 오랜 세월 동안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적 편견을 날카롭게 비판한 지식인이었던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 그가 1993년 영국 BBC방송 리스 강좌에서 강의한 내용을 모아서 낸 『권력과 지성인』(원제 Representations of Intellectual·1996)을 읽는 그때, 나는 ‘김수근 건축’이라는 견고한 영역에서 이탈하여 내 건축의 정체성을 찾아 검은 밤바다의 선원처럼 분투하고 있었다. 어디 기댈 곳을 찾아 이 집단 저 부류의 세계들을 연신 기웃거리고 있었으므로, 내 초라한 행색을 준열하게 꾸짖는 듯한 이 글로 나는 궤멸 당하는 듯 전율하였다.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라니….
건축가는 자기 집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집을 지어주는 일을 고유 직능으로 가진다. 그 직능은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사색과 성찰을 수반함으로 이뤄지는 일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타자화시키고 객관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컨대 건축가가 설계작업에서 거의 첫 번째로 그리는 도면인 평면도는 집을 중간 높이에서 수평면으로 잘라서 보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의 실체를 보기 위해서는 시점을 무한대의 높이로 올려야 하니 무려 신적(神的) 위치에 이르러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는 남이 사는 모습을 객관적 위치에서 보며 그 사는 방법을 조직하는 일이 평면도를 그리는 일이라는 뜻이어서, 이 도면을 그리게 되는 건축가는 스스로를 세상의 경계 밖으로 내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건축가의 직능이란 게 항상 새로운 상황과 만나면서 시작되는 일이다. 새로운 건축주와 만나고, 새롭게 삶을 시작하게 되는 사용자와 만나며, 새 땅과 만난다. 그런데 여기에 그냥 자기가 가지고 있는 타성과 관습의 도구를 꺼내어 종래의 삶을 재현시킨다? 이건 건축이 아니다.
그냥 관성적 제품이며, 그래서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소망을 배반하는 일이며, 어쩌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땅을 범하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 건축가는 늘 새로움에 반응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으니 경계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 소임을 파기하는 일과 같다.
자발적 추방자의 삶이 어찌 건축가에게만 해당할까. 우리 사회를 좀 더 밝게 진보시킨 모든
이들의 일관된 삶의 태도였다. 예컨대 예수가 대표적이다. 스스로를 광야로 추방하여 유대교의 관습을 비판하고 로마 총독의 권위를 따르지 아니했으며
소외된 자들과 약한 자들을 껴안고 사랑과 평화를 나누다가 모든 이들이 메시아로 추앙할 때 다시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아 불멸의 고독으로
추방하고 말았다.
석가모니도 마찬가지였다. 왕궁 밖의 자발적 추방자가 되어 제도에 묶여 있는 이들을 향해 스스로 번뇌를 끊으라고 했다. 해탈이란 그렇게 추방되어 얻게 되는 자유일 게다. 수없이 많다. 우리를 진보시키고 우리의 삶을 속박에서 자유롭게 한 이들 모두가 그런 우직한 삶의 태도를 갈망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 그런 이들은 늘 확신에 차 있었을까.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1961년 파리의 오데옹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그 무대를 디자인한 자코메티, 그 인연을 주목하며 이 위대한 두 작가가 가진 창작의 동력을 비교하며 쓴 책 『Dialogue in the void(공허 속에서의 대화)』에서는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강박관념이 있는데 바로 ‘불안’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다른 어느 누구도 마지막 결정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이 두 사람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늘 번민하고 주저한 끝에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만들어진 게 그들의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코메티의 조각은 늘 비어 있고 시시때때로 거리로 나와 그 비워진 부분을 거리의 풍경이 채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조성된 팽팽한 긴장이 강력한 힘을 분출시킨다.
그렇다. 나에게 설계를 맡기면 좋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듯 설명하는 나지만, 사실 이들의 불안이 나의 내면에도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이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내가 선을 잘못 그어서 그 속에 거주하게 되는 이들이 나쁜 삶을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내가 건축을 아니함만 못하는 것 아닐까 늘 불안한 것이다.
그 까닭일까. 대개 건축하는 이들은 늘 소심하고 주저한다. 마감시간에 쫓기며 밤새우는 일을 밥 먹듯 하는 게 그 증좌(證左)다. 그래서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기댈 집단과 제도를 기웃거리고 한 패가 되는 일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한다면, 그렇게 되면 건축가는 그 직능을 포기하는 일과 같다. 그래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혁신을 일으킨 스티브 잡스. 그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행한 연설의 한 문장은 그가 일군 업적만큼 강렬하였다. ‘우직하라, 그리고 갈망하라(Stay foolish, stay hungry)’. 그는 그렇게 살았다. 그의 말을 이렇게 바꿔도 될까. ‘Stay out, stay alone’. 바깥에서 머무르며 홀로 됨을 즐기는 삶, 이게 진정한 지식인의 태도며 적어도 바른 건축가가 사는 방법일 게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의 운명에 대해 다시 이렇게 설명했다. “지식인은(…) 단도직입적이다. 그러한 말들로 인해 높은 지위의 친구를 사귈 수도 없고, 공적인 영예를 얻지도 못하는 부득이한 현실로부터 전혀 탈출할 수도 없다. 그것은 고독한 상황이다.”
그렇게 되면 “깊은 겨울 밤 사나운 눈보라가 오두막 주위에 휘몰아치고 모든 것을 뒤덮는 때”일지도 모른다. 그때야말로 “철학을 할 시간”이라고 하이데거가 말했던가….
글=승효상 건축가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중앙 2014.01.11